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 체스우드 회사 근처 유닛에 세 들어 사는 30대 초반 독신 직장인 L씨는 퇴근하기 무섭게 집으로 달려간다. 1년 전 적적함도 메울 겸 강아지를 키우기 시작했는데, 최근 이웃으로부터 두 차례나 개가 너무 시끄럽게 짖어댄다는 경고를 들었기 때문이다. 경고를 세 번째 받으면 어쩔 수 없이 애완견을 처분해야 하기 때문에 L씨는 회사에서도 강아지 걱정으로 제대로 업무를 못 볼 만큼 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오랜 고민 끝에 L씨가 선택한 해결책은 애완견 대신 파충류를 키우자는 것이었다.
호주에서는 최근 L씨와 유사한 경험을 가진 도심지 거주자들을 중심으로 뱀이나 도마뱀, 거북이 등 파충류를 애완동물로 키우는 사례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개나 고양이 대신 파충류를 애완동물로
파충류는 개나 고양이보다 사람 손이 덜 갈 뿐 아니라 사육비도 저렴하다는 게 그 이유다. 특히 이웃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도시인들 사이에서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휴가를 갈 때도 먹이만 주고 가면 달리 돌 봐 줄 필요가 없다는 점도 파충류 키우기의 장점 중의 하나. 휴가철마다 집에 남겨지는 애완동물을 맡길 곳을 물색하느라 골치 아플 염려가 전혀 없다는 게 파충류 애호가들의 한결 같은 주장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호주 가정에는 카펫비단뱀을 비롯해 긴 목 거북이, 짧은 목 거북이, 턱수염 도마뱀, 파란 혀 도마뱀, 목도리 도마뱀 등 파충류들이 늘고 있다. 뉴사우스웨일스 주(NSW) 야생동물보호협회(NPWS))에 따르면 지난 1년 사이에 뱀이나 도마뱀 거북이 따위를 키우는 사람들이 NSW 주에서만 20% 이상 증가했다.
이처럼 파충류와 인간이 전에 없이 가까워진 이유는 호주인들의 라이프스타일 변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앞마당과 뒷마당을 갖춘 잔디 넓은 전통가옥 보다 젊은 세대들을 중심으로 점차 아파트 선호경향이 확산되다 보니 애완동물의 대명사격인 개나 고양이를 키우기 힘들어진 것.
애완파충류는 기벽을 가진 애호가들에게도 큰 인기다. 그들은 인위적으로 독사의 허물벗기를 도와준다거나 살아있는 동물을 파충류에게 먹이로 던져주면서 자신들의 욕구를 충족한다.
한편 개나 고양이를 그대로 키우면서 뱀이나 도마뱀을 함께 키우는 집도 많다. 과거에 주로 새를 함께 키우던 것과 비교한다면 '새 대신 뱀'이라는 달라진 세태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새 대신 뱀', 그러나 면허증 있어야
그렇다고 아무나 파충류를 키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호주에서는 파충류뿐 아니라 야생 쥐나 집 마당의 개구리 등도 함부로 잡을 수 없다. 법으로 금지되어 있는 것. 다치거나 병이 난 동물을 우연히 발견해서 치료하고 보호해준 경우라도 그대로 키우게 되면 불법이다. 호주의 모든 야생동물은 야생동물보호협회의 보호아래 생존권을 보장받고 있기 때문이다.
파충류를 애완동물로 키우고 싶다면 우선 야생동물보호협회(NPWS)에서 면허증(허가증)을 발급받아야 한다. 파충류 사육 면허증은 부모 동의 하에 만 10세 이상부터 소지할 수 있으며, 면허는 2년마다 갱신해야 한다. 면허를 재발급 받을 때마다 60달러에서 120달러 정도의 추가비용을 내야 한다. 야생동물보호협회 통계에 따르면 현재 NSW주에만 약 9500명이 파충류 소유 면허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면허증을 취득하면 뱀이나 거북이 등을 살 수 있는데 파충류의 매매나 양도 또한 면허를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만 가능하다. 동물보호협회가 애호가들이 소장하고 있는 파충류의 종류와 소지자의 신상명세를 언제든 추적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소장하는 파충류의 종류에 따라 면허증도 1종과 2종으로 분류되며 주에 따라서는 3종 면허증을 따로 발급하기도 한다. 1종 면허는 만 10세 이상이면 누구나 소지할 수 있으며, 독이 없는 일반 종류의 뱀이나 거북이, 보통의 도마뱀 등을 키울 수 있다. 2종 면허는 만 18세 이상 성인에게만 발급되며, 1종 면허를 2년 이상 소지한 사람만이 취득할 수 있다. 일례로 독사를 키우고 싶다거나 까다로운 생리를 가진 목도리 도마뱀을 갖고 싶다면 2종 면허가 있어야 한다.
이밖에 키우는 동안 사육 일지를 써서 야생동물협회에 1년에 한번씩 보고를 해야 한다. 만약 중도에 사육을 포기할 경우, 기록일지를 다음 사람에게 넘겨야 한다. 말하자면 일단 사람 손에 넘겨진 파충류들은 죽을 때까지 누군가에 의해 기록되고 보호받는 셈이다.
파충류뿐 아니라 개구리나 올챙이를 키울 경우에는 양서류 보호허가증을, 야생조류에 대해서는 조류취득 면허를 각기 발급받아야 한다.
파충류가 과연 '애완동물'이 될 수 있을까
그러나 동물보호협회 연구팀은 집에서 기르는 파충류에 대해 개나 고양이한테서 얻을 수 있는 친근감을 기대하는 것은 그야말로 지나친 기대라고 전한다. 파충류는 개나 고양이처럼 지능수준이 높은 것도 아니고, 사람을 따르거나 애정을 보이지도 않을 뿐더러 순전히 본능적인 행동을 취하면서 살아갈 뿐이라는 것.
지난 달 중순 경 파충류를 중심으로 한 호주인들의 애완동물 선호도 변화에 대해 보도한 <선샤인코스트데일리>지는 "마치 개와 고양이를 대하듯 뱀을 지나치게 가까이 두고 귀여워한다면 뜻하지 않은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야생동물협회측은 뱀에게 먹이를 주다가 손가락이 잘린 사례가 이따금 있다고 전하며, 파충류에게 어떤 애정을 기대하기보다 커가는 모습을 관찰하고 보호하는 정도에서 만족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그들은 또 파충류는 냉혈동물이기 때문에 종류에 따라 적정온도를 유지해 주지 않으면 식욕을 잃고 병드는 등 의외로 까다로운 면도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온혈동물과는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환경 조성에 유의해야 한다고.
또 대부분의 파충류는 수명이 매우 길기 때문에 애완동물로 삼기 전에 신중한 결정을 할 것을 당부한다. 비단뱀의 수명은 약 15년이며, 거북이는 최고 50년, 개구리도 길게는 20년을 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파충류를 애완동물로 선택하려면, 그들을 오랜 기간동안 잘 보살필 각오가 우선적으로 요구된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