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말부터 성공회대 객원교수 자격으로 1년 정도 국내에 체류하는 서경식(56·일본 도쿄경제대학 현대법학부) 교수는 "조국 땅에서 조국 사람들과 가깝게 접하면서 생활해 볼 기회"를 몹시 기대하고 있었다.
고교 1학년 때인 1966년 처음 조국 땅을 밟은 이래 형들(서승, 서준식)이 옥중에 있는 동안을 제외하곤 여러 차례 조국 땅을 방문하기는 했지만 모두 단기체류여서 아쉬움이 컸던 그는 이번 체류기간동안 "첫 번째로 '우리말'을 배우고 싶고, '우리나라'의 역사나 문화에 관해서 처음부터 공부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또 "될 수 있는 한 국내 여러 곳을 둘러보고, 여러 사람들과 만나 얘기 나누고 싶은 게 바람"이라고 했다.
조국으로의 장기 출장(?)을 준비하느라 바쁜 서경식 교수를 이메일로 먼저 만났다. 서경식 교수와의 인터뷰는 먼저 한글로 쓴 질문을 보내고, 서 교수가 이 질문에 대해 일본어로 대답하고, 그 대답을 일본도쿄외국어대학 박사과정에 다니며 한국민주화운동에 참가한 재일조선인 활동을 연구하고 있는 조기은씨가 우리말로 옮겼다.
다음은 서경식 교수와의 이메일 인터뷰.
"내 존재 끊임없이 묻는 '디아스포라'"
- 이번에 나온 <디아스포라 기행-추방당한 자의 시선>에서 책제목으로 사용한 '디아스포라'는 무슨 뜻인지.
"디아스포라(Diaspora)는 원래 그리스어로 '이산한 유대민족'을 가리키는데, 지금은 일반적으로 유대민족만이 아니라 고국을 떠나 지내게 된 '이산의 사람들'을 의미하는 말로써 쓰입니다. 저와 같은 재일교포나 흔히 말하는 '재외교포'도 이런 세계적인 디아스포라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디아스포라는 자신의 위치가 분명하지 않아 하나의 '국가'나 하나의 '문화'에 안주할 수가 없습니다. 가령, '우리 한국인의 입장에서 보면'이라고 말할 때, 자신이 그 '우리'의 일원인지를 끊임없이 자문하는 것이 디아스포라입니다."
- 서 교수의 책에 자주 등장하는 '바깥'(외부)이란 낱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저는 자신이 원한 것도 아닌데 일본에서 태어나고 인생의 대부분을 일본에서 살았습니다. '밖'이라고 하는 의미는 단순하게 말하면 조국 땅의 '밖', 조금 더 깊게는 마조리티가 갖는 기성개념의 '밖'을 말합니다. 기성개념은 '이것이 우리 민족이다' '이것이 우리 역사다' '이것이 우리 국민이다' '이것이 우리 국가다'라고 하는 것을 말합니다. 저는 '국가'나 '민족'이 근대 과정에서 만들어진 상상속의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들은 자연적인 것도, 자명한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서 교수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라도 이런 느낌일 것이다'라는 발상법을 가장 싫어한다며, 그렇다고 '민족' '국가' 개념을 머릿속으로 부정하기만 하면 우리들이 '국가' '민족'의 구속에서 해방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민족' '국가'라고 하는 개념이 만들어진 것이긴 하지만 역사적, 정치적인 구조 속에서 일정한 필연성을 갖고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란다.
"재일조선인은 일본 침략의 결과"
- 이 책을 통해 독자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재일조선인은 일본이 근현대사를 통해 이웃을 침략하고 식민 지배를 해온 직접적인 결과로 만들어진 '꺼림칙한 기억'의 살아있는 증인입니다. 그런데 대다수 일본인은 '재일조선인'이 왜 있는지를 거의 이해하지 못합니다. 역사적, 정치적 지식이 결정적으로 부족하기도 하지만 지식부족 탓만은 아닙니다. 그들이 무의식적으로 그러한 '꺼림칙한 기억'으로부터 눈을 돌리고 싶거나 구식민지 종주국 국민이라고 하는 마조리티(다수) 사고방식에서 빠져나올 수 없기 때문에 마이너리티를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저는 저술이나 강연, 대학에서의 강의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러한 일본인 마조리티의 의식의 벽에 도전해 왔습니다. 이번의 책도 그런 제 라이프 워크의 일환입니다."
