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연기자와 작가간의 즉석회의를 통해 현장에서 대본수정이 이뤄지는 등 더 큰 웃음을 낳기 위한 피말리는 작업은 녹화직전까지 이뤄진다.
연기자와 작가간의 즉석회의를 통해 현장에서 대본수정이 이뤄지는 등 더 큰 웃음을 낳기 위한 피말리는 작업은 녹화직전까지 이뤄진다. ⓒ 우먼타임스
“연습했을 때보다 춤이 너무 약하다. 동작을 더 크게 하는 게 어떨까?”
“이 장면에서는 남자들만 춤을 추는 것보다 잠깐 등장하는 여자들도 같이 춤을 추는 게 더 재미있을 거 같아. 다시 해보자.”
“대본이랑 다르게 나가니까 처음에 그렸던 그림이랑 좀 다르잖아.”

지난 14일 KBS 2TV <개그사냥> 최종 리허설 현장. 세 차례의 회의에 리허설을 두 번이나 했지만 최종 녹화를 앞두고 작가들과 연기자, PD와의 논의는 계속된다.

더 큰 웃음, 더 많은 웃음을 낳기 위해 녹화 직전까지 대본 수정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대본 수정이 잦기 때문에 소품, 의상, 음악 등을 수시로 챙겨야하는 작가들의 발걸음도 빨라진다. 웃음을 낳기 위해 대본 작성뿐 아니라 녹화가 완료될 때까지 늘 동분서주하는 이들이 바로 코미디계의 싱글맘이라 불리는 ‘여성 코미디작가’다.

코미디작가는 PD와 코미디언과의 연속 기획회의에서 여러 가지 아이템을 토론하고 PD의 의도를 충분히 읽은 후 수렴된 의견과 취재한 내용을 가지고 창작에 임하게 된다. 물론 작가라 국문과 출신들이 많지만 전공에 상관없이 잘 웃고, 웃는 것을 좋아하는 이들이 코미디 작가가 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여성 코미디작가들은 개그우먼들이 개그맨의 보조역할에서 벗어나 개그 주체로 활약하고 있는 것과 같이 개그계에서 점점 입지를 굳혀가고 있다. 한 코미디 프로를 보통 4~5명의 작가가 맡고 있고, 규모가 큰 코너의 경우에는 7~8명이 활동하고 있는데 이중 메인작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여성들이다.

여성작가들의 강점은 다른 장르보다 코미디에서 발휘된다. 소품, 의상, 음악담당 등이 따로 배치되어 있는 드라마 등 다른 장르와 달리 코미디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관련된 모든 것을 작가들이 책임지고 있어 여성들의 섬세함을 십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쟁프로그램 내용분석, 소품, 대본, 의상, 조명, 음악 등을 모두 챙기고 있어 프로 전체에서 여성들의 세심함과 섬세함이 묻어난다는 것이 제작자, 연기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이민호 한국방송 예능팀 PD는 “주로 메인을 맡고 있는 남자작가들이 큰 그림을 그린다면 그림을 꼼꼼하게 채워가는 것이 여성작가들이 몫”이라며 “그만큼 섬세하고 구체적인 작업을 여작가들이 잘 맡아서 진행하고 있고 친화력도 높아 일반인들을 섭외하는 데 별 어려움이 없다”고 귀띔했다.

방송인 김미화씨 역시 “코미디는 작가와 연기자들의 공동 작업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코미디의 맛을 살리는 작가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며 “여성작가들은 연기자들의 성격, 말투, 호흡 등 구체적인 것을 파악해 대본에 반영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설명했다.

여성작가들의 또 다른 강점은 여성연기자가 메인 역할을 맡아 여성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에 있다. 코미디 프로가 ‘여성을 대상화하고 웃음소재로 삼을 뿐만 아니라 주변에만 머무는 경우가 많다’는 지적에 대해 여성작가들은 “여성이 태생적으로나 환경적으로 남성에 비해 억압받아 온 것은 코미디에서도 드러난다”며 “거친 말이나 센 표현을 개그맨들이 했을 때는 웃음이 나올 수 있어도 개그우먼들이 했을 때는 편견을 가지고 본다”고 입을 모았다.

