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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27일 이명박 시장의 '다보스포럼' 발언 논란은 여야 정치공방으로 마무리됐지만 이번 사안은 단순한 친일공방을 넘어 정치지도자들의 역사인식 빈곤이라는 문제를 드러냈다. 이에 하종문 한신대 일본지역학과 교수가 동아시아 평화의 비전을 만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역사인식 문제를 진단하는 글을 보내와 게재한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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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아시아 지도자 과거 집착" 발언 논란

ⓒ 오마이뉴스 이종호
지난달 27일 이명박 서울시장이 다보스포럼에서 한 연설을 놓고 정치권을 중심으로 논란이 일고 있다. 열린우리당 관계자들이 제기한 비판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역사의식이 결여된 천박한 발언' 정도일 것이고, 정치적인 확대해석을 포함하면 '친일적 발언'이 될 것이다.

이에 대해 이 시장 본인은 물론 측근까지 진의 해명에 나섰다. '아시아의 아데나워가 필요하다'와 '연설문 전문을 읽어봐라'가 반론의 핵심이다.

제1야당의 유력한 대권주자 중 한 사람이니 만큼 이명박 시장의 일거수일투족은 분명 남다른 무게를 지닐 수밖에 없다. '한·일 우정의 해'로 명명된 2005년마저 이런저런 갈등으로 빛이 바랬던 만큼, 올 병술년에는 '정랭경열(政冷經熱·정치는 냉랭하지만 경제는 뜨겁다는 뜻)'로 얘기되는 한·일 관계의 기조를 바꿀 수 있는 새로운 전망과 다각도의 노력이 요구되는 상황이다. 따라서 이 시장이 한 연설의 참뜻은 무엇인지, 이에 대한 여당의 비판은 적절한 것인지를 찬찬히 짚어볼 필요가 있다.

연설문 정독하기

논란거리를 제공한 측의 해명을 존중하는 뜻에서 이 시장의 연설문을 잠시 정독해 보자. 먼저 연설의 주제는 '아시아 통합의 재구성(Reshaping Asian Integration)'이다. 이 시장은 서울시장으로서 "일류 기업과 다름없는 효율적인 경영체제를 구축"한 자신의 치적을 피력하면서, 이를 바탕으로 "WTO 체제 하의 다자간 협력을 통해 범세계적인 무역 및 투자자유화를 추진하여 인류의 공동 번영을 추구"하는 것이 아시아 통합의 핵심이라고 역설했다.

신자유주의의 전령격인 다보스포럼에 어울리는 연설이자 현 정부의 정책 기조와 그리 다르지 않은 내용이다. 이번 논란의 불씨는 여야 모두 공감하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로의 여정에서 아시아, 특히 한·중·일의 상황이 어떠한가를 둘러싸고 벌어진다. 이 시장은 상황인식은 다음과 같다.

"최근 일부 아시아 정치지도자들은 과거역사에 얽매여 국가 간의 긴장을 고조시키면서 아시아의 미래를 어둡게 하"고 있으며, 구체적으로 "중국, 일본, 한국의 정치지도자들은 한편으로는 동아시아 지역협력을 주장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서로 대화를 기피하고 있"다고 한다. 이와 더불어 "진정한 반성과 이웃에 대한 배려로 2차대전 이후 과거를 청산하고 미래를 위해 화해와 협력을 한" 유럽과는 달리 아시아에는 아데나워와 같은 지도자가 없다는 아쉬움을 토로한다.

결론적으로는 "민족주의, 지역주의에 근거한 아시아 블록화를 부추기"는 아시아의 일부 지도자가 아니라 "과거에 집착하는 행태를 버리고 미래를 향한 비전과 이를 실천할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여당 쪽의 비난이 쏟아지자, 이 시장은 아데나워와 같은 지도자가 없어 아쉽다는 뜻이라고 해명했고, 한 측근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아데나워와 같은 지도자가 없는 일본을 비판한 것이라 거들었다.

역사냐 경제냐? 천박한 인식의 출발점

그러나 아무리 전문을 정독해도 두 사람의 해명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 과거사를 둘러싸고 최근 동아시아에서 일고 있는 갈등의 책임은 1차적으로 일본에 있기 때문이다. 한국이나 중국에도 대국적인 리더십을 발휘해서 문제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책무가 당연히 있겠지만, 그런 한·중의 지도자가 과연 아데나워로 상징돼야 하는 게 적절한지 여부는 삼척동자도 알 일이다.

사실 이번 사태에는 겉보기보다 심각한 면이 있다. 분명 여당의 주장대로 이명박 시장의 역사인식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은 지극히 타당하다. 1960년대 한·일 협정 체결에 반대했던 이 시장의 과거 경력을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논란의 핵심이자 근원이 그의 '천박한 역사인식'에 있다고 한다면, 그 점에서 한국의 정치지도자 대부분 또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이 뼈아프게 와닿는다. 아울러 그런 역사인식이 '천박한 국익론 혹은 경제주의'와 조응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1997년 IMF 외환위기 사태는 사실 1998년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성사시킨 원동력이었다. 미증유의 경제 침체를 배경으로 성사된 '한·일간의 과거사는 청산되었다'는 두 정상의 외침에 맞장구를 치듯 '역사보다는 경제'라는 구호가 한국의 매스컴을 장식했다.

