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없이 복잡했던 한 인간의 초상(肖像)
한 사람의 일생을 평가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가 현대적 의미의 대한민국을 사실상 주조(鑄造)한 대통령일 뿐 아니라 아직까지도 그의 영향력이 지속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그가 통치했던 18년 동안 대한민국은 세계사적으로도 유례가 없을 정도의 고속경제성장을 구가했다. 반면에 정당정치와 민주주의는 교과서 속에나 존재했다. 그에 대한 평가가 상반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렇다. 위에서 말한 '그'는 바로 박정희다.
식민지 조선의 가난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교사와 관동군 장교를 거쳐 대한민국의 군인이 되고 남로당의 군책으로 활동하다 극적으로 목숨을 건진 박정희의 인생역정은 마치 질곡으로 점철됐던 한국현대사의 속살을 보는 듯한 착각마저 들게 한다.
유년시절부터 30대 중반의 시기에 박정희가 경험했던 여러 사건은 그의 정신과 심성에 아로새겨져 그가 대통령이 된 후 대한민국의 진로를 결정하는데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체험과 당시 대한민국이 처한 상황-최빈국 수준의 경제여건, 미국과의 종속관계, 북한과의 대결국면 등-이 어우러지면서 박정희는 민족주의적 색채가 짙은 근대화론자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의 치세를 대표하는 단어를 두 마디로 표현하면 '고도 경제성장'과 '민주주의의 후퇴'가 될 터이고 이는 그의 친일과 군사 쿠데타라는 휘발성 강한 쟁점들과 맞물려 그에 대한 평가를 한층 어렵게 만들고 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한국현대사에서 박정희만큼 극단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인물도 달리 없을 성싶다. 한편에서 그는 절대빈곤에 허덕이던 대한민국을 근대화시킨 탁월한 지도자로 묘사되는가 하면 반대편에서는 군사쿠데타로 헌정을 유린하고 장기집권을 통해 민주주의를 질식시킨 잔인한 독재자로 폄하되곤 한다.
또 아주 많은 사람이 그를 청렴했던 '선의의 독재자'로 기억하고 있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은 그에게서 말년의 황음(荒淫)을 떠올린다.
그러나 박정희라는 인물 안에는 위에서 평가한 요소들이 사이좋게 머물고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 공정할 것이다.
한편 박정희 평가와 관련해서 특기할만한 점은, 박정희 지지자들이 그의 재임시절에 이룩한 경제성장에 후한 점수를 주는 반면 박정희 반대자들은 그의 정치적 잘못-특히 유신(維新)-에 대해 가차없는 비판을 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박정희의 공(功)은 경제성장과 조국 근대화이고, 과(過)는 유신이라는 도식이 보편타당한 것일까? 호주국립대 교수인 김형아(정치, 사회 변동학) 교수가 쓴 <유신과 중화학 공업- 박정희의 양날의 선택>은 이러한 상식에 도전하고 있다.
근대화주의자 박정희, 부국강병을 꾀하다
김형아 교수는 이 책에서 박정희를 부국강병을 꿈꾼 근대화주의자로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박정희의 근대화주의의 배경에는 민족주의가 작동하고 있었다고 이해한다.
박정희가 민족주의적 근대화주의자로 자리매김한 데에는 이미 위에서 살핀 것처럼 박정희 자신이 경험했던 사건들과 대한민국이 봉착했던 상황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는 것이 김 교수의 짐작이다.
쿠데타를 통해 집권에 성공한 직후부터 박정희의 머릿속을 지배했던 것은 온통 공업화를 통한 경제개발이었다. 이는 62년부터 시작되어 비약적인 성과를 거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나타나며 그 구체적인 방법은 64년부터 본격화된'수출'이었다.
급속한 경제발전을 위해 박정희는 대한민국을 전시하의 총동원체제로 편성하고 자신이 그 체제의 정점에 선다. 경제발전을 위해 박정희는 사용 가능한 모든 대내외 역량을 동원했다.
