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1월 21일(음력 1918년 12월 20일) 추운 겨울 새벽,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1907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퇴위 당한 조선의 황제 고종이 덕수궁 함녕전에서 67세로 승하했다. 12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조선의 멸망 과정에 서 있던 비운의 황제 고종(1852~1919)의 죽음은 일제에 의한 독살 의혹을 남겼다.
고종이 죽던 1919년은, 태조 이성계가 1392년 조선을 건국해 519년이라는 길고 긴 세월 동안 이어오다 1910년 경술국치로 멸망한 지 10년, 왕위에 오른 지 44년이 되던 해였다.
조선의 마지막 왕이자 대한제국의 첫 황제였던 고종이 임종하던 순간 눈에 스쳐갔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개화기 조선을 둘러싼 열강들의 다툼 속에 결국 일본에게 국권을 피탈 당하고 말았던 현실에 죽는 순간까지 피를 토하는 울분을 가라앉히지 못했을 것이다.
비운의 황제 고종이 승하하자 아직 그가 조선의 황제였던 것을 의심치 않았던 백성들은 나라를 빼앗은 일제에 분노했고 3·1운동의 횃불이 전국에서 불타오른다.
유해 없이 치른 왕비 국장
홍릉(洪陵)은 명성황후(1851-1895)의 능호이지 고종의 능호가 아니다. 1895년 8월 20일 명성황후는 일제에 의해 살해당했다. 이토 히로부미와 전임공사 미우라 등 일제가 계획한 왕비 시해 사건에 시신조차 불에 태워진 채 유해도 없던 명성황후는 2년간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했다.
명성황후가 러시아와 손잡고 친러 내각을 구성하며 친일파를 숙청하고 일본의 입지를 약화시키자 다급해진 일제의 만행이었다. 천인공노할 이 만행을 저지른 미우라는 8월 22일 고종을 협박하여 "그간 중전 민씨가 국정을 어지럽히고 종묘사직 위기에 처하게 했다. 변란이 일어나자 중전은 지난 번 임오군란 때처럼 달아나 종적을 감추었으니 중전의 자격을 박탈하고 서민으로 쫓아낸다"는 교지를 발표하게 했다.
서인으로 폐한 지 불과 하루 만에 다시 빈호(嬪號)를 특별히 내렸다가 10월 10일 왕후로 복위시킨 뒤 10월 15일에서야 명성왕후가 승하했음을 발표했다. 유해조차 없는 왕비 국상이 죽은 지 2개월이나 지난 뒤에 겨우 반포되는 기가 막힌 일이 벌어진 것이다.
왕후가 입던 옷을 유해 삼아 겹이불과 겹옷을 입히는 소렴과 대렴이 끝난 뒤, 주인 없는 빈 관만으로 동구릉 숭릉(현종의 능) 옆에 묻었다. 이때 고종은 숙릉(肅陵)이란 능호를 내렸고 이곳이 지난해 발견된 명성왕후 첫 능인 숙릉 조성지이다.
아관파천 이후 러시아 공관에서 돌아온 고종은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의 황제로 즉위하며 명성왕후를 명성황후로 추존한다. 그리고 11월 21일 명성황후의 장례식을 성대하게 다시 치르고 청량리동에 장사 지내며 능호를 홍릉이라 한다. 이 홍릉 영역에 현재 홍릉 수목원, 숭인원과 영휘원이 있으며 이 지역은 현재도 홍릉이라 부른다.
망국의 황제는 능호도 없다
고종의 장례는 이왕직에서 주도했고 황제의 국장비용으로 쓰라고 정한 돈이 10만원(약 13억원)이었다. 조선 초기 국장에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갔던 것까지 거론하지 않아도, 조선 후기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천장 하는데 썼던 비용이 200억원이라는 걸 생각한다면 형편없이 초라한 국장이었다.
당시 내각은 이완용, 고영희 등 친일매국 인사들로 채워져 있었고 이왕직에서 왕실 재산과 업무를 관장하고 있었다. 대한제국황실업무를 전담하던 궁내부는, 일제가 대한제국 황실을 감시하기 위해 만든 이왕직(李王職)으로 업무가 이관된다. 이 홍릉은 식민풍수들과 친일로 변절한 조영희가 정한 자리였다.
1910년 8월 29일 국권을 강탈당한 날 일본천황의 조서가 발표된다. 고종을 태왕(太王)으로 순종을 이왕(李王)으로 격하했고 이왕가(李王家)라는 명칭을 사용, 대한제국 황실을 일본 천황가의 하부단위인 왕(王)과 공(公)으로 편성해 일본 궁내성으로 소속시켜 버렸다.
