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와는 달리 부푼 기대감이 내 눈과 손을 재촉해 나는 한달음에 책을 읽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책의 제목이 벌써 암시하고 있듯이 <아침꽃을 저녁에 줍다>는 한달음에 읽고 나서 그냥 내쳐 놓을 책이 결코 아니어서, 나는 다시 책을 펼쳐 들었다. 이번에는 인상적인 구절을 내 도서리뷰 파일에 또박또박 옮겨 적기도 하면서 공들여 읽었다.
간밤에 떨어진 꽃을 아침에 바로 주워 내다버리는 대신에 마당에 그냥 놔둔 채 몇 번이나 그 색깔과 향기를 음미하고 난 다음인 저녁에 가서야 비로소 꽃을 주워드는, 그런 여유로운 마음으로 말이다. <아침꽃을 저녁에 줍다>는 바로 그런 '조화석습(朝花夕拾)'의 마음으로 읽어야 비로소 그 진미를 맛볼 수 있는 책이다.
읽는 이에 따라 달리 생각할 수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아침꽃을 저녁에 줍다>는 '개혁'에 관한 책으로 여겨진다. 우리 시대의 가장 진보적이며 또한 실천하는 지식인 중의 한 사람인 리영희 선생님이 이 책에 서문을 헌사하고 있음이 그 뚜렷한 증거다.
이 책을 읽어가는 독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루쉰이 바로 최근의 한국, 심지어 현재의 우리 사회와 그 속의 인간을 그리고 있다는 착각을 하게 될지 모른다. 어쩌면 읽고 있는 독자 자신을 말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깜짝 놀랄지도 모른다. 그리고 부끄러워질 것이다. 그리고 또 자신의 정신과 가슴속을 루쉰이 훤히 들여다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것이 루쉰의 글이 주는 감동이다. - 8쪽, 서문 '루쉰에게서 발견하는 오늘의 우리'
20세기 초 봉건주의와 서구 근대라는 이중의 억압에 놓여 있던 중국의 참담한 현실과 중국인의 병든 정신을 겨냥하고 있는 루쉰의 글과 사상이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과 현실을 읽는 데 여전히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는 이러한 지적은 몹시도 뼈아프지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청산되지 못한 봉건주의의 병폐들과 급조된 서구 근대 이데올로기의 폐단들이 첩첩이 개혁의 칼날을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어느 시대, 어떤 사회든지 개혁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개혁에는 피가 따르기 마련이고 그렇게 흘린 피의 물결이 금세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개혁을 멈추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역사는 바로 그런 피를 동력으로 삼아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역사는 인류의 피의 전투를 동력으로 하여 전진한다. 이러한 역사의 과정은 석탄의 형성과정과 유사하다. 처음에 수많은 목재가 묻히더라도 결국 조그만 덩어리를 얻을 뿐이다. - 171쪽, '류허쩐 군을 기념하며'
하지만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렇다고 해서 유혈이 바로 개혁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루쉰이 개혁을 힘주어 말하면서도 '피는 돈을 쓰듯이 해야 한다. 인색해서도 안 되지만, 낭비하는 것도 크나큰 오산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루쉰은 여기서 더 나아가 '참으로, 세상을 한때 짧게 놀라게 하는 희생보다는 깊고 끈기 있는 투쟁이 더 낫다'라고 말한다.
그렇다. 이것이 바로 루쉰이 말하는 개혁이다. 이것은 개혁을 단칼에 성취하기 위하여 피를 흘리는 조급한 투쟁이 아니라 인내심을 갖고 멀리 내다보며 끈기 있게 실천하는 느긋한 투쟁이다. '아침꽃을 저녁에 줍는' 이러한 개혁의 방식에서는 죽은 자의 피 냄새보다 산 자의 땀 냄새가 훨씬 더 많이 풍겨 날 것이다.
내가 맡고 싶은 것은 바로 그 땀 냄새인데, 루쉰의 산문집 <아침꽃을 저녁에 줍다>에는 시대와 인간을 깊이 고뇌하고 비판하고 실천했던 한 지식인의 땀 냄새가 가득 배어 있어서 읽기에 즐거웠다. 거의 한 세기를 건너뛰어 그의 글을 읽는 오늘날까지 그가 흘린 땀 냄새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음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덧붙이는 글 | 루쉰 산문집 <아침꽃을 저녁에 줍다>
ㅇ루쉰 지음
ㅇ이욱연 편역
ㅇ도서출판 예문 펴냄
ㅇ2005년 11월 15일 초판 2쇄
ㅇ정가 9,5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