자본과 금융에 대한 철저한 통제, 산업·무역·기술 정책·재벌을 중핵으로 하는 경제성장,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 월남파병, 냉전 국면을 이용한 미국의 수혜 등은 박정희가 급속한 경제개발을 위해 선택한 목록이다.
물론 이 시기 민주주의의 진전은 고통스러울 만큼 더뎠다.
중화학공업화의 필요충분조건 유신(?)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만약 박정희가 가까스로 승리했던 71년 선거에 출마하지 않고 초야에 묻혔다면 그에 대한 평가와 대한민국의 운명은 어찌되었을까? 분명한 것은 그에 대한 평가도, 대한민국의 운명도 지금과는 자못 다른 것이 되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71년 선거에서 승리한 이후 박정희는 의식과 토대의 양 측면에서 대한민국의 개조(?)를 추구했다. 의식개조는 새마을 운동을 통해, 토대개조는 중화학 공업화를 통해 이루고자 했다.
박정희가 국가개조프로젝트라고 불러도 좋을 수준의 변화를 추진한 배경에는 한 단계 높은 수준으로의 경제성장과 자주국방에 대한 의지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특히 북한의 침략으로부터 미국의 보호막이 걷힐지도 모른다는 박정희의 두려움은 자주국방의 하나로 중화학 공업화를 강력히 추진하게 하였다. 물론 그 자신의 권력욕도 짙게 배어있었다.
대한민국의 경제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려 했던 중화학공업화는 73년 1월 공식화되었는데 이 중화학공업화는 박정희를 필두로 한국은행 출신의 김정렴 비서실장, 자동차회사 공장장을 지낸 오원철 경제수석비서관으로 구성된 이른바 '중화학공업화의 3두 체제'에 의해 추진되었다.
특기할 점은 박정희가 중화학 공업화를 추진하면서 경제기획원 관료들이 아니라 상공부의 기술관료들에게 의존했다는 사실이다. 이런 역사적 사실에다 시장에 대한 정부의 우위와 적극적 간섭 등을 고려해 보면 결국 박정희식 경제모델은 자유방임보다는 세계시장을 염두에 둔 계획경제에 가까웠다고 평가해도 큰 무리는 없을 성싶다.
한편 중화학 공업화에 대한 세부 계획을 세우는 것과 동시에 유신헌법에 대한 기초작업이 진행되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이는 박정희가 유신체제로 상징되는 폭압적 정치체제 아래서만 중화학공업화라는 대역사가 가능했다고 사고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실마리기 때문이다. 또 이는 당시 적지 않은 엘리트들의 생각이기도 했다.
'유신'과 '중화학 공업화'가 양날의 선택과도 같았다는 이러한 인식은 중화학 공업화 추진의 핵심실세였던 오원철의 다음과 같은 증언에서도 확인된다.
"요사이 많은 사람이 박 대통령은 경제에는 성공했지만 민주주의에서는 실패했다고들 말한다. 심지어는 박 대통령 아래서 장관을 지냈던 이들조차 공개적으로 중화학공업화와 유신 개혁을 별개의 문제처럼 이야기한다. 나는 이렇게 말한다. 중화학공업화가 유신이고 유신이 중화학공업화라는 것이 쓰라린 진실이라고. 하나 없이는 다른 하나도 존재할 수 없었다. 한국이 중화학공업화에 성공한 것은 박 대통령이 중화학공업화가 계획한 대로 정확하게 시행되도록 국가를 훈련했기 때문이다. 유신이 없었다면 대통령은 그런 식으로 국가를 훈련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런 사실을 무시하는 것은 비양심적이다."(1996년 10월, 2000년 1월 오원철 인터뷰), (본문 294P)
독재와 경제발전과는 선택적 친화성이 있다는 학자들의 주장도 있지만, 유신이 중화학 공업화의 필요충분조건이었는지는 여전히 확실치 않다. 그러나 박정희식 경제모델 하에서 대한민국의 경제가 기적적으로 성장한 것만은 분명하다.
