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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6월 13일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한 김대중 대통령과 직접 영접나온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밝은 표정으로 악수를 하고 있다.
2000년 6월 13일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한 김대중 대통령과 직접 영접나온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밝은 표정으로 악수를 하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한국 정치에서는 선거 때만 되면 등장하는 달갑지 않은 '단골 손님'이 있다. '선거에서의 북한 변수'를 지칭하는 북풍(北風)과 이를 둘러싼 시비가 그것이다.

이번에도 5·31 지방자치 선거를 앞두고 정치권에서는 어김없이 '북풍을 이용한 정치공작' 시비가 벌어지고 있다. "4월 하순께 철도를 이용해 방북하고 싶다"는 뜻을 정부를 통해서 북측에 전달한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방북계획을 둘러싼 시비다.

현재 김대중 전 대통령 측은 "북측의 회신을 기다리는 단계"라며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다. 그러나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거듭된 초청에 대한 화답의 성격으로 시작된 방북계획인 만큼 북측의 사정으로 방북이 무산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김 전 대통령 측에서 우려하는 것은 한나라당과 일부 보수언론에서 주장하는 정치공세로 인해 방북을 앞두고 '남남갈등'이 발생하는 것이다. 물론 한나라당 내에도 고진화·정형근 의원처럼 김 전 대통령의 방북을 지지하는 의원들도 있지만, 주류는 '시기' 문제를 들어 반대하는 입장이다.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김 전 대통령을 직접 겨냥하지는 않았지만 13일 최고위원 회의에서 "김 전 대통령 방북이 선거에 맞춰 이뤄지는 것은 의심을 살 수 있는 문제"라며 "정부는 국민에게 의심받을 짓을 하면 안 된다"고 밝혔다. 이규택 최고위원은 영화 <왕의 남자>을 빗대 김 전 대통령의 방북을 "지방선거 승리를 위한 '광대놀이'"라고 비판했다.

한나라당의 DJ 방북 반대는 일종의 '면역 예방주사'이거나 '김빼기' 작전

그러나 한나라당의 공세와 달리, 정치권에서는 김 전 대통령의 방북이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에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라고 보는 시각은 많지 않다.

한나라당의 반발도 김 전 대통령의 방북 자체를 반대한다기보다는 혹시나 있을 지 모르는 방북 성과가 지방선거에 이용될 가능성을 미리 차단하고, 이를 국민들에게 알려 효과를 반감시키려는 것으로 보인다. 일종의 '면역 예방주사'이거나 '김빼기' 작전인 셈이다.

더구나 선거를 앞두고 발생한 북한 변수가 그 변수를 인위적으로 주도하거나 자연발생적으로 변수의 '주최 측'이 된 쪽에 유리하게만 작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지난 북풍의 역사가 경험칙으로 증명한다.

우선 '북풍'이라는 용어의 개념을 명확히 규정할 필요가 있다. 북풍은 남북간의 긴장을 강화하는 쪽으로 부는 '한풍'과 긴장을 누그러뜨리는 쪽으로 부는 '온풍'으로 나뉜다. 대개 한풍은 북에서 남으로 불었지만, 온풍은 남에서 북으로 불었다. 그래서 온풍은 북풍 아닌 '남풍'이라고 부를 수 있다.

예를 들어 96년 총선 전 북한군의 판문점 난입 사건과 97년 대선 전 판문점 총격 유도 미수 사건은 전형적인 '한풍'이다. 반면 지난 95년 처음 시행된 지방자치단체 선거를 앞두고 당시 김영삼(YS) 정부가 국무총리까지 내세워 대대적으로 북한에 쌀을 보내는 행사를 개최한 것이 '온풍'이다. 또 한나라당이 지난 2002년 대선 전에 평양에 대북 밀사를 파견해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DJ 정부 때보다 더 적극적으로 통이 큰 대북 지원을 할 것'을 제의한 것도 일종의 '온풍'이다.

이렇듯 북풍이라는 용어는, 지난 96년 4·11 15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언론 매체를 통해 널리 유포된 조어다. 언론은 총선 바로 며칠 전에 판문점에서 전개된 북한군의 느닷없는 무력 시위를 계기로 북풍이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했다. 그런 점에서 4·11 총선 전 북한군 무력시위는 북풍의 원조인 셈이다(그러나 북풍이라는 용어를 처음 쓴 '진 짜원조'는 46년 북한 정권 수립 및 토지개혁 시행 당시의 김일성이다).

당시 언론은 선거를 코앞에 두고 터진 이 이상한 사건을 처음에는 '북한 돌발변수'(한국일보 96. 4. 7) 'DMZ 바람'(한겨레 96. 4. 8) 등으로 부르다가 어느 시점부터는 북풍으로 '통일'해 부르기 시작했다. 북풍이라는 용어가 갖는 간결성과 상징성 때문이었다.

