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국(破局)은 진실을 드러낸다. 애인을 떠나보내는 마지막 순간에는 가슴에 담아 둔 사랑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다. 원수와 마주친 결정적 순간에는 뼛속 사무치는 증오가 폭발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파국은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3일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대신이 참의원 결산위원회 답변에서 "한반도 통일은 한국과 북한의 비원(悲願)이지만, 남북한이 곧 통일되는 것은 좋지 않다"며 속마음을 드러낸 것은, 현존 동북아질서가 이제 그 파국에 근접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파국이 다가옴에 따라, 주변 강대국들의 속마음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그 점은 우리도 마찬가지다. 북한은 미국에게 '대담한 도전'을 벌이며 통일전략을 한걸음씩 밟아 나가고 있다. 한국도 예전처럼 미국에 고분고분하지만은 않다. 한국 역시 나름대로 '살 길'을 모색하고 있다.
파국 임박, 각국의 속마음 드러나기 시작
일부 한국인들은 "한국이 통일을 이룩하고 부강해지려면, 주변 4강의 역학관계를 활용하고 외교를 잘해야 한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문제의 본질은 그것이 아니다. 문제의 본질은, 우리의 역량이 주변 4강에 비해 분명히 떨어진다는 점에 있는 것이다.
남을 이용해서 나의 목적을 달성하려면, 나와 남의 능력 차이가 크지 않거나 혹은 내가 남보다 월등히 유능해야 한다. 나보다 훨씬 강한 사람을 이용해서 나의 목적을 달성한다는 것은 가당치도 않는 말이다. 한국이 주변 4강을 이용해서 통일을 이룩하고 부강해질 수 있다는 발상 역시 그와 똑같은 것이다.
남을 이용한다는 것 자체가 바람직한 일은 아니지만, 아무튼 남을 이용하는 단계에 도달할 수 있으려면 사회통합과 민족통일 등의 방법으로 민족 역량을 강화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약자가 강자를 이용? 천부당만부당
약자가 강자를 이용해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 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하고 어리석은 일인가는 19세기말 우리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뼈저리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1876년 개항 이후로 조선 내부에서는 주변 열강 사이의 역학관계를 이용해서 국권을 유지하자는 논의가 상당한 힘을 얻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이제 막 국제무대에 첫발을 내디딘 조선이 '노련한' 서양열강을 이용하여 국권을 유지해 보려 하였던 것이다. 물론 그런 시도를 할 수밖에 없었던 조선왕조의 지도부에게도 나름대로의 '변명'이 있을 수 있겠지만, 역사에 대한 책임은 어디까지나 결과에 대한 책임일 뿐이다.
아래에서 소개하는 몇 가지 사례를 통해 잘 알 수 있듯이, 당시의 조선정부는 외세를 이용해 보려 했지만, 외세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우리 민족을 기만하고 배신할 뿐이었다. 19세기말에 외세가 우리 민족을 기만하고 배신한 사례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이번 글에서는 각 국가별로 한 가지씩만 소개하기로 한다.
청나라, 미국의 실체 알고도 조선에게는 '좋은 나라'라고 소개
1879년 7월 4일(음력) 광서제(11대 황제)의 칙지 이후 청나라는 조선을 자국의 정치적 영향권 하에 두기 위한 '공작'에 들어갔다. 그 이전까지의 한중관계가 일반적인 상식과는 달리 상호 자율적인 관계였음은 이미 역사학계에서도 통설로 인정되고 있으며, 필자가 2004년 8월 이후 <오마이뉴스>와 월간 <말> 등을 통해 여러 차례 소개한 적이 있으므로 여기서는 자세히 논의하지 않기로 한다. 아무튼 이때부터 청나라는 한중관계를 질적으로 바꾸는 새로운 시도를 시작한다.
조선을 자국의 영향권 하에 두어 러시아·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청나라는 미국을 조선에 끌어들일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조선은 이미 신미양요(1871년) 등을 겪은 바 있기 때문에 미국을 쉽사리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청나라는, 1880년 제2차 수신사 김홍집이 일본을 방문하자, 이 틈을 놓치지 않고 김홍집 설득을 목표로 외교적 총공세를 펼쳤다. 특히 일본 주재 청나라 참찬관인 황쭌센(황준헌)은 <조선책략>이라는 급조된 논문을 김홍집에게 선물하면서 김홍집의 인식을 바꾸려 하였다.
그런데 <조선책략>에 보면 미국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청나라 외교관인 황쭌센은 이 책에서 미국의 좋은 점들을 장황하게 열거하면서 "미국은 언제나 정의를 숭상하는 나라"라고 치켜세웠다.
이러한 청나라의 설득이 주효해서, 조선정부는 결국 청나라의 중재를 받아들여 미국과 수교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기회를 활용하여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였으며, 임오군란(1882년) 때에는 한중관계사상 최초로 내정간섭용 출병을 단행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청나라는 이미 아편전쟁(1840년) 이래로 서양열강의 본질을 '몸'으로 체험한 나라다. 그러니까 <조선책략>이 나오기 40년 전부터 청나라는 서양 제국주의의 침략성을 경험해 왔던 것이다. 미국 등 서양열강의 속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면서도, 중국은 자국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조선에게 "미국은 언제나 정의를 숭상하는 나라"라고 속였던 것이다. 조선이 국제사정에 어두운 나라라는 점을 십분 활용하였던 것이다.
