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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명가 3대의 정선아라리' 음반 표지
'아리랑 명가 3대의 정선아라리' 음반 표지 ⓒ 신나라
우리에게 아리랑이란 무엇일까? 왜 우리 겨레는 전 세계 어디서나 아리랑을 들으면 눈물이 찔끔거린다고 할까? 일제강점기에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을 보면서 배달겨레의 아픔과 울분을 같이 느꼈을까?

신나라 김기순 회장은 "아리랑의 참된 의미"라는 글에서 "아리랑 속에는 인간의 모든 아픔과 갈등, 그리고 용서와 화해, 그리고 강력한 저항과 울분이 녹아 있습니다. 아리랑은 그냥 노래가 아닙니다. 아리랑은 삶과 죽음의 소리입니다. 아리랑은 정신을 토해 내는 울부짖음이요, 천하를 가슴에 품고 용서하는 해원의 소리인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우리 겨레의 4대 아리랑은 누구나 서울의 <본조아리랑>, 강원도의 <정선아리랑>, 경상도의 <밀양아리랑>, 전라도의 <진도아리랑>을 꼽는다. 또 이 가운데 강원도의 <정선아리랑>을 아리랑의 원형을 간직한 본류라는 데 이의를 다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것은 기록상 4천여 수의 가사가 전해 오고 있고, 노래의 전승체계도 변함없이 이어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정선아리랑>을 사람들은 "아리랑 중의 아리랑"이라고 한다.

<정선아리랑>을 주제로 한 고숙경의 석사논문 '정선아리랑에 관한 연구'에도 "동부지방의 민요에 속하는 강원도 지방의 정선아리랑을 택한 이유는 정선아리랑은 각 지방의 많은 아리랑 중에서 그 기원이 가장 오래되었고, 가락과 선법에서 한국 민요의 특징이 잘 표현되어 있으며 우리 민족의 감정 또한 가장 잘 표현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특히 <정선아리랑>은 다른 노래들과는 달리 가사가 고정되지 않고, 삶 속에서 꾸준히 창조되어 온 노래이다. 또, 삶 그 자체임은 물론 사람들의 감정이나 마음에 맺힌 것을 걸러 주고, 풀어 주는 노래라고 말한다.

그런 <정선아리랑>을 독자성을 가지고 3대를 이어온 가족이 있다. 1989년 83세로 사망한 1대 정옥선, 61살로 투병 중인 강원무형문화재 제1호 명예예능보유자 2대 김병하, 그리고 강원무형문화재 제1호 예능보유자이며, (사)정선아리랑보존회 이사장인 3대 김길자가 그들이다.

1대 정옥선은 많은 일화가 있다. 예를 들면 소를 몰던 사람이 모친의 정옥선의 아라리 소리에 넋을 잃어 그만 소가 귀리 밭에 들어가 밭을 다 절단낸 적이 있다는 얘기나 돌다리를 건너던 이가 모친의 소리에 취해 그만 발을 헛디뎌서 물에 빠져 버렸다는 얘기 등이다. 이런 소리의 소유자였으니 두말할 나위 없이 나라가 인정하는 예능보유자가 된 아들과 손녀의 소리내력을 짚어 준다.

또 2대 김병하는 시인 고은이 말했듯 "김병하의 낭낭한 목청은 우리가 넘어온 성마령 쪽에 대고 정선아라리 청승의 극치를 보여준다"라는 평가를 듣는다. "아무리 괴롭고 고통스런 일이 있어도 아라리 한 자락 멋들어지게 하고 나면 가슴이 확 트입니다. 아라리를 부르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신명이나요. 알 수 없는 기운이 쑥쑥 올라오는 듯하지요"라는 김병하에게서 우리는 신명으로 가득 찬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렇게 아리랑에 발자취가 뚜렷했던 김병하는 1995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더는 소리를 들을 수가 없고 대신 3대 김길자에게 아리랑은 넘어갔다.

오랫동안 그녀를 지켜본 아리랑연합회 김연갑 이사는 그녀를 투병 중인 아버지와 신경통 등의 병고에 시달리고 있는 어머니를 극진히 모시는 효성 지극한 사람으로 평가한다. 그는 "그녀를 참으로 아름답다. 그래서 그렇겠지만, 그의 소리는 감동을 준다. 가슴을 아프게도 하고 눈물을 짓게도 한다. 그렇다고 청승맞지는 않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3대 김길자가 와병 중인 아버지의 회갑을 맞아 헌정하는 음반 <아리랑 명가 3대의 정선아라리>(신나라)를 통해 내놓았다.

이 음반의 첫 장에는 할머니 정옥선과 아버지 김병하 그리고 할머니의 이종과 고종 사촌들과 함께 벌인 소리판이다. 특히 장고 반주에 의한 소리와 향피리 연주도 있다. 사설은 약 80여 수인데 이들 자료는 거의 80년대 말에 카세트에 담은 것으로 상태가 고르지는 못하다. 두 번째 장은 김길자씨의 소리로 부친에게 바치는 헌정곡을 먼저 담고, 무반주와 반주에 의한 긴소리, 자즌소리, 엮음소리를 담았다. 특히 잦은 소리는 물박장단(물동이에 바가지를 엎어놓고 치는 장단)과 함께했다.

겨레여! 우리는 아리랑의 민족이다. 이를 생각한다면 우리 모두 정선아라리를 듣고, 한겨레로서의 감흥을 흠뻑 느껴보길 권한다. 그리고 온 세상에 퍼져있는 배달겨레의 모든 이들과 하나 된 마음을 가져보면 좋을 일이다. 어쩌면 이 <정선아라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통일을 앞당길지도 모를 일이다.

