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보통사람들이 느끼기에 '철학'과 '모험'은 잘 어울리는 한 쌍이 아니다. 아니 너무나 달라서 서로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하는 편이 오히려 더 나을 것이다. '철학'이라는 단어가 흔히 거느리는 형용사들―이를테면 '따분한', '심각한', '난해한' 등―을 생각해 보면 이는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사실이다. 흥미진진하고 경쾌하고 매혹이 넘치는 '모험'과 동행하기에는 '철학'은 너무 고리타분하고 무겁고 골치가 아픈 상대이다.
보통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이러한 철학에 대한 부정적인 판단은 일차적으로는 철학자들이 사용하는 개념과 논지가 지나치게 관념적이고 복잡해서 일반인들은 이해하기가 몹시 어렵다는 점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철학을 강의하는 교수나 철학을 소개하는 책 저자들의 안일하고 구태의연한 설명 방식도 한몫 거들고 있다고 여겨진다.
지나칠 정도로 명민한 지식인인 이진경이 이를 그냥 지나칠 리가 없다. 보통사람들이 철학에 접근하는 것을 방해하는 이러한 어려움에 대한 오랜 고민 끝에 그가 내놓은 책이 바로 <철학의 모험>이다. 이 책을 읽는 독자가 무겁고 난해한 '철학'을 경쾌하고 흥미진진한 '모험'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저자는 두 가지 전략을 쓰고 있다.
그 하나는 철학자들의 난해한 개념과 복잡한 논지를 날것 그대로 들이미는 대신에 소화하기 쉽게 적절하게 가공 처리하는 것이다. 흥미로운 허구적 상황의 설정, 잘 알려진 비유나 우화의 도입, 대중적인 영화나 동화의 스토리 차용 등이 바로 그러한 가공처리 기법이다.
예컨대 서구 근대철학의 시조인 데카르트의 철학에 있어서 '주체'의 문제를 검토하고 있는 이 책의 제1부는, 각기 다른 시대의 인물인 장자, 데카르트와 스피노자 그리고 사르트르가 한꺼번에 염라국의 검찰청으로 소환되어 토론을 벌인다는 설정으로 시작되고 있다. 이러한 재미난 상황 설정에 힘입어, 장자의 유명한 호접몽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전개되는 그들의 철학적 토론은 조금도 지루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매우 쉽게 이해가 된다.
또한 데카르트의 이성주의에 반발해 시작된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을 검토하고 있는 제2부에서는 아예 고대 그리스의 유명한 우화작가인 이솝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키고 있다. 17세기 영국에서 다시 태어난 이솝은 자신의 오랜 꿈인 '우화철학'을 정립하기 위하여 당대의 유명한 경험주의 철학자들을 차례로 찾아다니며 우화와 비유로써 논쟁을 벌인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널리 알려진 우화나 비유가 순식간에 깊은 철학적 의미를 지닌 담론으로 바뀌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이외에도 칸트의 철학 개념인 '선험적 인식'을 설명하기 위해서 동화 <백설공주>를, 헤겔의 '목적'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영화 <터미네이터>를 차용하는 등 철학을 보다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한 저자의 기발하고 독특한 가공처리 기법은 이 책의 곳곳에서 빛나고 있다.
저자가 사용하고 있는 또 하나의 전략은 논쟁과 대화체 형식이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제외한 책의 본문 전체가 철학자들과 논쟁하고 대화를 주고받은 내용으로 채워져 있는 것이다. 철학의 기원이 되고 있는 고대 그리스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공부하는 방식이 서로 논쟁하고 스승과 제자간에 문답을 주고받는 식으로 진행되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철학 책을 쓰는 데 있어서 이러한 기술 방식이 갖는 의미를 결코 무시할 수 없으리라.
무미건조한 서술식으로 철학적 개념과 논지를 나열하는 기존의 철학입문서와는 다른 이러한 방식에 힘입어 우리는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얽힌 정교한 철학적 논의의 가닥을 한 올 한 올 풀어나갈 수 있게 된다. 아무리 복잡한 문제라도 충분한 논쟁과 대화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하나하나 차근차근 풀어나갈 수 있음을 우리는 삶의 경험을 통하여 잘 알고 있다.
