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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8 장 금룡기주(金龍旗主)
“자네는 실수 아닌 실수를 했군.”
육능풍의 지적에 여후량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미 이 능구렁이는 뭔가를 눈치 채고 있다. 반당과 헤어져 철혈보로 돌아올 때부터 이미 낌새가 이상했다. 하지만 그의 내심과는 달리 창백한 얼굴에는 전혀 감정이라고 할만한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분명하지 않았소.”
강명 일행이 철혈보를 치기 위하여 이토록 근접해 왔다는 사실을 왜 보고하지 않았느냐는 물음이다. 육능풍이 어떤 인물인지 꿰뚫고 있는 여후량으로서는 자신이 매우 곤란한 처지에 빠졌음을 느끼고 있었지만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야 했다.
“자네답지 않은 애매한 대답이군. 그들이 온 것을 파악하지 못했다는 뜻인가? 아니면 그들의 의도를 분명히 알 수 없었다는 뜻인가?”
“둘 다요. 우선 그들은 오늘 새벽에 백사평(白沙坪)에 당도했고, 오전에야 그들이 능선에 자리 잡은 사실을 알았소. 또한 시야가 터져 있는 곳이라 그들에게 접근하거나 그들의 의도를 파악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보고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오.”
정보를 다루는 사람이라면 확실치 않은 사실을 덥석 보고하지 않는다. 정보란 칠팔 할 정도가 쓸모없는 것이고 겨우 이삼 할 정도만이 정보로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쓸데없는 것까지 보고하는 것은 정보를 관리하는 자의 태도가 아니다. 허나 육능풍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늘 자네는 정말 자네답지 않은 말만 골라하는군.”
짜증이 섞인 목소리였다. 육능풍으로서는 웬만해서 보이지 않는 태도다. 허나 여후량은 무섭게 노려보는 육능풍의 눈빛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보았다.
“최소 본 보 이 백리 이내에 벌어지는 일은 손바닥의 손금 보듯이 환하게 보는 자네야. 그런데 자네가 분명하게 파악을 하지 못했다고? 노부조차 알고 있는 사실을 자네가 파악하지 못했다는 게 변명이 될 수 있을까?”
“.......!”
“더구나 그들 일행에는 남화우가 끼어 있었어. 반당이 데리고 간 남화우 말이야....!”
반당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정도로 따지자면 육능풍이 제일 가슴 아프고 슬플 것이다. 개인적인 친분도 그랬지만 그를 따로 움직이게 하고 철혈보로 돌아왔던 자신이 그를 죽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이 그의 전신을 짓누르고 있었다.
“지금까지 해왔던 관행대로 한 것뿐이오. 그것이 실수였다면 더 이상 변명하지 않겠소.”
여전히 여후량의 창백한 얼굴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 모습은 너무나 냉정해서 더 이상 추궁하거나 탓하기 어렵게 만들었지만 육능풍은 달랐다. 그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자네같이 똑똑한 사람이 노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다니 정말 이상한 일이군. 노부는 분명 자네가 실수 아닌 실수를 했다고 했네.”
“.........!”
“자네는 고의로 실수한 것이지. 우리의 이목을 흐리고 그들이 본 보를 기습하기 쉽도록 말이야.”
“노조의 말씀이 지나치시오.”
“왜 그랬나? 보주는 자네에게 서운하게 대한 적이 없었는데.... 자네에게 친누이까지 주지 않았는가? 무엇이 본 보를 배반하도록 만든 것인가?”
여후량은 심한 모욕을 받은 듯 몸을 가늘게 떨었다. 미간과 이마 좌우에 푸른 핏줄이 솟아올랐는데 그것은 여후량이 화가 났을 때 보이는 모습이었다. 이빨을 꽉 물으며 신음과 같은 어조로 말을 뱉았다.
“안 들은 것으로 하겠소. 하지만 더 이상 본 전주를......”
“자네는 이미 연동의 존재를 알고 있었더군. 문주나 노부에게 보고하지 않고 말이야.”
육능풍은 능구렁이다. 살모사와 같이 치명적인 독은 가지고 있지 않지만 먹이감을 완전하게 칭칭 감은 후에나 느긋하게 먹이를 삼키는 것이 구렁이다. 이미 육능풍은 철저하게 준비한 것 같았다.
“..........!”
“섭장천 일행이 천마곡을 빠져 나온 지 하루도 못되어 자네는 그들의 위치를 정확히 연락해 주었지. 어디로 나왔는지는 알려주지도 않고 말이야. 더구나 지금 저 밖에 와있는 강명이란 아이가 열락장에 사건을 일으킬 때까지 보고도 하지 않았던 자네가 아니던가?”
육능풍은 여후량의 목줄을 서서히 죄어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가능성은 두 가지 뿐. 하나는 자네가 천마곡 내에 본 보의 첩자를 심어 두었거나, 아니면 자네가 그들과 내통하는 인물이라는 점이지.”
“노조!”
