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승 시인은 1950년 대구에서 태어나 경희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197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석굴암을 오르는 영희>가 당선되면서 문단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 <첨성대>가 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慰靈祭>가 당선되기도 했다.
그가 펴낸 시집으로는 첫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창비·1979)를 비롯, <서울의 예수> <새벽편지> <별들은 따뜻하다>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 <이 짧은 시간 동안>이 있고 시선집 <내가 사랑하는 사람>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 산문집 <정호승의 위안>, 어른을 위한 동화집 <항아리> <연인>등을 상재한 바 있다.
제3회 소월시문학상, 제10회 동서문학상, 제12회 정지용문학상, 제11회 편운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시선집 <이 시를 가슴에 품는다>에는 정호승 시인이 직접 가려 뽑은 한국 현대서정시 77편과 함께 시 해설이 덧붙여져 있다. 시선집 맨 첫 머리에는 서정춘 시인의 '당신'이라는 작품이, 맨 끝머리에는 정호승 시인의 자작시 '소년부처'가 놓여져 있다.
그 사이 문인수, 이근배, 박형준, 황지우, 문태준, 곽재구, 이문재, 김남조, 문정희, 송수권, 김용택, 정일근, 이시영, 복효근, 도종환, 천양희, 신경림, 정진규, 이정록, 나희덕, 정희성, 안도현, 김명인, 김사인, 장석남 등 현재 우리 한국 시단을 대표하는 현역 서정시인들의 빛나는 작품들이 배치되어 있다.
이들 가운데 이미 고인(故人)이 된 시인은 천상병, 이성선, 임영조 세 분 뿐이다. 그러나 이들 역시 정호승 시인이 평소 교류와 친분이 있던 시인들이다.
한국 시단의 빛나는 서정시와 정호승 시인의 아름다운 설명을 일부분 옮겨본다. 먼저 시단의 조로(早老) 현상과는 역방향으로 갈수록 절창의 노래를 자꾸 부르고 있는 대구 문인수 시인의 작품이다.
바다책, 다시 채석강
민박집 바람벽에 기대앉아 잠 오지 않는다.
밤바다 파도 소리가 자꾸 등 떠밀기 때문이다.
무너진 힘으로 이는 파도 소리는
넘겨도 넘겨도 다음 페이지가 나오지 않는다.
아 너라는 책,
깜깜한 갈기의 이 무진장한 그리움.
(누군가 그리워 잠 못 이루는 밤, 파도소리는 그리움을 더 재촉할 뿐이다. 나는 가슴에 품고 있던 '너라는 책' 한 권을 펼쳐 놓고 읽는다. 그리움의 책장을 넘겨도 정지되지 않는 페이지! 아무리 넘겨도 그리움 때문에 책장은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지 않는다. 눈물만 무진장 글썽여질 뿐이다. 바다가 보이는 민박집 바람벽에 기대어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풍경이 어쩜 이토록 생생하고 가슴 저릴 수 있을까.)
몇 해 전, 시인과 비평가들로부터 가장 올해의 가장 좋은 시로 선정된 남도가락의 구수한 노래를 해왔던 송수권 시인의 작품이다.
아내의 맨발 3
-갑골문
뜨거운 모래밭 구덩을 뒷발로 파며
몇 개의 알을 낳아 다시모래로 덮은 후
바다로 내려가다 죽은 거북을 본 일이 있다.
몸체는 뒤집히고 짧은 앞 발바닥은 꺾여
뒷다리의 두 발바닥이 하늘을 향해 누워 있었다.
유난히 긴 두 발바닥이 슬퍼보였다
언제 깨어날지도 모르는 마취실을 향해
한밤중 병실마다 불꺼진 사막을 지나
침대차는 굴러간다
얼굴엔 하얀 마스크를 쓰고 두 눈은 감긴 채
시트 밖으로 흘러나온 맨발
아내의 발바닥에도 그때 본 갑골문자들이
수두룩하였다.
(수술대에 누어 수술실로 들어가는 아내 뒤를 남편이 따르고 있다. 그러다가 문득 아내의 맨발을 본다. 틈틈이 갈라진 발뒤꿈치를 본다. 갑골문자다. 남편만이 소리 내어 읽을 수 있고, 남편만이 먹을 갈아 일필휘지할 수 있는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희생의 문자다. 아내의 맨발 없이 남편이 어떻게 시인의 길을 걸어왔겠는가. 남편은 사막을 건너듯 수술실로 건너가는 아내의 맨발에 낙타처럼 엎드려 가슴으로 운다. 신이 무심치 않을 것이다.)
나는 <이 시를 가슴에 품는다>를 통해 정호승 시인이 펼쳐놓은 서정시를 가슴에 품고 꽃 피는 삼월까지 잘 건너갈 것 같다. 시인 정호승은 "이 시집 속에는 시인들 스스로 위로받고 위안하는 시들이 별밤처럼 빛나고 있습니다. 고통스러운 우리의 삶을 세세하게 드러내 눈물이 반짝이기도 하고 그 눈물을 극복한 건강한 웃음소리가 들려오기도 합니다. 이 시들을 통해 때로는 견딜 수 없는 고단한 삶 위로받으시고 평화스러우시길 바랍니다."라는 말을 건네고 있다.
또 "시의 본문을 한 번은 눈으로 읽고 한 번은 소리내어 읽고 또 한 번은 엮은이의 지혜 가득한 해설과 더불어 읽다보면 어렵게 생각되던 시들과도 금방 사랑에 빠져 눈이 밝아지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는 이해인 수녀의 말에도 나는 전적으로 동감한다.
그렇다. 시(詩)는 내 눈과 마음을 바꾸게 하고 끝내 내 전부를 변화시키는 힘을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