책이 나와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차일피일 미루다 이제야 읽게 되었다. 2003년 2월에 나온 책이라는데, 내 손에 책이 들어오기까지 왜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린 걸까?, 스스로 생각해도 의아하지만, 읽어야지 해놓고서는 자꾸 잊은 탓이 크다 하겠다.
광고에서 이 책을 봤을 때 책표지가 퍽 인상적이었다. 읽고 보니 화양연화 부분에 이 그림이 들어가 있었는데 대충 이해가 되었다. 사람들은 으레 생각할 것이다. 나도 그랬으니까. 작가가 쓴 영화 이야기니 만큼 분명 영화를 무척 좋아하는 작가일 것이라고. 그러나 책에서 저자가 밝혀두듯 저자는 <스크린>에 원고를 쓰기 전에는 기껏해야 1년에 영화관에서 몇 편, 비디오로 몇 편 보는 영화가 고작이었다 한다.
영화 이야기를 쓴다고 해서 굳이 저자가 영화광이어야 하는 것은 아닐 테지만, 한 편의 영화를 보더라도 저자처럼 많은 생각을 떠올릴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처음에는 영화 이야기보다는 영화를 통해 연상되는 자신의 이야기가 주축을 이루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한 꼭지에 할당되는 영화이야기가 더 길어짐을 느낄 수 있었는데, 독자로서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것처럼 기분 좋은 일이었다.
내가 본 인상적인 영화를 저자가 이야기하고 있을 때, 역시 200% 공감이 갔다. 특히 <번지점프를 하다>와 <질투는 나의 힘>이 그랬는데, 저자는 멜로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를 엇갈림으로 규정한다.
멜로는 엇갈림의 서사다. 엇갈리지 않고 오다가다 다 만나면 그건 텔레토비지 멜로가 아니다. 멜로는 시간, 공간, 벡터(방향) 이 세 가지 중 하나라도 물리적으로 달라야만 성립한다. '그는 나를 오래 전부터 사랑해왔지만 나는 그가 떠난 후에야 그를 사랑하기 시작했다'면 그건 시간의 엇갈림이다. '내가 사랑하는 그는 너무 멀리 있다' 혹은 '죽었다'면 그건 공간의 엇갈림이다. 멜로 드라마의 주인공들은 만날 듯 만날 듯하면서 만나지지 않는다. 그들은 너무 빠르거나 느리다. 그게 보는 사람으로 하야금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거 웬만하면 좀 만나게 해주지. 이런 생각이 절로 들어야 멜로는 굴러 간다. - 본문 중에서
이 영화를 보고 엇갈림을 이야기하다니. 너무 안성맞춤이다! 영화도 영화지만, 영화평에 혹해서 영화를 보게 되는 사람들도 많을 터. 이 영화평을 보고 영화를 안 볼 사람은 몇이나 될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다음은 박찬옥 감독의 <질투는 나의 힘>에 대해 저자가 이야기하고 있는 부분이다.
나는 내용에 대해 대충 감을 잡고 있었다. 질투하는 인간 나오겠지. 질투 때문에 열 받다가, 진짜루 열 받다가 마침내 질투의 화신이 되어 자기로 하여금 질투를 하게 만든 자들을 죽여버리겠지? 그리고 외치겠지, 질투는 나의 힘!이라고. 그러나 영화는 내 예상을 보기 좋게 비껴갔다. 질투는 일종의 맥거핀이었다. 기형도와는 아무 관계가 없었다. 영화는 오히려 전혀 딴 얘기, 남자가 어떻게 남자, 그 별로 아름답지 않은 종족이 되는가에 관해 말하고 있었다. - 본문 중에서
<질투는 나의 힘>, 몇 해 전 이 영화는 내게 퍽 인상적이었지만 명확하게 무엇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머릿속에서 온갖 생각들이 물무늬 짓도록 만들었다. 다시 이 영화를 본 게 된다면 몇 해라는 시간이 흐른 지금, 그 시간의 간극만큼 의식이 성장했다면 그때 미처 알지 못했던 무언가를 만나게 될 것 같다.
이 책을 통해 과거에 본 영화들을 다시 떠올려 볼 수 있어서 좋았는데, 작가는 독자들에게 좋은 글에 대해서 친절하게 이야기 해주고 있었다. '좋은 글을 쓰는 일이 연애편지를 적는 일과 결코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어쩜 이런 적절한 비유도 들 수 있는지 작가라는 이름이 그저 얻어지는 게 아니라는 걸 곳곳에서 확인하게 된다.
...연애편지는 작자가 가진 역량을 총동원하게 만든다. 그러니까 대충대충 쓸 수가 없는 글이라는 얘기다. 강렬한 욕망, 바로 그 욕망이 나로 하여금 내 아는 것, 가진 재능 모두를 소비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랑에 빠지면 뭔들 못하겠는가. 밤을 새워가며 시집을 뒤지고 수십 번에 걸쳐 글을 고친다. - 본문 중에서
<김영하 이우일의 영화이야기>는 독특하게도 작가가 이야기 하고, 만화가가 그린 만화들이 곳곳에서 웃음을 자아내게 만들고 있다. 글을 읽는 내내 심심하지 않게 마치 독자를 배려하고 있는 듯. 이 책은 영화 이야기에 흥미를 가지고 있는 독자들에게는 분명 책장을 덮는 순간 입가에 선명한 미소를 지을 수 있도록 해 줄 반가운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