이때부터 황실을 격하하려 사용된 식민용어 이씨조선(李朝)이라는 말이 아직도 남아있으니 식민문화의 잔재는 이렇게 뿌리뽑기 어려운 것인가. 이러한 일제가 고종의 능호를 허락할 리가 없었다. 고종이 능호를 쓴다는 것은 대한제국 황제의 신분을 인정하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아무리 나라를 빼앗겼어도 백성들에게 고종의 영향력은 막강했고 조선인들에겐 정신적인 지주였으며 여전히 황제였다. 고종의 국장일을 계기로 3·1운동이 일어난 것과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국장일을 맞이하여 6·10 만세운동이 일어난 것은 이와 같은 맥락이다.
고종이 승하하고 대렴이 끝나자 1월 30일 오후 4시부터 남양주시 금곡에 능을 잡고 산역을 시작했다. 그날 같은 시각, 명성황후가 묻힌 청량리 홍릉에서도 능을 파기 위한 공사가 벌어진다.
풍수지리상 불길하다는 구실을 댄 홍릉 천장은 고종의 산역과 똑같이 시작됐고 2월 12일 오전 6시에 현궁을 열었다. 2월 16일 오후 4시 명성황후는 금곡으로 이장됐다. 3월 3일 발인한 고종의 장례행렬은 금곡으로 도착했고 먼저 와 있던 명성황후와 고종은 3월 4일 합장된다.
명성황후와 합장했으니 홍릉이라는 능호를 쓰는 것을 일제로서도 막을 방법이 없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고종은 명성황후와 21년 만에 지하에서 함께 잠들었다. 나라를 빼앗긴 망국의 황제가 능호를 갖는 방법은 이밖에 없었다.
최초의 황제릉 홍릉
고종의 홍릉과 순종의 유릉이 있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의 홍유릉 경역은 대한제국 황실의 묘역이기도 하다. 37만여평의 홍유릉 경역에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의친왕, 덕혜옹주, 작년에 타계한 마지막 황손 이구 공이 잠들어 있다.
홍릉은 최초의 황제릉이기에 명나라 태조 주원장의 효릉 능설제도를 본떴으나 그야말로 어설픈 황제릉 흉내에 불과하다. 왕릉의 정자각(丁字閣) 대신 침전인 일자각(一字閣)이 있고 황제참도인 3도가 놓였다.
왕릉과는 달리 일자각 앞에 문인석과 무인석, 기린(麒麟), 코끼리, 사자, 해태, 낙타, 말의 순으로 홍살문까지 늘어서 있다. 망국의 황제릉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전통 왕릉 문·무인석과는 거리가 멀고 조악하기 그지없는 석물들은 바라보는 이에게 서글픔마저 안겨준다.
겁을 잔뜩 집어먹은 문인석과 장군의 기상은커녕 기가 빠질 대로 빠진 무인석은 터무니없이 길기만 했지 기품이나 작품성은 찾아볼 수 없다. 이왕직이 주도한 국장이라 석물에서 일본인이 만든 냄새가 풍풍 풍겨난다.
코끼리, 사자, 낙타 등 늘어선 석수(石獸)는 우주의 괴물들이 늘어선 것으로 보였고 공상우주 만화영화에 등장한다면 딱 어울릴 모습들이었다.
홍릉의 기린(麒麟)을 보고 무슨 기린이 이렇게 생겼냐고 의아해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 기린은 아프리카산 동물이 아니라 용이나 봉황 같은 상상 속의 상서로운 동물이다. 그 기린도 우주괴수처럼 생겼지만.
그동안 왕릉을 답사하면서 소위 황제릉이라는 홍유릉처럼 답사가 내키지 않았던 적은 처음이었다. 지난 11월 찾았던 홍유릉은 입구에 커다란 은행나무들이 노란잎을 화사하게 달고 있었다. 바람이 불면 황금빛 노랑나비 떼가 일제히 날갯짓하며 소낙비처럼 떨어져 내리는 아름다운 능이었지만 어딘지 우울함이 가시지 않았다.
망국의 한을 안고 있는 고종과 순종의 능이었기 때문일까. 능상에 올라가 주위를 둘러본다. 말이 황제릉이지 웬만한 왕릉 규모만도 못한 크기다. 밑을 내려다보니 조선왕릉 특유의 품위는 찾아볼 수 없고 덩치만 커다란 일자각에서 쓸쓸하다 못해 스산함까지 스며 나온다.
"이렇게 기가 우울한 능은 처음이야…."
정말 식민풍수들이 잡은 흉지라서 그럴까 아니면 내 편견일까. 홍릉을 나서자, 한줄기 서늘한 바람이 휘익 불어온다. 황금빛 나비들이 죽음을 향해 일제히 돌진하듯 땅에 떨어진 노란 은행잎들이 비명을 지르며 사정없이 나뒹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