이재오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지난 10일 주요당직자회의에서 "선거를 앞두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방북하면 그 성과로 정국의 반전을 꾀하게 될 것"이라고 경계했다.
이재오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지난 10일 주요당직자회의에서 "선거를 앞두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방북하면 그 성과로 정국의 반전을 꾀하게 될 것"이라고 경계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북풍의 원조는 96년 4·11 총선 전 판문점 북한군 무력시위

물론 4·11 총선 이전에도 역대 선거 때마다 국민들의 안보 불안 심리를 야기시키는 '북한 변수'에 의한 선거 개입 의혹이 있었다. 87년 대선 직전에 발생한 KAL기 폭발 사건 폭파범 김현희의 압송 입국, 92년 대선 전에 안기부가 발표한 거물 간첩 이선실 및 남한조선노동당 사건 등이 대표적 사례이다. 그리고 두 사건은 각각 당시 여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김영삼의 당선에 기여했다는 것이 여론조사 및 선거 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였다.

남측에 대한 '안보위협'을 통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의도를 띤 북풍과 달리, 주로 북측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통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의도를 띤 남풍도 있었다. 지난 95년 6·27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를 앞두고 YS 정부가 대북 쌀 지원을 결행한 것이 그 예이다. 또 지난 2000년 4·13 총선을 앞두고 남북한 당국이 6월 정상회담 합의 사실을 공표한 것도 '남풍'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그 의도가 무엇이건 YS 정부의 대북 쌀 지원은 차가운 북풍에 대비하자면 훈훈한 기운이 도는 일종의 남풍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역대 선거에서 처음으로 시도된 남풍이 오히려 역효과를 낳았을 뿐이라는 점이다.

물론 당시 여론조사에서도 나타났지만 국민들이 인도주의 차원의 대북 지원 자체를 반대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민간 차원의 지원조차 엄금했던 정부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정부 차원의 대북 지원을 결정하고, 그것도 선거 바로 전날 국무총리의 환송 하에 쌀 수송선을 출항시키는 등 남북관계를 선거에 이용하는 '얕은 수'에 국민들이 등을 돌린 것이었다.

어쨌건 남풍이 선거에 효과가 없다거나 혹은 자칫 역효과를 가져올 뿐이라는 경험은 남북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는 데 일정 부분 부정적인 제약 요인으로 작용한 측면이 있다. 그런 점에서 96년 총선 직전의 북풍은 95년 남풍의 반작용 성격을 띤다.

96년 4·11 총선은 남풍의 역효과를 경험한 지 1년이 채 지나지 않은 뒤에 치러졌다. 당시 언론과 여론조사기관은 신한국당의 참패를 예상했다. 그런 가운데 장학로 청와대 부속실장의 비리사건이라는 악재가 터졌으니 결과는 뻔해 보였다. 그런데 난데없이 판문점에서 북한군 무력시위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그러니 의혹의 눈길이 쏠린 것은 당연했다. 더구나 무력 시위 직전에 진로그룹의 고문이 비밀리에 방북한 사실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YS 정부가 모종의 대북 지원을 약속한 대가로 북한 측이 무력시위라는 '쇼'를 연출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북한 변수, 특히 남한 선거에 영향을 주는 북한과 직·간접으로 관련된 사건을 지칭하는 용어로서의 북풍은 바로 그러한 정황에서 탄생한 것이다. 당시 '장풍-북풍에 울고웃은 여야'니 '북풍이 장풍을 눌렀다'는 보도는 그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황풍, 오풍, 총풍 등 각종 북풍의 변종들

그 뒤로 선거에 영향을 주는 모든 북한 변수는 언론에서 간단히 '풍'이라는 단어로 개념이 규정되었다.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의 망명(97. 2)이 남북관계에 미칠 파문은 '황풍',국민회의 고문이었던 오익제 전 천도교 교령의 월북(97. 8)으로 인한 파장은 '오풍'으로 압축되었다. 그리고 마침내는 97년 대선 직전에 이회창 후보 특보 명함을 가진 한성기씨 등이 북한측 인사에게 판문점에서의 총격을 요청한 '총풍'까지 등장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보았듯이, 남북한의 긴장을 누그러뜨리는 쪽으로 작용하는 북풍(온풍)은 그것이 인위적이건 자연발생적이건 모두 '주최 측'에 불리하게 작용했다. 95년 지방자치 선거 직전의 대북 쌀지원이 그랬고, 2000년 4·13 총선 직전의 6월 남북 정상회담 개최 합의사실 발표가 그랬다.

남북한은 그해 3월부터 박지원·송호경 특사간 접촉을 통해 세 차례 비밀협상을 진행한 끝에 4월 8일 베이징에서 합의서에 서명함에 따라 4월 10일 정상회담 개최 합의사실을 양측 당국이 공동 발표했다. 총선 사흘 전이었다. 결과는 여당의 총선 패배로 끝났다.

당시에도 야당은 남북 정상회담의 정치적 이용을 경계했다. 정부와 여당(새천년 민주당)은 남북 정상회담 합의 발표는 '총선용'이 아니고 4월 8일 합의를 했기에 10일 발표한 것뿐이라고 해명했다. 아무튼 민주당은 전통적으로 우위를 점해온 수도권에서마저 야당에 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풍의 원조 격인 96년 4월 북한군의 판문점 무력시위(이하 '4월 북풍')는 남북한 관계를 개념 규정하는 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했다.