2001년 후소샤의 '새로운 역사교과서' 등장은 일부 지각없는 일본 우파의 소행 정도로 치부되었고, 뒤이은 한·일 월드컵의 열기는 한·일관계의 새로운 미래를 열어줄 것으로 간주됐다.

현 정권 아래서도 이런 흐름은 재검토되지 않았다. 출범과 동시에 추진된 '동북아 중심 국가'라는 캐치프레이즈는 애초부터 경제주의에 기울어져 있었다.

아픈 과거사를 직시하고 해결하는 것이 진정한 한·일 우호의 토대임을 간과했기에, 2004년 여름 노무현 대통령은 고이즈미 수상과 제주에서 '임기 중에 과거사를 제기하지 않겠다'고 발언했다. 하지만 지난 한해 한·일 관계는 독도, 역사교과서, 야스쿠니 참배라는 악재로 일그러졌고, 급기야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보편적인 원칙'에 입각한 한·일 관계의 새로운 틀을 정립해야 한다고 천명하기에 이르렀다.

요컨대 한국의 정치지도자들은 '역사냐 경제냐'라는 우문을 놓고 현답을 찾아 헤맨 형국이다. 차기 대통령을 꿈꾸는 이명박 시장의 연설도 한·일 관계의 전사(前史)에 관한 정확한 인식을 결여한 채 성급하게 우문을 껴안으려는 데서 비롯된 것으로 판단된다.

아울러 이런 한계를 꿰뚫어 보지 못하고 '친일적 발언' 운운하는 여당의 반응도 함량미달이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현재 한·일 관계의 경색 혹은 악화는 진정한 한·일 우호를 위한 산고의 과정임에 틀림없다.

반성과 통합의 지혜, 브란트에게서 배워라

한편 일본 내부로 눈을 돌리면 현재 패전 이후 최대 전환기를 맞고 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외신을 통해 전해지는 우경화의 광풍은 이제 일본 사회 전역에서 휘몰아치고 있으며, 최근 분위기는 군부 파시즘이 득세하던 1930년대와 흡사하다는 분석마저 들려온다. 냉전체제 해체와 맞물려 작금의 상황은 100년 전 한반도 위기를 연상케 한다는 경고가 결코 과장이 아닌 셈이다.

단언하건대 역사교과서에서든 야스쿠니에서든 우리가 일본의 우경화를 우려하고 문제제기를 하는 것은 한국만의 살 길을 찾고자 함이 아니다. 다보스포럼에서 이 시장이 했던 연설의 주제가 '아시아 통합의 재구성'이었듯, 한·일 양국은 물론 동아시아에서 배타적 민족주의와 지역주의의 발호를 자극하는 과거사의 앙금을 털어내고 화해를 도모하자는 것이 근본 취지다.

일본의 우익은 한류 확산을 못마땅해 하며 과거 대일본제국의 향수를 고취하려는 고립주의자들이라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된다. 일본의 우경화가 중국에서의 신패권주의 대두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경제교류 확대와 더불어 과거사의 올바른 청산을 통해 동아시아의 역사화해를 앞당기고 평화로운 공동체 형성을 위한 밑거름을 다지고자 하는 것이다.

하종문 교수
하종문 교수
독일의 획기적인 과거사 청산은 이명박 시장이 존경해 마지않는 아데나워 수상 시절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68반란'을 전후해 아데나워 시절의 어정쩡한 과거사 덮기를 반성하면서 독일 사회의 양심이 되살아났고, 1970년 빌리 브란트 수상이 폴란드를 방문해 무릎 꿇고 사죄를 청한 것은 그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

브란트의 동방정책은 이후 정권에도 승계되어 독일의 분단을 종식시키고 유럽이 결속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따라서 진정으로 이 시장이 한국의 대통령이 돼 한·일 관계를 바로잡고 아시아 통합을 실현하고 싶다면 아데나워가 아니라 브란트를 본받을 일이다. 아울러 이 시장이 고이즈미 총리를 비롯한 가해국 일본의 지도자들에게 이런 점을 더 고민하도록 권유하는 것이 적절했을 것으로 보인다.

덧붙이는 글 | 하종문 한신대 교수는 서울대 인류학과를 졸업하고 도쿄대 일본연구과에서 석사, 도쿄대 인문과학연구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일본사를 전공한 하 교수는 동아시아에서의 국가 폭력에 대한 반성 및 평화를 이루기 조건을 탐색하는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발간된 한중일 공동 역사 부교재 '미래를 여는 역사' 편찬 작업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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