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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즈워스는 '3월의 시'에서 만물이 약동하는 봄날의 정경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수탉은 꼬끼오 / 시냇물은 졸졸 / 작은 새들은 짹짹 / 호수는 번쩍번쩍 / 푸른 들판은 햇볕에 조을고." "패한 군사들처럼 / 흰눈은 물러가고 / 헐벗은 언덕 위에서 쩔쩔매네."
그러고 보니 주위를 둘러보면 군데군데 잔설이 패잔병처럼 얼어붙어 있고, 아스라이 꼬끼오 졸졸 짹짹 소리가 귓가를 간질이는 것만 같다.
로버트 브라우닝도 '때는 봄'이란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때는 봄 / 봄날 아침 / 아침 일곱시 / 언덕에는 진주 이슬 / 종달새 높이 날고 / 달팽이 가시나무에 오르고 /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 세상만사가 태평하구나."
바야흐로 삼라만상에 깃든 원초적 생명이 기지개를 켜는 봄, 눈길 닿는 모든 풍경이 시정(詩情)을 자아내는 봄, 꽃 피고 새 우는 봄이 성장(盛裝)한 여인처럼 입춘의 문턱을 넘어 성큼성큼 걸어오는 것만 같다. 봄은 이처럼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 동서고금 시인들의 시심(詩心)이 꽃처럼 피어나는 계절이다.
한편 나쓰메 소세키는 몽환에 빠져 게으름을 피우는 고양이의 모습에서 봄의 속성을 포착한다.
"봄은 졸린 시절이다. 고양이는 쥐 잡는 것을 잊고, 사람은 갚을 빚이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다. 때론 자기 넋이 어디 있는지조차 잊어버리고 제정신을 못 차린다. 다만 유채꽃을 멀리 바라보았을 때에 잠이 깬다. 종달새 소리를 들었을 때에 넋이 어디 있었는지를 깨닫는다. 종달새가 우는 것은 입으로 우는 게 아니라, 넋 전체가 우는 것이다. 넋의 활동이 소리로 나타난 것 중 저만큼 기운찬 것은 없다." (나쓰메 소세키, 수필 '풀베개')
몽환에 빠진 고양이처럼 아늑하고 포근하고 평화로운 이미지가 또 있을까? 그러고 보면 고양이는 봄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심심찮게 등장한다. 이장희의 시 '봄은 고양이로다'가 그렇고, 김정한의 단편소설 '옥심이'에는 "봄은 고양이처럼 옥심의 귀천 없는 마음속에도 기어들었다"라는 구절이 보인다.
찬란한 슬픔의 봄
괴테 역시 파우스트의 입을 빌어 해빙(解氷)과 생성, 희망의 봄을 예찬했다.
"생명을 불러일으키는 봄의 정다운 눈길을 만나, 크고 작은 강이 얼음에서 해방되었다. 골짜기에는 희망에 찬 행복이 파랗게 돋아난다. 겨울은 늙어 쇠약해져서, 황량한 산으로 물러갔다. 물러가면서 겨울은, 싸락눈의 힘없는 소나기를 흩날려 파릇파릇해지는 들에 백색의 줄무늬를 그으려 한다. 그러나 태양은 이제 흰 빛이 남는 것을 허용치 않는다. 곳곳에 생성의 노력이 진행되고, 모든 것이 화려하게 활기를 띠어 간다. (...) 늙은이도 젊은이도 만족하여 환성을 지른다. '여기에서는 나도 인간이다. 아름다울 수 있다!'고."(괴테, '파우스트')
파우스트, 아니 괴테에게 있어서 봄은 인간이 진정으로 인간답고 아름다울 수 있는 원형(原型)의 계절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파우스트의 봄은 칼날 같은 현실 위에 위태하게 자리 잡은 이상에 불과하다. 그래서 김억의 '봄은 간다',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 같은 시를 입안 가득 베어 물고 음미하면 찬란한 봄을 여읜 파우스트의 절망과 고뇌가 알알이 씹히는 것만 같다.