- 재일조선인으로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힘든 점은 무엇인가.
"일본사회에서의 존재이유가 끊임없이 부정되는 점이 가장 힘들지요. 재일조선인이 일본에서 안심하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많은 일본인들이 재일조선인이 일본에 있는 이유를 이해하고, 자국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의 역사를 바르게 인식하고, 그 역사의 부당성을 인정하고, 재일조선인이 일본에서 살아가는 것의 정당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대다수 일본인들의 인식 수준은 이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서 교수는 매우 자주 일본인들, 심지어 직장 동료들로부터 "일본어 잘 하시네요. 언제 일본에 오셨어요?"라는 질문을 받는다고 했다. 그럴 때면 그는 한마디로 "저는 일본에서 태어났습니다. 이유는 일본이 조선을 식민 지배했기 때문이에요"라고 답한다. 가벼운 인사를 건넸던 상대는 긴장한다. 서 교수는 경우에 따라서 귀찮은 논쟁이 될지도 모를 근현대사나 국민국가론 해설을 할 마음의 준비를 늘 하고 있다.
갓산 카나파니와 에드워드 사이드
- 이 책은 20여 년간 일본 바깥의 공기를 쐰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어떤 이유로 여행을 시작했는지.
"저는 1983년에 처음 해외여행을 했습니다. 부모님 두 분 다 돌아가시고 형들은 한국에서 옥살이 할 때입니다. 한마디로 어떤 희망도 가질 수 없었던 어두운 시대였죠. 이 일본이라고 하는 장소밖에 모른 채로 죽어가는 걸까, 그렇게 생각한 저는 단 한 번만이라도 하는 심정으로 유럽으로 출발했습니다. 그 때 많은 미술작품을 본 것이 제 기행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서경식 교수는 이 최초의 여행의 경험을 담아 <나의 서양미술 순례>를 썼고, 그 이후 해마다 두세 번씩 해외에 나갔던 이야기들을 담아 또 한권의 미술기행 <청춘의 사신>을 출간한 바 있다. 그는 여행이 정신적으로 폐쇄된 공간인 일본에서 질식사 하지 않고 살아남는 데 도움이 된다고 했다.
- 서 교수는 디아스포라적 자기 인식을 정립하는데 특히 영향을 많이 준 사람으로, 에드워드 사이드와 함께 갓산 카나파니를 꼽고 있는데, 우선 갓산 카나파니에 대해서 소개해 달라.
"갓산 카나파니는 팔레스티나 난민 문학가이자 해방투쟁 활동가였습니다. 팔레스티나 문제는 부정의함과 식민지주의가 갖고 있는 악이 집중적으로 표현된 대표적 사례인데, 카나파니는 이러한 싸움의 소용돌이 속에서 전력을 다한 사람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들이 하나의 모델로 봐야 할 인물입니다. 그의 문학 또한 표현수단조차 빼앗긴 팔레스티나 난민의 존재에 대한 고뇌를 형상화하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그것은 마조리티 문학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안티테제라고 생각합니다. 마이너리티 작가인 저로서도 그런 점을 이상으로 삼고, 한발이라도 거기에 가깝게 다가가고 싶습니다."
- 에드워드 사이드는 어떤 학자였는지, 또 서 교수에게 어떤 인물로 각인돼 있는지.
"사이드는 워낙 유명한 인물이니까 자세하게 설명할 필요는 없겠죠. 팔레스티나 디아스포라인 그는 미국 콜롬비아대학 교수로 지내면서 미국 마조리티들의 팔레스티나 문제에 대한 무지, 몰이해, 편견과 정면으로 맞서 싸웠습니다. 또한 팔레스티나의 진정한 해방을 위해 팔레스티나의 정치지도부나 아랍 제국의 정치권력을 호되게 비판하는 것도 피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야말로 그가 우리들의 시대를 대표하는 진정한 지식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2003년 봄, 이라크 전쟁 개전 직전 저는 어느 TV의 기획으로 그와 대담할 기회가 있었으나 여러 사정으로 실현되지 못하고, 그 반년 뒤 그가 백혈병으로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진정한 조국은 전쟁, 빈곤, 차별 없는 세상"
- 런던 교외에 있는 마르크스의 무덤 묘비에 새겨진 "철학자들은 세상을 이런저런 식으로 해석해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는 <독일 이데올로기>의 한 구절을 책에 인용하고 있는데, 서 교수의 의중 또한 반영돼 있다고 본다. 세상을 어떻게, 무엇으로 바꾸고 싶은지.
