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토요일 저녁 우리 가족은 미국에 와서 처음으로 대학 농구를 관람하기로 했다. 미국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대학인 CWM(College of William & Mary)과 JMU(James Madison University)가 맞붙는 경기였다.
마침 집에는 남편이 JMU에서 받아온 공짜표도 두 장 있어서 8달러짜리 티켓 두 장만 사면 온 식구가 농구를 구경할 수 있었다. 그러나 쉴 새 없이 내리는 눈을 보니 그만 심란한 생각이 들어 농구고 뭐고 그냥 집에 있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오늘 같은 날 경기를 할까?”
“눈이 많이 와도 실내경기니까 하겠지, 뭐.”
“아니, 경기야 할 수 있겠지만 이렇게 눈이 많이 오면 관중들이 없을 거 아냐. 그럼 무슨 재미로 경기를 보느냐고.”
관중석이 텅 빈 경기장에서 치러지는 경기라면 아무리 그 경기가 흥미진진하다 하더라도 재미가 있을 턱이 있겠는가. 관중들이 오지 않을 게 뻔한 경기라면 분명 맥빠진 경기가 될 테니 말이다.
마침 학창 시절에 배운 연극의 3대 요소가 불현듯 떠올랐다. ‘무대, 배우, 관객’. 그런데 스포츠에서도 이런 3대 요소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기장, 선수, 관중’. 중요한 이 세가지 요소 가운데 하나인 관중이 빠져버릴 것 같은 이날 경기에 대해 나는 우려를 하고 있었다.
“글쎄, 오늘 같이 관중이 오기 어려운 날에는 시합이 취소되지 않을까?”
눈이 많이 올 것으로 예상되는 이곳 동부 지역에는 이미 많은 교회들이 일요일 예배를 취소했다(우리나라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예배가 취소된다고 하는 것은). 그리고 워싱턴의 초, 중, 고등학교 역시 일기예보에 따라 월요일 수업이 취소되었다고 한다. 그랬던 터라 농구 경기도 취소될 줄 알았다. 그런데 이런 정도의 눈이라면 경기를 할 거라는 이야기에 우리는 농구장으로 향했다.
농구장으로 가는 도중에도 눈은 쉬지 않고 계속 내렸다. 자동차 윈도우 브러시가 바쁘게 눈꽃을 쓸어냈다. 미끄러운 눈길을 밟으면서 우리는 느릿느릿 거북이 걸음으로 농구장으로 갔다. 그런데 연신 들어오는 자동차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관중들이 많지 않을 거라는 내 예측이 완전히 빗나갔기 때문이었다.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꽤 많은 사람들이 가족 단위로 이곳을 찾고 있었다. 대학농구라고 해서 시시하게 생각했던 나는 홈경기를 펼치는 만큼 기껏해야 JMU 학생이나 이 대학과 관계 있는 사람만이 올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대학생만이 아니었다. 다정한 연인과 어린 아이를 데리고 온 젊은 부부, 머리가 희끗한 중, 장년 그리고 노년에 이르기까지 관중들은 아주 다양했다.
그들은, 우리가 'Be the Reds'라는 붉은 티셔츠를 입고 국가대표 축구팀을 응원하듯, 이곳 홈팀인 JMU 상징색인 보라색과 노란색 모자, 가발, 티셔츠 등을 입고 열심히 JMU를 응원했다. 때로는 일어서기도 하고, 때로는 고함치기도 하고, 때로는 손벽을 치고 발을 구르기도 하면서 열렬히 JMU를 응원했다.
‘으이그, 징한 사람들. 이런 궂은 날씨에 그냥 집에서 편히 쉬면서 TV나 보지 뭐, 먹고 살 일 있다고 농구장까지 오나. 그것도 흥미로운 NBA 농구도 아니고 일개 지역의 대학농구일 뿐인데.’
비웃듯 이런 생각을 했지만 솔직히 부러운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이런 진득한 열혈 팬이 있기에 농구가 오늘날 미국의 인기 스포츠로 자리잡고, 모판이 되는 대학 농구가 발전하여 세계적인 수준의 NBA 농구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문득 우리나라에서 가장 사랑받고 있다는 축구의 관중석을 머리에 떠올려 보았다.
사실 2002 한일 월드컵 경기가 끝난 뒤 우리나라 축구계는 활기가 넘쳐났다. ‘월드컵 4강’이라는 거창한 산술적인 말과 ‘신화’라는 이글거리는 말이 '월드컵 4강 신화’라는 눈부신 표현을 만들어냈고 이 표현이 온 국민들을 흥분시켰기 때문이었다.
월드컵이 끝난 ‘직후’ 우리나라 프로축구인 K리그에는 축구를 사랑한다는 관중들이 많이 몰려들었다. 가족 동반 관람객과 서포터스들도 많이 늘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 뜨거운 열기가 얼마나 오래 가던가.
이제 우리나라는 다시 <2006 독일 월드컵>으로 시끄럽다. ‘시끄럽다’는 부정적인 표현이 좀 거슬리더라도 할 수 없다. 우리가 아침마다 실시간으로 보고 있는 저녁 9시 스포츠 뉴스를 보면 축구 이야기가 안 나온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하긴 당장 몇 개월 남지 않았기 때문에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건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냄비근성으로 쉬 식어버렸던 과거 우리나라 축구장의 열기를 떠올리면 이런 생각이 든다. 결국 경기력의 수준은 관중들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이라고.
별 볼일 없을 것 같은 대학농구에도 자기가 응원하는 팀을 위해 복장으로 성의를 보이고, 궂은 날씨를 탓하지 않고 경기장을 찾고, 자기가 응원한 팀이 져도 박수로 격려해 주는 이런 진성 남녀노소 팬들을 보면 부러운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 축구도 앞으로 건강하게 발전하려면 이런 뚝배기 같이 은은한 골수팬들이 많아져야 할 거라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