게다가 해가 지날수록 봄의 수명은 점점 더 짧아져 이대로 가다간 미구에 워즈워스나 브라우닝의 찬가는 자취를 감추고 김영랑이 노래한 '찬란한 슬픔의 봄'만 남는 건 아닐까 하는 기우마저 생긴다. 그래서일까 "봄은 나를 향해 백지처럼 무시무시한 웃음을 웃었다"(랭보, '서시')던 랭보의 뜻 모를 한마디가 머릿속에서 상상의 날개를 편다. 하긴 시인에게 있어서 백지는 깃털처럼 가볍다가도 순식간에 시지프스의 어깨를 짓누르는 바윗덩이로 화(化)하지 않는가?
정겨운 우리의 봄
우리 조상들의 춘흥(春興) 또한 각별했다. 봄빛으로 충일한 산천초목을 완상하는 정극인과 이규보의 붓 끝엔 필화(筆花)가 만발하고, 김영랑과 노천명의 절창은 애틋한 춘심을 자아낸다.
"엊그제 겨울이 지나 새봄이 돌아오니, 복숭아꽃과 살구꽃은 저녁 햇빛 속에 피어 있고, 푸른 버들과 아름다운 풀은 가랑비 속에 푸르도다. 칼로 재단해 내었는가? 붓으로 그려 내었는가? 조물주의 신비스러운 솜씨가 사물마다 야단스럽구나! (...) 안개와 놀과 빛나는 햇살은 아름다운 비단을 펼쳐 놓은 듯. 엊그제까지도 거뭇거뭇했던 들판이 이제 봄빛이 넘치는구나."(정극인, '상춘곡')
"이 산 저 산에 피어 있는 꽃은 비단결 같은데, 숲이 푸르고 푸르러 한데 아롱졌다. 언덕 위의 풀은 기름을 끼얹은 듯한데, 송아지는 뒹굴고, 아리따운 아가씨들은 광주리를 끼고 뽕잎을 딴다. 뽕잎 따는 그 손이 구슬 같거늘, 주고받는 그 노래는 어느 악보의 무슨 곡인가. 길을 걷는 사람도, 집에 앉아 있는 사람도, 가는 사람 오는 사람도 모두 봄빛에 물들어 그 기운이 화창하기만 하다. (...) 여름을 바라보자면 더위에 짜증이 나고, 가을은 너무나도 쓸쓸하고, 겨울은 착착 막히어 봄에 비하면 지나치게 일방적이지만, 오직 봄만은 때에 따라 곳에 따라 화창해지기도 하고 슬퍼지기도 하며, 저절로 노래가 나오기도 하고 눈물이 흐르기도 하여, 사람마다 그 감정이 천 가지 만 가지로 변한다."(이규보, '춘망부')
이처럼 봄을 맞는 기쁨과 설렘은 동서고금을 막론한 인지상정이다. 혹자는 인간이 봄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는 것은 태양의 자손이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그보다는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가는 인간의 본성이 자연을 거스르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이제 몇 번이나 더 봄을 맞이할 수 있을까. 낙천적인 기질의 사람은 열 번이나 스무 번이라고 할 것이다. 나는 겸손히 대여 섯 번쯤 기대해보자. 그것만 해도 퍽 많은 셈이다. 대여섯 번이라고 하더라도 그 봄철을 즐겁게 맞이하여, 미나리아재비의 첫순이 돋아날 때부터 장미꽃이 봉오리질 때까지 정답게 바라볼 수 있다면, 그 혜택이 부족하다고 누가 감히 말하겠는가. 대지가 옷을 갈아입는 기적, 인간의 입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광경이 앞으로 다섯 번이나 여섯 번 내 눈 앞에 나타나는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면 내가 너무 욕심을 부리는 것이나 아닐까 하고 두려워지기까지 한다."(기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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