“노부가 지금 알고 싶은 것은 왜 자네가 본 보와 백련교가 반드시 싸우도록 서둘렀을까 하는 것이네. 두 곳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만들어 자네가 얻을 이익이 무엇이었냐는 것일세.”
일이 꼬였다. 왜 강명은 본래대로 공격을 하지 않고 타협을 하자고 사람을 보낸 것일까? 자신이 파악하고 있는 강명은 절대 타협할 사람이 아니다. 무슨 일이 발생했기에 그가 공격 직전에 예상치 못한 행동을 보인 것일까?
“노조가 본 전주에게 누명을 씌어 얻을 이익이 무엇이오?”
마지막 발악과도 같은 반문이었다. 무적신편 신철과 진독수, 그리고 자신의 수하인 초산까지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은 육능풍에게 동조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이미 이들은 사전에 협의했고, 완벽한 올가미를 준비했음이 분명했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자네는 역시 대단한 사람이군. 다른 사람 같았으면 벌써 인정을 했을 텐데..... 그 정도이니 지금까지 보주와 우리들을 감쪽같이 속일 수 있었겠지.”
육능풍은 혀를 차더니 밖을 향해 손뼉을 세 번 쳤다. 그러자 독고상천과 핏빛무복을 걸친 중년인이 만신창이가 된 인물의 양 팔을 잡고는 질질 끌면서 문으로 들어섰다. 그것을 본 여후량의 눈에 순식간이나마 당황한 기색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자네가 눈치 채고 있었던 대로 노부는 본 보로 돌아와서 자네를 눈여겨 살피기 시작했다네. 매우 조심을 하더군. 허나 노부의 머리는 아직 녹슬지 않아 과거에 자네가 했던 행동과 만났던 인물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네.”
허나 여후량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육능풍과 만신창이가 되어 끌려 온 인물을 번갈아 보면서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노조는 확실히 무서운 사람이오. 보주도 없는 상황에서 본 전주를....”
“그에 대한 대답은 형율당(刑律堂)의 위당주(魏堂主)가 해줄 걸세.”
강환도(剛環刀) 위인충(魏絪沖). 형율당의 당주로 철혈보 서열 팔위. 무공도 무공이려니와 조사와 고문에 있어 중원 최고라 할 수 있는 인물이 바로 그다. 백의를 즐겨 입으나 그의 백의는 언제나 피에 절어있어 백의를 입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는 인물이었다.
“본 교 십대율법 중 제 이조. 본 보를 배신한 자는 죽는다. 제 칠조. 적과 내통한 자는 죽는다. 집행은 청혈환(淸血丸)을 먹이고 이틀 후 사지를 자른다.”
청혈환은 온몸의 피를 서서히 굳어지게 만드는 독약의 일종이었다. 서서히 몸이 굳어가면서 말할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다 죽게 되는 것이다. 이미 끝난 일이었다. 더 이상 변명은 할 필요가 없었다. 여후량은 품속에서 네모난 철패를 꺼내 탁자 위에 소리가 나게 던졌다.
“결국 자네가 택할 마지막 길이 그것이군. 열흘간의 목숨 연장.”
탁자 위에 올려진 것은 면사철부(免死鐵符)였다. 어떠한 죄를 지어도 열흘 동안 살려준다는 철혈보의 신물. 모두 일곱 개의 면사철부 중 하나를 여후량이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본 강환도 위인충이 무겁게 말했다.
“면사철부 회수. 죄인 여후량에게 열흘의 기간을 준다. 그 기간 동안 자신의 결백을 증명한다면 죄를 사한다. 단 자신의 거처에 머물되 거처를 벗어나거나 다른 행동을 보일 때는 즉시 면사철부의 효력이 사라진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초산의 고개가 천천히 가로 저어졌다. 지금까지 자신이 모셨던 인물이다. 여후량은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사실은 여후량도 알고 있을 것이다. 만신창이가 되어 숨을 헐떡이고 있는 배석(裵奭)의 증언과 위인충이 여후량의 거처에서 발견한 전서구 몇 장은 충분한 증거였다. 도대체 여후량은 왜 열흘이라는 시간을 벌려는 것일까? 그의 상념은 독고상천에게 말하는 육능풍의 말로 깨졌다.
“자네가 직접 가보는 것이 좋겠군. 옆방에 있는 도천수와 남화우에게 정운학을 넘기고 강명이란 자에게 같이 갔다 오게. 그들의 요구대로 이쯤에서 일을 끝내자고 전하게. 단, 자네의 호승심으로 인하여 자네가 다치는 것은 원치 않네.”
반당의 죽음으로 젊은 혈기에 혹시나 강명과 승부를 벌이지 않을까하는 노파심 때문이었다.
“자네보고 가라는 의미는 현 중원에서 천하제일인이라 부를 수 있는 인물을 직접 보고 느끼라는 것이네. 자네는 보는 것만으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걸세.”
반당을 꺾은 강명은 이제 천하제일인이라 할만했다. 그런 자를 만나보라 하는 것이다. 육능풍은 독고상천을 진정으로 아끼는 몇 사람 중의 한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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