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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아버님께선 오십대 중반 젊은 연세에도 불구하고 당뇨 합병증으로 크게 편찮으셨습니다. 병원에선 힘들다 하여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모셨고 어머님께서는 이것저것 약초며 음식이며 혼신을 다해 아버님 병 수발을 하셨습니다.

어머님의 지극한 정성 때문에 하늘이 감동하였는지 언제 숨을 거두실지 몰랐던 아버님 병세는 점점 호전돼 지금은 몰라보게 건강해지셨답니다.

남편은 일남 오녀 중 외아들이었는데, 혼기가 차도록 결혼을 못했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아버님께서 근심어린 말투로 '네가 빨리 결혼을 해야 손자라도 안아보고 눈을 감을텐데'라고 하셨다 합니다.

손자만 오면 다른 사람으로 둔갑하는 시아버지

그런데 지금은 벌써 손자가 둘입니다. 평소 무뚝뚝하시고 표현을 잘 안 하시던 저희 아버님은 손자들만 오면 다른 사람으로 둔갑을 하십니다. 젊은 시절 목수 일을 하셔서 손재주가 좋으셨던 아버님은 손자들 눈높이에 맞춰 뚝딱뚝딱 이것저것 만들어 주시곤 합니다.

또 저희가 "아버님, 지금 내려가요"하고 전화를 드리면 일찌감치 겉옷을 챙겨들고 여름이건 겨울이건 동네 입구까지 나오셔서 저희들을 반겨주십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집에만 계시는 아버님을 자주 찾아뵙지 못한 게 못내 죄스러워집니다.

그런데 얼마 전 시골에 내려갔을 때 마을 입구에서 기다리고 계셔야 할 아버님이 쇠약해진 모습으로 방에 누워 계셨습니다. 좋아졌던 건강이 담배와 약주를 즐기시는 것 때문에 조금씩 나빠지는 것 같아 많이 안타까웠습니다.

혼자 농사지으시는 어머님을 도와드리지 못해 마음이 불편하셨던 아버님께서는 약주로나마 마음을 달래고 계셨던 거지요.

아버님께서는 아픈 몸에도 불구하고 '우리 손주 왔냐'며 아프신 몸을 일으키셨습니다. 식은 땀을 흘리면서도 손자와 놀아주셨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저의 코끝이 찡해지더군요. 부디 아버님께서 오래오래 건강하시고 만수무강하시길 마음 속으로 빌어봅니다.

남편은 아버님을 굉장히 무서워합니다. 지금도 곤한 잠에 빠져 있는 남편에게 "여보, 아버님 오셨어"라고 하면 벌떡 일어날 정도니까요. 전 의외였습니다. 대부분 딸이 많고 아들이 하나인 집은 아들을 귀하게 여기는데, 저희 어머님과 아버님은 정반대였습니다.

남편에게 어릴 적 얘기를 들어보니 정말 고생을 많이 했더군요. 초등학교 때부터 집에서 키우는 소밥이나 겨우 내내 써야 할 나무들을 남편이 거의 했다고 합니다. 언젠가 친구들하고 놀다 소풀 베는 걸 '깜빡'한 남편이 아버지가 무서워 집에도 못 들어가고 밤늦게까지 장독 뒤에 숨어 있었던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배고픔도 잊은 채 말이지요.

말 따라하는 아들 때문에 부부끼리 경어 사용

하지만 손자들에겐 엄청난 사랑을 베푸십니다. 아마도 아들에게 못준 사랑까지 주는 건 아닐까요. 저는 알 것 같습니다. 겉으로는 강한 척하시지만 속마음은 여린 분이시란 걸요.

아버님 생신이 돌아와 온 식구가 모이니 그야말로 대가족이었습니다. 저는 결혼 초 첫 명절을 맞았을 때 너무 많은 식구들 때문에 적응이 잘 안 되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조용하면 더 이상하답니다.

평소 아버님께서는 어린 조카들과 장난을 치며 "개코다"라는 소리를 자주 하십니다. 그런데 어느 날 네살배기 큰 아들 영진이가 갑자기 사촌 형들에게 사투리까지 써가며 "아따 어메 개코다"라고 그러는 거였습니다.

모두들 박수를 치며 박장대소를 하는데 아버님께서는 며느리 앞에서 민망하셨는지 살며시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그 뒤로 아버님께서는 그 소리를 약주 드실 때 빼고는 다시는 하지 않으셨습니다.

저희 큰 아이는 지금 한창 호기심이 많고 아무 말이나 잘 따라하는 시기인 모양입니다. 제가 무심코 남편에게 "너나 잘 하세요"라고 장난치며 말했더니 어느 날 "어린이집 가려면 옷 입어야지"라는 말에 글쎄, "너나 잘하세요"라고 하는 게 아니겠어요?

요즘 우리 부부는 큰 아이 앞에서 말조심 하느라 서로 경어를 써가며 지낸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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