다소 까다롭게 여겨지는 칸트 이후의 독일 철학을 다루고 있는 이 책의 제3부가 비교적 쉽게 이해되는 것도 바로 이러한 논쟁과 대화체 덕분으로 여겨진다. 물론 여기서의 논쟁은 제1부에서처럼 철학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직접 주고받는 논쟁이 아니라 칸트, 헤겔, 포이어바흐, 마르크스를 차례로 방문하는 가상의 인물에 의해서 매개되는 논쟁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가 철학자들과 주고받는 대화를 통해서 이 네 철학자들이 어느 지점에서 서로 갈라지는지를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고, 독일 철학의 복잡한 지도를 비교적 선명하게 그려낼 수 있게 된다.
근대철학을 매듭짓고 현대철학을 향해 길을 연 선구자들을 다루고 있는 제4부는 스티븐슨의 유명한 소설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의 이야기를 골격으로 하여 '과연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묻고 있는데, 철학을 배우는 데 있어서 논쟁과 대화체의 이점이 보다 선명하고 확실하게 드러나고 있다.
지킬 박사가 죽기 전에 그의 비밀을 알게 된 친구 어타슨 변호사가 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하기 위해 훗설과 프로이트 및 니체를 찾아가 자문을 구한다는 내용인데, 각기 다른 조언을 해주고 있는 세 철학자들의 대답에서 그들의 철학이 아주 선명하게 구분되고 있음을 우리는 보게 된다. 만약 이들 세 철학자들의 사상을 그냥 서술적으로 기술했다면 아마도 이렇게 분명한 그림을 얻지 못했을 터이고, 세 철학자들이 서로 연관되는 지점과 갈라지는 지점을 파악하기도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 <철학의 모험>이 최종적으로 다다르고자 하는 지점은 이렇게 데카르트 이후 현대에 이르는 대표적인 철학자들의 개념과 사상과 논지에 대한 분명하고도 명확한 이해에 있지 않다. 저자는 철학에 관한 책에서 배워야 할 핵심은 '철학하기'이며, 그것은 '자명한 것을 의심하고 당연시된 것에 질문을 던짐으로써 그것에 대해 자기 머리로 사고하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선언하게 있다. 아니 사고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실천으로까지 나아가야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철학하기', 그것은 일단 당연시된 세계, 자명한 판단에 의문을 던지는 데서 시작한다. 의심하고 비판하는 활동은 단지 사고하는 것에 머물지 않으며 오히려 철저하게 나아가며 실천되어야 한다. 요컨대 '철학하기'는 자명한 것을 의심하고 질문하는 특수한 실천이다. (391쪽, 에필로그 '이 책의 주장을 의심하자')
이렇게 될 때, 관념 속에만 머물러 있던 '철학'은 비로소 우리의 머리 속에서 뛰쳐나와 현실 속으로, 세계 속으로 흥미진진한 '모험'을 떠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 <철학의 모험>은 모험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이 책을 다 읽고 난 독자라면 그 누구라도 자기 자신만의 '철학의 모험'을 떠나고 싶게 되기 때문이다.
3.
이제 3월이 되었으니, 인생의 황금시절을 향하여 달려가는 대학 신입생들의 가슴이 부풀대로 부풀었겠다. 입시를 준비하던 그 길고 길었던 시기가 다 지나갔으니 이제 얼마나 자유로우랴! 이제 지겨운 공부는 굿바이다! 나도 그런 심정으로 대학생이 되어 대학 시절 내내 이른바 '먹고 대학생'으로 지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뒤에 뒤돌아보니, 그 당시에 적어도 철학만큼은 제대로 공부해두었으면 좋았을 걸 하는 후회가 밀려든다. 그랬으면 내 삶의 방향과 자세를 보다 올바르게 세울 수 있었을 터이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도 보다 날카롭고 분명해졌으리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대학 신입생들이여, 술 마시고 연애하는 것도 좋지만 그와 동시에 철학도 함께 공부하기를. 그대 인생의 모험을 찾아 나서는 길에 <철학의 모험>도 함께 챙겨서 떠나기를.
덧붙이는 글 | <철학의 모험>
ㅇ이진경 지음
ㅇ도서출판 푸른숲 펴냄
ㅇ2000년 7월 31일 첫판 1쇄
ㅇ정가 12,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