아래의 인용문은 이를 잘 보여준다.
"한국의 국민총생산은 20년간(1962~1980) 127억 달러에서 574억 달러로(1980년 기준) 452퍼센트 성장했고, 수출액은 1964년 1억 달러에서 1978년 100억 달러로 늘었다. 이 시기 동안 한국은 해마다 평균 8.5퍼센트의 국민 총생산 성장률을 기록하여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Johnson 1987 : 136 ; Amsden 1989 : 56) 정부가 공업화를 촉진하기 위해 하부구조를 건설함으로써 사회적 설비 역시 놀라울 정도로 개선되었다. 예를 들면 전기발전량은 1961년에서 1971년 사이 10배로 늘었고 전화 대수는 1965년에서 1975년 사이 437,915대에서 2,292,286대로 다섯 배가 늘어 100명에 6대 수준이 되었다(우승무 1995 : 462)
… 교육제도와 고용 기회의 광범위한 확대를 통한 공공복리 증진에서도 한 걸음 나아갔는데, 많은 이들이 이를 한국 공업화의 핵심 특징으로 꼽는다. 예컨대 중학교 입학자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급속하게 늘어나 1980년대에 와서는 250만 명에 달했다. 고등학교 입학자는 1970년대 동안 59만 명에서 270만 명으로 껑충 뛰었다(Snodgrass 1998 : 172).
제1차 경제개발계획(1962~1963)의 절대 필요한 분야로 가족계획을 포함한 상대적으로 광범위한 의료제도의 확립은 한국인의 기대 수명을 1960년의 55.3세에서 1978~1979년 65.9세로 극적으로 연장하는 데 이바지했다(김태헌 1995 : 533)" (본문 351P)
그럼에도 남는 의문들
경제발전에 따른 국민의 민주화에 대한 점증적 요구에 더해 핵무기 개발로 상징되는 자주국방 노선으로 인한 미국과의 심각한 갈등은 결국 박정희 체제의 몰락을 가져왔다.
그의 통치기간 동안 한국인들은 정치적으로는 더 부자유스러워졌고 경제적으로는 더 부유해졌다. 중화학 공업화를 추진하기 위해 유신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는가? 김형아 교수는 '그렇다'라고 대답하는 듯하다.
유신체제를 못 견뎌 이 땅을 떠난 김 교수가 국내외 미공개 문서와 광범위한 인터뷰를 기초로 집필한 이 책은 그래서 더 많은 믿음이 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다음과 같은 의문점들은 여전히 남는다.
첫째, 당시 중화학공업화가 옳은 경제발전 전략이었느냐는 점이다. 과잉중복 투자라는 비판을 전적으로 수긍할 수는 없지만 중화학공업화가 옳은 경제발전 전략이었는지에 대한 객관적 평가는 필요할 것이다.
둘째, 설령 당시 중화학공업화가 옳은 경제발전 전략이었다고 해도 재벌을 중심으로 이를 추진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분석하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셋째, 유신이라는 폭압적이고 전제적인 통치체제가 아니고서는 중화학 공업화를 추진할 수 없었는가 하는 점이다. 중화학공업화를 성공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박정희가 국민을 상대로 동의나 설득을 구하려고 진지하게 노력할 수는 없었던 걸까?
박정희가 사망한 지 30년이 가까워져 오는 지금 박정희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반드시 필요한 이유는 박정희가 남긴 구조적, 정신적 유산이 아직까지도 한국사회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와 현실 정치의 셈법을 벗어나 박정희의 공(功)과 과(過)를 엄밀히 평가하고 박정희식 발전모델을 비판적으로 극복하는 일은 더는 미룰 수 없는 과제다.
덧붙이는 글 | 기자는 토지정의시민연대(www.landjustice.or.kr)에서 정책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대자보와 뉴스앤조이에도 기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