이지창 <개그사냥> 작가는 “더 발전적인 여성관련 개그를 위해서는 여성작가들과 개그우먼들이 자신을 감출 게 아니라 여성관련 소재들을 개그를 통해 이야기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웃음 뒤에는 언제나 눈물이 있는 법, 여성작가들이 겪는 고충 역시 적지 않다. 계속 아이디어를 만들어내야 하는 작가로서의 고충뿐 아니라 ‘프리랜서’이기 때문에 겪는 불안이 우선 크다. 대부분 제작자들에게 선택받아 프로를 맡고 있는 프리랜서이기 때문에 ‘살아남아야 하는’ 부담이 있는 것. 또한 코미디는 다른 장르와 달리 작가, PD, 연기자의 3박자가 완벽히 이뤄질 때 최상의 웃음을 낳을 수 있기 때문에 가족보다 친밀한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역시 작가들의 고충 중 하나다.

그러나 여성 개그작가들은 그들의 가장 큰 힘인 ‘웃음과 긍정적인 사고’로 고충을 이겨낸다. 그들은 ‘웃음을 낳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싱글맘들이기 때문이다. 웃음이 많아질수록 눈물도 많아진다고 고백하는 그녀들의 눈빛에는 남녀노소 구분 없이 웃을 수 있는 휴머니즘 코미디가 녹아 있었다.

여성코미디작가 그녀들의 일상은

여성 개그작가들은 일상 속에서도 재치 있는 센스를 발휘한다. 지난주 녹화일인 14일, 밸런타인데이라 초콜릿을 준비해 온 한 여성코미디작가. 그런데 웬 약봉지를 꺼낸다. 약봉지에는 초콜릿을 받을 남자동료들 이름이 환자명으로 적혀 있고, 효능·효과란에는 ‘매일 지각하고 거울 보는 작가들로 인해 뒷골 당길 때 복용’이라고 쓰여 있다. 또한 약 봉투마다 ‘시청률 급상승으로 당황스러울 때’ ‘자주 거울 보는 모 작가 때문에 기막힐 때’ 등 여러 상황이 적혀 있다.

KBS 2TV <개그사냥> 여성작가들은 “사실 개그작가 중에는 노처녀가 많다”며 우스갯소리를 전했는데, 그 이유가 소개팅 자리에서의 어색한 분위기를 스스로 못 이겨 상대방 남자로부터 웃음을 낳기 때문이란다. 대개 남성들은 웃기는 여자보다 웃어주는 여자를 좋아하는 법. 작업이 제대로 되지 않는단다.

코미디 프로를 만드는 직업이다 보니 곳곳에서 ‘코미디언’ 역할을 해주었으면 하는 기대도 크다. 집안에 웃어른들이 왔을 때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기 위해 계속 말을 하라고 시킨다거나,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도 언제나 웃음을 자아내는 역할을 부여받는다. 여성작가들은 “우리가 언제나 웃길 것이라는 것은 편견”이라고 입을 모으지만, 실제 그들이 가는 곳은 어디나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웃음소리 가득한 그녀들의 일상은 계속 생산해내야 하는 아이디어 충전의 원천이다.

"악! 소리 날만큼 바빠도 일 즐겁죠"
코미디 작가 1년차 서진영씨의 하루

▲ 코미디작가들은 대본 챙기랴 리허설 준비하랴 하루 하루 숨가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사진은 서진영작가(사진 오른쪽)가 동료들과 의견을 나누는 모습.
ⓒ노민규 기자
아침 8시, 어제 맞춰놓은 8개의 알람소리를 하나도 못 들었다. 화장은커녕 모자를 눌러쓰고 집을 나서 겨우 회의 직전에야 방송국에 도착. ‘일찍 다녀라’는 PD의 목소리가 벌써 들리는 듯하다. ‘아, 지각하지 말아야지.’ 도착하자마자 오늘 있을 방송에 필요한 자막 내용을 무대감독과 컴퓨터그래픽 담당자들에게 메일로 보내고, 사전심의를 위해 대본을 심의위원들에게 보낸다.

