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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시베리아의 이발사(Love of Siberia)>의 무대가 되기도 했던 수도원 전경
영화<시베리아의 이발사(Love of Siberia)>의 무대가 되기도 했던 수도원 전경 ⓒ 유근종
한마디로 말하면 러시아의 겨울은 정말 춥다. 하지만, 내가 경험한 러시아의 겨울은 지낼 만 했다. 우리나라와 달리 러시아 모스크바의 겨울은 습하지가 않아 실제 온도에 비해 체감온도는 그렇게 낮은 편이 아니다. 우리나라에는 '살을 에는 듯한 추위'라는 말이 있지만 러시아에는 이런 표현 대신 '마로스(Maroz)'라는 동장군이라는 말만 있을 뿐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러시아에 겨울만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사실 러시아에도 4계절이 모두 존재한다. 하지만 겨울이 상대적으로 길다는 표현은 맞는 것 같다. 전에 러시아에서 가져온 달력을 넘겨보니 그 달력 속 풍경의 절반에 눈이 등장하는 것을 보았다. 이것으로 러시아의 겨울이 얼마나 긴 것인지의 설명은 충분할 것 같다.

모스크바에서 겨울이면 하루가 멀다 하고 눈이 내린다. 한 번은 얼마 전 귀국한 친구가 살던 모스크바 대학교 기숙사에 놀러 갔다가 나오는 길에 함박눈을 만났다. 인적이 드문 자정쯤으로 기억하는데 그 시간에 트럭 한 대가 오더니 사람들이 한 무리가 내려서는 제설작업을 하는 것을 보았다. 얼마나 제설작업이 익숙했으면 모든 일들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붉은 광장에서 제설작업을 하는 특수차
붉은 광장에서 제설작업을 하는 특수차 ⓒ 유근종
제설작업에 관한 한 러시아가 세계에서 으뜸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또 한 번은 붉은 광장에 나갔다가 제설 작업하는 차를 본 적이 있는데 엄청나게 큰 기계의 움직임이 마치 사람이 작업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자유자재였다.

러시아의 겨울은 해가 아주 짧고(오전 10시쯤에 해가 뜨고 오후 4시면 어두워진다), 해를 볼 수 있는 날이 드물다. 한 번은 오죽했으면 2주에 한 번만이라도 해를 볼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란 적이 있을 정도다.

자작나무에 내린 상고대(Iney)
자작나무에 내린 상고대(Iney) ⓒ 유근종
해가 나면 우리나라에서는 높은 산에서나 볼 수 있는 상고대를 러시아에서는 집 근처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이 상고대를 러시아에서는 ‘이니(Iney)'라고 하는데 해가 뜨면 너무나 아름답다. 그 중에서도 자작나무에 서린 이니가 가장 아름답다. 아침 햇살을 받은 자작나무의 하얀 피부에 빛을 받아 반짝이는 상고대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뛴다.

아르바뜨거리에 있는 평화의 벽
아르바뜨거리에 있는 평화의 벽 ⓒ 유근종
러시아에서 잊을 수 없는 겨울에 일어난 에피소드가 몇 가지 있다. 첫 번째는 모스크바 외곽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경험한 러시아 전통 목욕탕 바냐에 간 일이다. 그 당시 나는 박물관과 음악회를 자주 다녔는데 박물관에서 알게 된 우크라이나인 친구가 어느 날 “너, 바냐 가 본 적 있어?”라고 묻기에, ‘없는데~, 한 번 가 보자!’ 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모스크바 외곽으로 달리는 일렉뜨리치까(전기기차)를 타고 갔는데, 처음으로 경험한 러시아 바냐는 독특한 경험이었다. 사우나 내부가 3단계로 층이 있다. 처음 들어갔을 때 2단계에서는 참을만 했는데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니 도저히 참기가 어려워 아래로 내려왔던 기억이 난다.

같이 간 친구는 여유롭게 앉아 있더니 얼음구멍에 들어가자는 것이었다. 그래도 호기심에 따라 갔다가 얼음 위를 걷는 것도 힘들어 중간에 포기하고 돌아왔다. 하지만 그 추위 속에서도 친구는 물 속에서 헤엄까지 치더니 빨리 오라고 손짓까지 했다. 한겨울에 이 차가운 물 속에 뛰어드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모스크바 근교의 끌린에 있는 차이코프스키 동상
모스크바 근교의 끌린에 있는 차이코프스키 동상 ⓒ 유근종
두 번째는 해마다 12월이면 시내 뿌쉬낀 미술관에서 열리는 <12월의 밤 음악축제>에 관한 추억이다. 러시아 사람들은 으레 줄 서는 것이 생활이라 평소처럼 기다리는 시간을 대충 계산하고 미리 집을 나섰는데, 해가 뜨기도 전 이른 시간에 아주 많은 사람들이 음악회 표를 구하기 위해 줄을 서 있었다.

음악회 표 몇 장 사기 위해 그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위에서 거의 열 시간을 아둔하게 버틴 적이 있다. 처음에는 설마 하면서 기다리다 나중에는 기다린 시간이 아까워 오기로 버티기도 했다. 그 뒤 음악회에서 같이 기다렸던 사람들을 만났을 때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미련했던 것 같다. 그리고 사진을 한 장 찍어놓지 못한 것이 무엇보다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이제 러시아도 많이 변해서 이런 추억을 이제는 만들지 못하겠지….