"맨드라미 줄봉숭아는 토담이 붉어 좋고요
앞남산 철쭉꽃은 강산이 붉어 좋다

봄철인지 가을철인지 나는 몰랐더니
뒷동산 행화춘절이 날 알려주네"(<정선아리랑>의 한 대목)


아버지의 회갑에 효심으로 바치는 아리랑
[인터뷰] 한민족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 김연갑

▲ 인터뷰를 하는 김연갑 한민족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
당연히 음반평이니 소리를 부른 김길자를 인터뷰했어야 했다. 하지만, 여러 번 김길자씨와의 만남을 시도하다 번번이 실패했다. 그것은 그녀가 극진히 간병하고 있는 아버지 김병하씨의 병이 깊어져 도저히 짬을 낼 수가 없다는 말에 포기하고 말았다. 대신 이 음반을 기획하여 제작한 한민족아리랑연합회 김연갑 상임이사에게 얘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 새삼스러운 얘기지만 아리랑은 무엇인가? 왜 아리랑에 미쳐있는가?
"나라밖 동포들은 아리랑 얘기만 나오면 눈물을 글썽인다. 그리고 아리랑 얘기를 먼저 하지 않으면 다른 이야기로 나아가지 못한다. 중앙아시아에 가면 우리 동포는 그냥 고려인이고, '까레이스키'이다. 남과 북 어디도 고국이라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헤어질 때면 으레 아리랑을 부른다. 그래서 아리랑은 민족의 노래다.

아리랑에는 한민족의 동질성, 정체성이 있고, 신앙심이 있다. 아리랑 고개의 상징성은 발병이 아니라 고개를 넘으려 하는 것이다. 수난을 많이 겪은 우리 겨레가 아픔보다는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로 부른 노래일 것이다. 나는 이를 깨닫고 아리랑의 순서를 맞추고, 대중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하고 군대에 갔는데 휴전선 근처에서 근무했던 탓에 북한군의 선무방송을 자주 들을 수 있었다. 그때 "저기 저 산이 백두산이라지. 해 뜨고 달 뜨고 별도 뜨네'라는 북한 아리랑을 들을 수 있었는데 가사가 좋다는 생각을 했다. 제대 뒤 사북에서 진폐증 환자가 부르는 아리랑을 들은 적이 있는데 이때 아리랑을 연구해볼 가치가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후 20년 넘게 미쳐왔다."

- 그렇게 오래 지탱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요인이 있다면.
"이 일을 인정하고, 노력에 대해 대가를 주는 데가 있다는 것은 중요하다. 신나라는 이번 음반의 제작뿐 아니라 나의 20년 아리랑 작업을 같이해왔고, 11번째 음반을 내주었다. 음반사가 한 장르에 그것도 돈도 되지 않는 데에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집중하는 것은 그 예가 없을 정도이다. 이는 신나라가 아리랑의 역사성, 전통성과 현재적, 미래적 가치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리랑에 관한 한 신나라의 공로는 높이 기릴 만 한다."

- 정선아라리 3대와 이번에 내놓은 음반에 대해 이야기를 해달라.
"김길자 가족은 아리랑을 내림 직업으로 가진 가족이다. 스승과 제자가 이어간 경우는 종종 있지만 가족이 3대를 이어간 경우는 거의 없다. 특히 김길자의 아버지 김병하가 말을 할 줄 알고, 활동력이 있었던 탓에 정선아라리를 외부에 알릴 수 있었고 유명 인사가 되었지만 이 때문에 그는 다른 사람들과의 갈등에 가난까지 겹쳐 고통을 받다가 급기야 목을 쓸 수 없는 중풍으로 쓰러졌다.

그러자 김길자가 아버지의 소리를 물려받아 아버지의 한을 풀어주게 된 것이다. 하지만, 김길자는 단언컨대 20년 귀명창인 내가 아리랑 소리에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김길자는 투병중인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한 딸이다. 그 김길자의 소리뿐 아니라 효성에 반한 나와 신나라가 협력하여 김병하 회갑맞이 헌정 음반을 내게 되었다."

-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당장 통일이 되면 어떻게 할 것이냐?'라는 물음에 어떤 대답을 할 것인가? 그런 점에서 통일이 된 뒤 전 세계 135 나라의 동포가 같이 아리랑을 부를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비무장지대 안에 박물관을 지었으면 좋겠다. 만일 지어진다면 내가 20여년 모아온 아리랑 자료를 모두 내놓겠다. 그래서 분단으로 인한 상처가 아물기를 기대한다."

어떤 책의 글쓴이가 '미쳐야 미친다'라고 했던가? 그는 그렇게 아리랑에 미쳐 있었다. 온 나라 땅의 9할을 발로 밟아봤다고 할 정도로 미쳐있는 것이다. 그는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신앙처럼 말하고 있었다. 다만, 그로 인해 가족들을 힘들게 한 것에 대해서는 미안하다고 말한다. / 김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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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으로 우리문화를 쉽고 재미있게 알리는 글쓰기와 강연을 한다. 전 참교육학부모회 서울동북부지회장, 한겨레신문독자주주모임 서울공동대표, 서울동대문중랑시민회의 공동대표를 지냈다. 전통한복을 올바로 계승한 소량, 고품격의 생활한복을 생산판매하는 '솔아솔아푸르른솔아'의 대표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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