본격적인 업무는 이제부터. 바로 대본 정리에 들어간다. 최종 리허설이 있을 1시30분까지는 약 2시간이 남았다. 금요일에 있었던 1차 리허설 때 바뀐 내용이 제대로 고쳐졌는지 확인도 하고, PD와 선배작가, 음악감독이 보기 편하게 지문, 음악효과 등이 제대로 표현됐는지도 체크한다. 어제 해야 할 일이었는데 너무 피곤해서 잠들어버렸다. 시간이 너무 없다. 정신없이 체크하고 있는데 선배작가가 도착했다. 우선 정리가 다 안 된 대본을 같이 손봐준 선배가 최종 확인까지 해주고 난 후, 인쇄에 들어간다.

2~3장 분량의 대본을 팀당 7부씩 인쇄해야 한다. 오늘은 리허설 팀이 많아 23팀이나 되므로 무려 300장이 넘는 대본을 프린트하고 회의를 위해 스테이플러를 찍어댄다. 영화 ‘광식이동생 광태’에서 이요원은 사람이 한 통의 스테이플러 큰 통을 평생 다 못쓰고 죽을 거라 했는데 난 일하는 1년 가까이 족히 두 통은 썼을 것이다.

프린트한 대본 정리를 마치고 나니 벌써 정오다. “오디션 준비 다 했냐?” 선배작가의 질문에 ‘아차!’ 싶다. 참가자들의 원서를 정리해서 인쇄하고 심사표를 만드는 일을 깜빡하고 있었다. 사전 연락 없이 찾아오는 참가자들 여분 원서까지 모두 챙겨놓는다.

오후 3시. 최종 리허설 중이다. 팀별로 대본을 가지고 연기를 마지막 체크하고 있으며 작가들과 회의를 거쳐 최종 녹화 내용과 팀을 결정한다. 녹화에 들어갈 팀이 결정되고 나면 팀별로 필요한 의상과 소품, 음악을 모두 챙겨줘야 한다. 제대로 소통이 되지 않아 전혀 다른 컨셉트의 의상이 오는 일이 없도록 최대한 자세히 팀 내용과 의상, 소품에 대해 설명한다.

리허설이 예정보다 늦게 끝나 4시30분부터 오디션이 시작됐다. 예상보다 참가자들이 적다. 통화했던 사람 중 안 온 사람도 있고 아직 도착하지 않은 사람도 있다.

오디션 참가자 섭외도 내게는 중요한 업무인데 사람들이 적게 오면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 자책감이 든다. 이번 주에는 섭외전화에 박차를 더욱 가해야지, 결심을 한다.

이제부터 내일 녹화에 필요한 음악 CD들을 찾아야 한다. 쇼팽이라고 치니 수만 개의 음반이 나오는데 이 중 무엇을 써야 하지? 영화 ‘왕의남자’ 음반이 필요한데 모두 대출중이라니. 지난번 캉캉춤에 쓰이는 노래는 이 둘 중 하나였는데 뭐였더라? 정신없이 음악을 들으며 체크하는 와중에도 조금씩 상식이 늘어나는 것 같아 기쁘다. 음악 감독님이 7시 전까지 모두 보내라고 한다. 빨리 서두르자.

앗! 그러고 보니 프로그램 심사위원들에게 녹화확인 문자를 안 보냈다. 간단히 저녁을 때우고 소품실이 닫기 전에 의상, 소품을 최종 확인한다. 이것 좀 추가해도 될까요? 이건 변경됐는데요. 뒤늦게 걸려온 참가자들의 전화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 아, 무대감독의 무서운 호령소리가 벌써 들린다.

10시에 퇴근해 집에 왔는데도 소품 추가 전화가 계속 온다. 마음이 조급해져 대본을 다시 읽다보니 새벽 1시다. 내일은 지각하지 않는 나를 꿈꾸며 알람을 10개 맞춰놓는다. 아니 혹시 모르니 동생 핸드폰도 뺏어서 알람을 맞춰놔야겠다. 내일 녹화에서는 어떤 일이 있을까?

댓글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