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신문이나 라디오에서 성추행 소식이 계속 나오면서 참 우울하다. 가해자에게 책임이 물어지기도 전에 피해자가 자살을 시도하거나 성추행 범죄를 두둔하는 발언들이 쏟아지고 있어 남자 된 사람으로 인류의 모성에게 머리를 들 수 가 없다.
성행위나 성 접촉에서 명백한 여성의 거부행위를 두고서도 성행위에 있어 신체적. 생리적 수동성에 불과한 여성의 내숭 정도로 치부하는 남성성의 만용에 할 말을 잃는다.
마치 이런 일을 예측이라도 한 듯이 두 여성작가가 나란히 여성주의 소설을 발표했다. 지난달에 발행된 계간 문예종합지 <창작과비평(이하 '창비')>에 실린 박완서의 <친절한 복희씨>와 김인숙의 <조동옥, 파비안느>이다.
한 달에 배달되어 오는 십 수권의 매체 중에서 창비만 유독 '책머리에'를 제일 먼저 읽는다. 두 번째로 읽은 것이 요즘 우리지역에서 초미의 관심사가 되어있는 새만금 관련 김석철 철 교수의 논문이고 세 번째가 바로 이 소설 두 편이다.
두 작품은 똑 같이 여성에게 강제된 비자발적 성관계가 문제의 출발점이 되고 있다. 이것이 주인공이 겪는 모든 고통과 인과관계가 있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 주요한 상관관계에 있음은 작품이 명백히 하고 있다.
<친절한 복희씨>의 주인공인 복희 할머니는 열아홉에 결혼하여 평생을 살아 온 영감에게 품은 미움과 증오는 오로지 강간에 가까운 첫 성관계에 뿌리를 두고 있다. 큰 상점의 사장과 그 집 식모로 만나 부부가 되어 손자손녀까지 두고 남부러울 것 없는 부유한 노년을 보내면서도 영감에게 할머니가 품고 있는 미움과 증오는 얼핏 보면 납득이 안 되는 부분이다.
오로지 사업과 아내에게만 전념하고 살아 온 남편의 단점이라면 욕심과 욕망과 일 뿐이라는 것이다. 집안의 부유함과 다섯 남매의 알뜰한 양육과 교육은 모두 남편의 그 '단점'에 힘입고 있었다.
이점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복희 할머니에게 남편은 평생을 거부할 수 없는 대상이면서도 동시에 용서할 수 없는 대상이었다.
대학 다니는 하숙생 앞에서 처음으로 사춘기 연정을 품게 되면서 "'몸'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황홀한 개안(開眼)"인지 모를 꿈에 부푼 열여덟 소녀 복희가 열두 살이나 많은 홀아비 사장에게 겁탈을 당하면서 "며칠 만에 '몸'이 있다는 게 이다지도 모멸스러워질 줄이야" 몰랐었다고 기억한다.
절대 용서 할 수 없다고 독하게 이를 갈며 사장의 체중에서 빠져 나온 복희는 다음해에 정식으로 혼례식을 올리고 주인집 안방살이를 시작했지만 남편이라는 남자에 대한 경멸과 거부는 평생을 갔다. 아내가 잠자리에서 교성을 요란하게 질러줘야 다음날 장사가 잘 된다는 믿음을 갖고 있는 남편은 독재자와 정복자의 여성관을 아내에게도 유감없이 내 보인다. 아무런 가책도 없고 가장으로서의 정당한 권리쯤으로 여기든지 나아가 남자의 자부심이 된다는 투다.
한번 다친 여성성이 제대로 된 치유의 과정이 없는 한 그 내상은 한 평생 내내 멍에가 된다는 것이 <조동옥, 파비안느>에서도 똑같이 드러나 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이름도 없다. 그저 '그녀'다. 열여섯에 원하지 않는 임신을 하게 되고 출산을 하는데 신약성경의 마리아와 같이 '성령으로 임신'한 것으로 믿는다.
그만큼 믿기지 않은 일이 있어 났다는 말일 터인데 작품을 다 읽도록 어디에도 누구와 어떻게 임신을 하게 되었는지는 한 줄도 없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된 열여섯 여성. 오로지 '그녀' 뿐이라는 강조 같다.
양지바른 담 벽에 앉아 사금파리로 땅을 헤집는 버릇이 생긴 '그녀'는 그래도 대학을 거쳐 묘지 연구가가 된다. 오랜 과거 속으로, 깊은 지하로 파고드는 '그녀'의 삶은 독자가 읽기에도 애처롭다. 만나는 남자는 다 헤어진다. 사랑도 나누고 결혼도 할 뻔 했지만 '그녀'는 혼자다.
'그녀'가 출산을 한 직후 이혼을 하게 된 어머니가 브라질 이민을 떠나버렸다. 16년 전의 일이다. 남자가 여성에게 저지르는 잘못을 미주알고주알 나열하는 것은 입만 아플 뿐 아무 의미도 없다는 뜻일까? 이혼은 아버지의 잘못이라고 했지만 아버지가 무슨 잘못을 어떻게 저질렀는지는 소설에 일언반구도 없다.
16년 만에 편지 한 통을 받는다. 브라질에서 온 편지다. 이제 막 열여섯 살이 된 '그녀'의 아기한테서 온 어머니의 부고장이었다. 부고장을 부친 '그녀'의 아기는 제 엄마인줄도 모르고 '그녀'에게 그녀 어머니의 16년 동안 브라질에서의 고된 삶을 편지에 담아 보냈고 '그녀'는 자기 어머니가 브라질 사람 '파비안느'가 되어 돌아왔음을 안다. 그녀는 편지를 땅 속 깊이 묻는다. 옛 조상들이 금석문자를 묻었듯이.
두 편의 소설은 에둘러서 호소하고 있다. 여성성에 대한 공격을 제발 멈춰 달라고.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 지 두 눈으로 똑똑히 좀 봐달라고. 평화와 공존과 상생을 얘기하면서도 저질러지는 여성성에 대한 공격과 파괴는 온 사회가 가담하고 있는 형국인데 그곳이 바로 한국이다.
박완서 소설의 특징은 세상 다 살은 사람의 관조와 체념이 물 흐르듯이 소설 전반에 깔린다는 점이다. 이런 문장을 유장하다고 하던가. 물은 아래로 흐른다는 뻔한 사실 속에서 새삼스런 각성을 얻는 기쁨이 있고 김인숙은 젊은 작가다운 치밀한 구성과 오묘한 복선이 소설의 재미를 더해준다.
한편, 쟁이가 되어버린 작가들의 글에서 발견하는 눈살 찌푸려지는 것은 부정확한 유희적 표현법들이다. '영감의 고막에 동정심을 보낸다'라든가 '손이 아름다운 여자와 눈이 깊은 남자' 등의 누추한 표현들이다.
또한, 현란한 한문체인데 '편지를 제대로 못 읽었을 수도 있다'고 하면 될 것을 굳이 '편지를 오독하지 않았다고 말 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라고 한다든가 '판석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하면 되는데 '판석이란 정보가 유의미 할 것은 없다'고 하는 식이다.
편집인 백낙청이 어느새 우리의 모든 학문과 예술영역에서 '분단상황'이 빠져있다고 제기했듯이 이번 호 창비에는 <6.15 시대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특집이 있고 별책으로 대산문학상작품집과 낭송시집이 시디로 제공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