그런 뒤에 청나라는 자국이 서양열강에게 당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1882년부터 조선을 침탈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이 청나라의 본질이고 외세의 본질이다.
미국, 청일전쟁 때 부탁받고도 나 몰라라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이래로 미국은 항상 조선을 '염려'하는 듯한 '말'을 했다. 그러나 말뿐이지 행동은 따르지 않았다. 말 그대로 '립서비스'였던 것이다.
1883년 미국의 아더 대통령은 초대 주한미국공사인 푸트 장군을 통해 조선에 보낸 서신에서, 조선이 혹여 청나라에게 휘둘리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표명하기도 하였다. 그런 미국이 청일전쟁(1894년) 직전에는 조선정부의 간곡한 요청에 대해 '나 몰라라' 식의 태도를 보였다.
당시 일본은 전쟁을 벌이기 전에 국제사회의 분위기를 면밀히 관찰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일본의 국력에 한계가 있었으므로, 국제사회가 일본과 청나라 중 어느 쪽을 지지하느냐 하는 것은 일본에게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그런데 당시 영국·러시아·미국·독일·프랑스·이탈리아 등은 한결같이 중립을 표명함으로써 사실상 일본을 지원하였고, 일본은 그 같은 분위기에 힘입어 조선 땅을 밟고 청나라를 물리칠 수 있었다.
당시 미국은 미국 주재 조선공사인 이승수로부터 3차례나 개입 요청을 받았다. 그런데 미국의 답변은 이런 것이었다. "미국은 엄정하고도 편파성 없이 중립을 유지한다" 1882년 국교 수립 이후 언제라도 조선을 도와 줄 것만 같았던 미국은 그렇게 결정적인 순간에는 조선을 배신하고 말았다.
일본, '순진한' 김옥균을 농락하다
1882년 이래 조선 무대에서 청나라에 주도권을 빼앗긴 일본은, 1884년 청나라가 베트남에서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는 틈을 활용하여 김옥균 측과의 공동 거사에 합의한다. 일본을 불신하는 김옥균의 마음을 사기 위해 일본 공사관측이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을 김옥균의 <갑신일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일본은 정변 직후에 태도를 바꾸었으며, 이는 정변의 실패를 초래하는 주요 요인이 되었다. 물론 일본을 믿은 김옥균도 문제였지만, 일본은 '순진한 청년' 김옥균을 이용해 조선을 마음대로 농락하였던 것이다.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일본은 얼른 청나라의 주도권을 재확인하고 몸을 낮추는 모습을 보였다. 1885년 텐진에서 체결된 중·일 간의 협약이 그것을 잘 반영한다.
러시아도 청일전쟁 때 겁먹고 나 몰라라
조러수호통상조약(1884년)과 2차례의 조러밀약설에서도 잘 드러나는 바와 같이, 조선은 청·일 양국을 견제해 줄 '구원투수'로 러시아를 의중에 두고 있었다. 러시아도 조선을 도와 줄 것처럼 행동했고 조선에게 그런 믿음을 주었다.
그렇지만, 러시아의 본질은 청일전쟁 때에 잘 드러났다. 청일전쟁 직전 조선정부가 러시아에게 중재를 요청하자, 일본 주재 러시아공사 히트로보는 일본 외무장관과 2차례 회동하여 일본의 조선 철병을 권고해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권고해 본 것'이었다. 별다른 힘이 실리지 않는 형식상의 '립서비스'였던 것이다.
일본이 굽힐 뜻을 보이지 않자, 러시아는 이내 발을 떼고 말았다. 그런 러시아의 태도가 일본의 개전을 부추기는 요인이 되었음은 앞서 설명한 바 있다.
지금까지 간략하게 설명한 바와 같이, 외세는 평소에 그들이 어떤 약속을 했건 간에 결정적 순간에는 늘 돌아서고 말았다. 우리가 강했다면 그들은 돌아서지 않았을 것이다. 하기는 우리가 강했다면 그들에게 의지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우리에게서 돌아선 것은 우리가 약하고 우리에게 얻을 게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남은 어디까지나 남
그처럼 외세는 어디까지나 외세요, 남은 어디까지나 남인 것이다. 그러므로 외세와 협력을 할 수는 있을지언정, 그것은 어디까지나 평상시일 뿐이다. 결정적 순간에 우리가 기댈 수 있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일 뿐이다. 남은 어디까지나 남이라는 사실은 고이즈미 총리의 발언에서도 잘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민족 역량의 강화 방안을 밖에서 구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외교는 '일부'가 되어야지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외교적 방법으로 민족의 생존을 도모하는 것은, 민족 내부의 역량이 최소한의 기본을 갖추었을 때에나 가능한 것이다. 내부에서 분출하는 힘이 외부에서 들어오는 힘보다 강하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당연한 말일 것이다.
그리고 민족 역량 강화의 첫 단추는 사회적 통합과 민족의 통일이다. 북한 말대로 '민족공조'를 하든지, 민족공조라는 표현이 '빨갱이' 같아서 싫다면 한국측 표현대로 '민족 대단결'을 해서라도, 내부의 역량을 한데 모으는 것만이 우리 민족의 생존 방법이 될 것이다.
우리가 외세를 완전히 믿을 수 없는 것은, 남은 어디까지나 남이기 때문이다. 좋든 싫든 간에 남과 북이 서로 믿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우리는 남남이 아니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뉴스 615>에도 동시에 실리는 글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