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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 스타일로 부른 애국가를 응원가로 사용하는 것이 적합한가' 그 여부에 관한 논란은 이미 출발부터 난센스였다. 애초에 안 될 일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초점이 좁았다. 논쟁점은 사용 여부가 아니라 애국가 응원가의 근본적인 한계에 대한 논의이어야 했다. 2002년의 응원가 <오! 필승 코리아>나 <아리랑>과 무엇이 다른 것인가에 대한 논의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먼저 애국가의 변용에 대해 짚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다른 나라의 어떤 가수가 부른 예가 있었다는 사례는 부차적이다. 우리의 방식대로 생각하면 되기 때문이다. 수많은 경기를 벌일 때 응원가는 반드시 갖추어야 할 요소다. 응원가는 개인 개인을 하나의 조직적 결집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기에 이때 애국가를 응원가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많다. 더구나 국제경기대회에서는 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애국가는 누구나 아는 것이니 쉽게 따라 부를 수 있고 나라의 상징이니 더욱 그렇다.
하지만 그것을 실제로 부르는 이들은 없다. 들썩이는 분위기에 애국가는 노래 자체가 비장미만을 풍기며 일순간 분위기를 착 가라앉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신이 나야 힘이 나고 제 맛인데 느리고 장중한 악상이니 흥겨운 맛이 없다.
노래 자체만의 특성도 그렇거니와 약간의 변용도 애국가에 대한 예절 때문에도 금기시 되는 것이 불문율이다. 이는 제도교육을 받은 이들의 무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원칙이기도 하다.
학교에서 배우는 국가에 대한 예절에는 부를 때와 들을 때로 나누어 지켜야 하는 예절을 명시하고 있다. 먼저 부를 때는 "가사를 통하여 조상의 빛난 얼을 되살리고, 국가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며 정성을 다하여 민족과 국가에 봉사하겠다는 결의를 다짐하는 마음으로 불러야" 한다. 이런 정도야 애국가이니 가능할지 모른다.
그 다음은 애국가를 어떻게 불러야 하는 지 확실하게 규정하고 있다. "애국가의 곡조에 다른 가사를 붙여 부르거나, 곡조를 변경하여 불러서 애국가의 존엄성을 손상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다시 반복하면 애국가의 곡조를 변경하는 것은 애국가의 존엄성을 해하는 일이기 때문에 금지하고 있다. 여기에 "엄숙한 마음으로, 바른 자세로 불러야" 한다.
한편 들을 때는 "애국가가 연주될 때에는 모두 기립한 자세로 듣고", "걸어가다가도 애국가가 들리면, 손에 들었던 것을 그 자리에 놓고 끝날 때까지 그 쪽을 향하여 바른 자세로" 들어야 한다.
애국가에 대한 예절이 이럴 때 록 스타일의 애국가를 부르거나 흥겹게 애국가를 합창해서는 예의에 어긋나도 한참 어긋나는 것이다. 엄격하게 말하면 록 스타일의 애국가를 들을 때도 기립하여 경직되게 듣고 있어야 한다.
언제나 애국가는 비장하고 장중하기만 해야 한다. 그러나 곡조를 변경하는 것이 애국가의 존엄성을 해친다는 대목 자체가 시대적으로나 애국가의 본질적 특성상 맞지 않는다. 애국가의 목적은 애국을 불러일으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궁극적인 목적은 애국가 자체의 존엄성이 아닌 것이다.
더구나 애국가를 4절까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들이 많고 누구나 즐겨 부르지도 않는 바에야 대중성 차원에서 방안을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애국가의 본래 목적에 맞게 말이다. 또한 버전이 다른 애국가가 나온다고 그것이 본래의 애국가를 대체하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지금의 애국가는 처음부터 그러한 형태를 가진 것도 아니다. 1896년 11월 26일 독립문을 세울 때 윤치호 선생 작사의 애국가가 불렸다. 이는 1907년 찬미가라는 책에 다시 고쳐져 실렸다. 더구나 곡조는 창가곡에 맞추어 부르기도 했고 아일랜드의 민요 '올드 랭사인(auld langsyne: 이별의 노래)' 곡에 맞춰 일제 강점기까지 불려졌다. 현재의 가사는 윤치호, 민영환, 안창호 선생이 만들었다는 말이 있지만 확실하지 않는 것이 보통 상식이다. 현재 애국가의 곡은 안익태 선생이 1936년 작곡한 것이다.