우선 '4월 북풍'은 남북한의 '적대적 의존관계' 혹은 '적대적 공존관계'를 설명하는 키워드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특히 ▲87년 칼풍(KAL 폭파) ▲92년 노풍(조선노동당) ▲97년 황풍(황장엽 망명)·오풍(오익제 월북 및 편지)·북풍(안기부 대선공작)·총풍(판문점 총격요청 기도) 등 역대 선거 때에 등장한 모든 북풍은 그 진상이 밝혀졌는데 공교롭게도 96년 '4월 북풍'만큼은 진상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지난해 8월 16일 오후 8.15 민족대축전 북측 김기남 단장을 비롯한 대표단 일행이 폐렴 증세로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에 입원 중인 김대중 전 대통령을 문병해 방북을 재차 권했다.
지난해 8월 16일 오후 8.15 민족대축전 북측 김기남 단장을 비롯한 대표단 일행이 폐렴 증세로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에 입원 중인 김대중 전 대통령을 문병해 방북을 재차 권했다. ⓒ 사진공동취재단
남북한의 '적대적 의존관계'와 북풍의 '학습효과'

아울러 4월 북풍은 남북한 쌍방의 뒷거래에 의한 '인공풍'이 아닌 '자연풍'이라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선거에 큰 영향을 주었고, 대중 매체가 그 결과를 분석하고 일반 국민들이 널리 수용함으로써 남북한 양측과 여야 모두에 '학습효과'를 가져왔다.

이런 '학습효과'는 이른바 '총풍 3인방'이, 비록 미수에 그쳤지만 판문점 총격 요청 사건을 모의하고 베이징에서 북한 측 대선 공작반을 접촉해 나눈 쌍방의 대화에서도 확인된다. 또 이런 학습효과는 결과적으로 역대 선거에서 피해를 입은 야당에게도 북풍에 대비하는 것이 선거에서 표를 도둑맞지 않는 최선의 방책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실제로 97년 10월 대선을 두 달 앞두고 당시 김대중 총재가 이끈 국민회의는 선거 사상 최초로 당내에 정보통 의원들을 중심으로 '북풍 전담 대책팀'을 구성했다. 이는 96년 '4월 북풍' 때처럼 무방비로 당하는 전철을 다시는 밟지 않겠다는 야당의 결연한 의지 표시였다.

또 96년 4·11 총선 직후 국민회의가 김대중 총재의 참석 하에 이례적으로 판문점을 눈앞에 둔 임진각에서 '총선 북풍 세미나'를 개최하고 북한과 정부 여당을 규탄한 것은 이러한 피해의식의 발로였다. 국민회의는 97년에도 '97년 대선과 북풍' 세미나를 후원해 북풍을 경계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피해의식은 당시 한국미래정치연구회(회장 나종일)가 주최한 이 세미나에 직접 발제자로 나선 데서도 짐작할 수 있다(그런데 긴박한 사정이 생기는 바람에 김 전 대통령은 세미나에 참석하지 못하고 대신 천용택 의원이 발제문을 대독했다). 역대 북풍의 피해자인 김 전 대통령이 4월 북풍을 어떻게 분석했는지를 그의 발제문을 통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누가 북풍을 일으키느냐에 따라서 '북한 주도 북풍'과 '한국 주도 북풍' 그리고 '야합형' 등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북한 주도 북풍이란 북한이 테러 의도 또는 국제 협상에서의 협상력 제고 등을 위해 고의적으로 발생시키는 긴장상태를 말합니다. 한국 주도 북풍이란 한국의 집권세력 또는 여당이 총선 승리 등 정략적 목적을 가지고 일으키는 것입니다. 야합형 북풍이란 남북한 중 어느 쪽이 주도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을 수 있으나 사실상 남북한 모두의 집권세력에게 정치적 이득을 주기 위해 일으키는 북풍을 말합니다."

김 전 대통령은 북풍을 일으키는 주체에 따라 세 가지로 분류했다. 그리고 김 전 대통령의 '경고'대로 97년 대선을 앞두고는 안기부와 베이징에 상주한 북한의 대선 공작반이 상응한 '야합형 북풍 공작'이 실제로 발생하기도 했다. 그러나 북풍의 역경을 뚫고 대통령에 당선된 DJ는 재임 중 '햇볕정책'과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 남북한의 긴장을 강화하는 북풍의 근거지를 소멸시켰다.

그런데도 남북한의 긴장을 강화하는 '한풍'이건 긴장을 완화하는 '온풍'이건, 남북한 쌍방의 뒷거래에 의한 '인공풍'이건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자연풍'이건, 결과적으로 모든 북풍의 피해자였던 DJ가 방북을 앞두고 다시 '북풍 공작' 시비의 대상이 되고 마치 공작의 '예비음모자'인 것처럼 묘사되는 현실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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