"저는 전쟁 없는 세상, 차별 없는 세상, 빈곤이나 기아가 없는 세상, 대화를 통해 타자를 이해하고 존중할 수 있는 세상, 인간의 자유로운 정신이 어떤 구애도 받지 않고 자기표현 할 수 있는 세상, 즉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세상과는 반대의 세상을 열망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갖고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는 어려운 질문입니다. 보기에 따라서는 마르크스 이후의 오늘날까지의 역사는 '세상을 바꾸려고 하는 열망의 좌절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낙관적이지는 않지만 명확한 길이 보이지 않더라도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열망만은 버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 서 교수에게 있어 진정한 조국은 어떤 곳인가. 또 한국과 일본은 어떤 나라인가.
"제게 있어 '진정한 조국'이란 앞에서 말씀드린 제가 열망하는 '세상'과 공통되는 장소를 말합니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런 장소는 '한국인'이라던가 '무슨무슨인'이라고 하는 한정된 사람들에게만 독점된 특권적인 회원클럽이 아니며, 특정 '국민'으로만 성립된 '국가'와도 다릅니다.
제게 있어 일본은 방금 말씀드린 '진정한 조국'의 이미지와 정반대의 장소입니다. 일본은 지금 전쟁을 할 수 있는 국가로 변신하고 있고, 차별이 당연한 것처럼 버젓이 행해지고 있고, 빈부의 격차는 엄청나게 벌어지고 있고, 타자를 존중하지 않고, 정신의 자유는 위축되고 있습니다.
한국은 어떻습니까? 한국에도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분단체제에 기인하는 군사문화는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국사회에 관해서 조금 더 정확하고 책임 있는 의견을 말씀드리는 것은 한국에서 생활해보고 나서가 좋겠지요."
- 작금 한일 간에는 일본의 우경화, 고이즈미 총리의 신사참배, 교과서 왜곡 등 여러 가지 문제로 갈등을 빚고 있다. 여기에 대한 의견은?
"저는 일본의 우경화야말로 동아시아(나아가서는 세계)의 평화를 가장 위협하는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90년대 이후 일본은 급속하게 우경화의 길을 걸어왔는데, 이는 일본 우파세력이 힘을 길러왔다기보다 진보파나 중간적인 양심세력이 지침과 원칙을 잃어버리고 자멸해 왔다고 보는 게 옳습니다.
특히 60, 70년대 양심적인 시민들 대다수가 자기긍정적인 시니시즘(냉소주의)에 빠졌습니다. '뭐가 옳은 것인지 모르겠다'거나 '무엇을 해도 소용없어'라는 담론으로 얼버무리면서 자신의 입장을 긍정하고 기득권을 지키려고 했던 것입니다. 야스쿠니신사문제건, 교과서문제건, 그것이 문제임이 명백한데도 질질 끌고 악화시키고 있는 큰 원인은 이 마조리티의 무기력, 무관심, 이기주의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과 형들이 분명히 서로 다른 인격
- 서승·서준식 두 형의 유명세(?) 때문에 일본에서 사는데 불편한 점은 없는지.
"군사정권 시절, 형들이 옥중에 있을 때 적지 않은 일본 시민들이 걱정해주고 구원 활동을 해준 것 잊지 않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형들이 일본에서도 어느 정도 알려져 있지만 그 때문에 불편이나 거북함을 느낀 적이 없고 오히려 도움을 받았던 면이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옥살이는 형들이 하고 있는 데도 사람들은 저까지 동정하고 여러 가지로 도와주려고 했습니다."
서 교수는 자신과 형들이 서로 다른 인격이라는 것을 확실히 해두고 싶다고 했다. 형들의 고생이 자신의 생각이나 삶의 방식에 큰 영향을 준 것을 자각한다면서 그는 사고방식이나 감성에 있어서 다른 점도 분명히 많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 대해 언급할 때 언제나 형들과 결부되는 것에 위화감이 있다고 털어놨다.
- 마지막으로 서경식 교수 자신이 평생 품고 산다는 화두 "나는 누구이며, 어디서 왔는가,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말해 달라.
"이 답변은 저의 저서에 쓰여 있습니다. 여기서 간단하게 말씀드리지 않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