요컨대 애국가 자체가 처음부터 확고하게 정해진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끊임없이 바뀔 수 있다. 그것은 시대적 맥락과 국가적 여건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당연히 제도적 권력이나 정치적인 힘에 따라 바뀌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는 대한민국을 이루는 구성원들의 마음을 반영해서 이루어질 문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양한 실험이나 시도가 필요하다. 록 버전뿐만 아니라 다양한 버전의 곡이 나올 필요가 있다. 다양한 시도가 없어 문제인 것이다.
제도 교육의 시작은 국기에 대한 경례와 애국가 제창에서 비롯된다. 이 때문에 제도교육을 거친 사람이 애국가를 모를 수는 없다. 이 때문에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상징이자 증거로 작용한다. 무엇보다 엄숙과 비장의 정도가 애국의 척도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사회와 세대는 변했다.
"태극기는 자유롭게 사용하는데 애국가는 왜 안 되는가"라는 물음이 단적으로 함축하고 있다. 물론 태극기를 몸에 휘감고 거리에 나온 이들은 이름 없는 이 땅의 수많은 사람들이었다. 다만 이번에 록 버전을 부른 이는 윤도현 밴드이고 그를 도운 기획사 사람들이다. 하지만 판단은 그것을 대하는 사람들이 할 것이다.
더구나 록 버전을 무료로 제공하기 때문에 상업적 목적에 대한 의구심을 씻으려 하고 있다. 물론 대기업 광고로 제작되어 공중파 방송을 이미 장식하고 있으니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닌 듯싶다. 여전히 상업성의 중심에 있기는 하다.
처음부터 애국가는 응원가로 불가하다고 여기는 이들이 많다는 설정은 가공의 것인지 모른다. 이 땅의 사람들이 그렇게 퇴행적인 마음에 갇혀 있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상업적으로 이용되는 것이 아닌가 싶은 우려의 마음이 일부 거부감으로 나타날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응원가로 애국가 밖에 없냐는 점이다. 그것이 더 논쟁점이 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아리랑>은 록 버전이라 해도 남북한 사람이 모두 따라 부를 수 있다. 조선족이나 조선적을 가진 사람도 부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조선적을 가진 이들, 조선족이나 북한 주민이 응원가인 애국가를 흥얼거리기에는 거부감이 있을 수밖에 없다. <오! 필승 코리아>도 남한 북한은 모두 코리아의 범주에 들어가니 가능하다. 그러나 애국가는 다른 문제인 것이다.
비단 이는 다가오는 월드컵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특히 <아리랑>을 잇는 보편적 응원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이는 응원가에만 해당하는 것도 아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붉은악마'는 대한민국만 응원하는 조직이 되었다. '붉은악마'는 대한민국을 중심으로 한 한민족만을 중심에 두고 있다. 이는 편협할 수 있다. '붉은악마'가 대한민국만 응원하지 말고 북한 선수, 조총련 출신 선수도 전 한민족과 남북화해의 차원에서 응원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을 지향하는데 논의가 모아져야 한다.
요컨대, 과거 세대와 달리 정체성으로서 태극기를 받아들이는 세대에게 작용하는 우익적 관점이 더 강한 신국가주의의 '대한민국 도그마'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애국가의 응원가 논란에서 고민점은 여기에 있어야 한다.
민족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 함몰되자는 이야기도 아니다. 좀 더 보편성과 일반성을 확보하여 외연을 넓히는 응원가를 마련하자는 것이다. 우선 태극기를 두르고 록 버전의 애국가 응원가를 부를 때, 편협한 국가주의에 갇히는 것은 아닌지 그것에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덧붙이는 글 | <데일리서프라이즈>에도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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