아르바뜨 거리에는 재미있는 일들이 많다
아르바뜨 거리에는 재미있는 일들이 많다 ⓒ 유근종
모스크바를 얘기하면서 보행자들의 천국이라 할 수 있는 아르바뜨거리를 빼놓을 수 없다. 모스크바를 방문하는 관광객들의 대부분이 들르게 되는 곳이 아르바뜨거리인데 이 곳을 그냥 지나간다면 큰 실수를 하게 되는 셈이다. 물론 지금은 너무 상업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많은 사람들 속을 거닐며 물건 값을 흥정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아르바뜨거리에 있는 빅토르 최 추모벽
아르바뜨거리에 있는 빅토르 최 추모벽 ⓒ 유근종
아르바뜨거리에는 이 곳을 매개로 생계유지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 러시아에 살 당시 러시아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는데 아르바뜨에 있는 상인들도 많았다. 그 중에는 친구 바쌰가 있고 실루엣 아저씨가 있다.

바쌰는 시베리아 지방의 전통악기인 바르간(Jews harp)의 전문 연주자이면서 이 악기를 파는 상인이기도 하다. 그리고 실루엣 아저씨는 까만색 종이 한 장과 가위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우리의 옆모습을 실루엣으로 순식간에 만들어 주는데 그 어떤 사진보다 더 사실적인 작품을 만들어낸다.

가위의 마법사 실루엣 아저씨
가위의 마법사 실루엣 아저씨 ⓒ 유근종
실루엣 아저씨는 관광객들이 많은 여름이면 어김없이 계셨는데 추운 겨울이 되면 아주 드문드문 나타나셨다. 어느 날은 실루엣 아저씨께서 특별 제작한 큰 종이를 가져와서는 내가 사진 찍는 모습을 만들어 주셨는데 지금 봐도 나를 이만큼 잘 표현한 작품은 없는 것 같다. 러시아를 떠나온 지 벌써 몇 년이 지났는데 지금도 실루엣 아저씨는 지금도 그 자리에서 건강하게 일하고 계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친구 바쌰의 모자에 서린 김이 얼었다.
친구 바쌰의 모자에 서린 김이 얼었다. ⓒ 유근종
모스크바는 거대도시라 러시아의 겨울을 제대로 느끼고 싶다면 모스크바를 벗어나는 것이 좋다. 바르간 연주자인 바쌰가 쉬는 날 그의 고향마을에 간 적이 있는데 길이 미끄러워 몇 번 씩이나 넘어지기도 했다. 그 날 친구는 빵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머리에서 난 땀이 밖에 나와 하얗게 얼어붙은 장면은 지금 생각해도 재미있다.

또 모스크바에서 열차나 버스로 세 시간 정도를 가면 톨스토이의 영지가 있는 야스나야 빨랴나를 갈 수 있다. 하루 동안 시간 내서 박물관도 둘러보고 영지를 둘러보았다.

톨스토이의 영지에 있는 아주 소박한 묘비조차 없는 묘지
톨스토이의 영지에 있는 아주 소박한 묘비조차 없는 묘지 ⓒ 유근종
춥지 않은 계절도 좋지만 한겨울에 가면 다녀가는 이 별로 없으니 호젓한 숲길을 혼자 걷는 것도 좋았다. 숲길을 산책하다 보면 만나는 톨스토이의 묘지는 여름과는 대조적이었다. 묘지는 그의 유언대로 아주 소박하게 누워 있다. 다른 러시아의 대문호들은 큰 공동묘지에 화려한 옷을 입고 있지만 나는 자신의 영지에 편안히 누워 있는 톨스토이의 묘지가 마음에 든다.

이 외에도 러시아의 겨울 추억 중 기억에 남는 것 하나를 들자면 러시아 제 2의 도시인 쌍뜨 뻬쩨르부르크에서의 추억이다. 한국에서 온 관광객 두 분과 같이 네바강의 긴 다리를 건너는데 눈보라가 치는 날임에도 불구하고 얼음을 깨고 냉수욕을 즐기는 사람이 보였다. 두꺼운 외투를 입고 밖에 서 있기만 해도 추운데 맨몸으로 차가운 강물에 몸을 담근다는 것은 상상이 가지 않을 테지만 러시아에서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

이제 우리나라는 입춘이 막 지났다. 주위를 둘러보면 여기저기서 봄꽃들이 꽃망울을 터뜨릴 준비를 하고 있지만 아직 러시아는 한겨울이다. 심지어 러시아에선 5월에도 눈이 오는 경우도 있으니….

앞으로 바람이 있다면 부산에서 열차타고 북한을 거쳐 겨울시베리아를 횡단하고 싶다. 꽁꽁 언 바이칼 호수에 서서 소리도 한 번 질러보고 싶다. 그리고는 모스크바에 도착해 다시 체코나 폴란드, 핀란드로 떠나는 꿈을 꿔본다.

덧붙이는 글 | 러시아로 가는 비행기편은 많다. 국내 항공사는 물론 러시아 국영항공사를 비롯해서 조금 저렴한 다른 항공사를 이용할 수도 있다.

러시아 겨울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침대칸(꾸뻬) 열차여행과 작은 음악회를 찾아가는 것이다.

필자는 러시아에서 1년 여 머무는 동안 총 100달러 정도의 비용으로 50여회의 음악회를 다녀왔다. 러시아에선 작지만 훌륭한 음악회들이 곳곳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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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경상대학교 러시아학과에 입학했고,지난 1998년과 1999년 여름 러시아를 다녀와서 2000년 졸업 뒤 사진전 "러시아 1999"를 열었으며 2000년 7월부터 2001년 추석전까지 러시아에 머물다 왔습니다. 1년간 머무르면서 50여회의 음악회를 다녀왔으며 주 관심분야는 음악과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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