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7일 서울시 산하 서울문화재단은 '월드컵 길거리 응원행사 민간 주관사'로 '붉은악마'를 비롯해 현대자동차·NHN으로 구성된 KTF 컨소시엄 대신, 조선일보·동아일보 등이 참여한 SK텔레콤 컨소시엄을 선정했다.
붉은악마가 확보한 국민적 대표성과 서울시청 앞이 갖는 상징성을 생각해 보았을 때, 붉은악마에게 이 소식은 충격 그 자체였을 것이다. 서울시는 SK텔레콤 컨소시엄을 선정한 이유로, 재정과 조직 면에서 우수하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정말 옛 어른들 말씀은 틀린 데가 없다. 서울은 여전히 노련한 장사치들의 도시인 셈이다.
그런데 이 소식을 접한 많은 시민은 붉은악마의 느낌과는 다른 각도에서 충격을 받은 듯하다. 그 충격의 성격은 한마디로 불쾌감이었다. 먼저는 공공의 축제와 문화를 몇몇 기업의 이익 실현의 장으로 전락시킨 서울시에 가장 큰 화살이 돌아가야 할 것이다. 문화의 공공성과 자율성을 왜곡시킨 서울시의 오만과 무지에 가장 큰 책임을 물어야 한다.
하지만 한 걸음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 보면, 붉은악마가 억울한 피해자로만 보이지 않는 이유가 있다. 이 부분이 바로, 일반 시민들이 겪는 불쾌감과 만나는 지점이 아닐까 한다.
'2002 한일 월드컵' 기간 우리는 새롭고 놀라운 집단 문화를 경험했다. 그리고 전 세계를 놀라게 한 시청 앞 광장에 바로 붉은악마가 있었다. 2002년 여름, 붉은악마는 특정 개인이나 집단을 의미하는 고유명사가 아니었다. 보통명사였다.
물론 여기에는 붉은악마라는 서포터스 조직의 기여와 헌신이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거리와 광장에 터져 나온 모든 시민은 분명 자신을 붉은악마와 동일시하고 있었다. 이로써 붉은악마는 한국 현대사를 새롭게 규정하는 열쇳말이 되었고, 거리에 나와 자율적이고 능동적으로 어울려 노는 신인류의 상징어가 되었다.
그런데 서울시가 최근 만들어 놓은 사건은, 이런 이해가 사실을 정확히 설명한 것만은 아니었음을 깨닫게 해주었다. 수많은 학자는 2002년 여름에 있었던 사건을, 군부정권에 의해 억눌려 왔던 광장 문화의 혁명적 복원이라고 치켜세웠다. 하지만 2% 부족한 설명이다. 그 광장의 경험 속에는 거대 기업이 엄청난 돈을 들여 준비한 기획도 일부 있었다는 점도 지적돼야 옳다.
그러므로 한국 현대사의 전환을 일군 발화점이 '서포터즈 붉은악마'였는지, 아니면 스크린을 설치하고 행사장을 준비한 '재벌'이었는지 다시 생각해 볼 문제가 되었다. 다행인지 아닌지 서울시는 우리의 순진한 생각을 교정해 주었다.
우리는 '눈 감으면 코 베어 가는 서울의 속성'을 또 잊고 있었다. 그렇게 본다면 사실, 코를 베인 건 붉은악마가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 대다수가 아닐까.
어찌 보면 별로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자각일 수 있다. 월드컵이란 걸 근본적으로 기업들의 놀음판으로 보는 이들의 시각을 빌리면 더욱 그렇다. 마찬가지로 돈 없이 서울이란 공간에서 광장의 경험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애당초 순진한 판단이었음을 지적할 수도 있다.
여담이지만, 그리고 다소 생뚱맞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새롭게 발견해야 할 광장의 사건은 바로 '노무현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매일 열린 대형 집회에 필요한 수천만 원의 비용은 다름 아닌 참여자들의 자발적인 헌금으로 채워졌음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붉은악마가 그렇게 경계하는 정치적 사건 속에, 오히려 붉은악마가 현재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지혜가 숨겨진 듯하다.
2002 월드컵이 끝난 후 인터뷰에서 붉은악마 대표는 "월드컵대회가 끝난 뒤에도 붉은악마의 이미지를 이용하고자 하는 기업 및 정치권의 요구가 끊이지 않고 있으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조직을 축소하고 기업, 정치권과는 절대 공조하지 않겠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유야 어찌됐든 지난주 사건으로 붉은악마가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것으로 드러난 셈이다. 이로써 붉은악마는 SK텔레콤의 경쟁상대인 KTF와 한 편이 된 고유명사로 전락하게 생겼다. 이제 월드컵을 앞둔 온 국민은 강요된 선택 앞에 서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011이냐, 016이냐. 그럼 019 사용자는 어디로 가야하나.
그럼에도 위기에서 벗어날 열쇠는 여전히 서포터즈 붉은악마에게 있다고 본다. 붉은악마가 하나의 서포터즈로 자리매김할지, 아니면 온 국민을 하나로 묶는 한국 사회의 창조적 리더로 남을지, 중대한 갈림길에 서 있는 순간이다.
통천(거대한 걸개그림)을 유지·보수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거대 기업과 손잡았다고 말하는 것은 변명에 불과하다. 꿈을 말하는 붉은악마에게 필요한 것은 창조성이지, 결코 거대 자본의 손쉬운 해결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꿈을 꾸는 자답게 붉은악마는 더욱 자유롭고 가벼워 져야 한다. 그럴 때에야, 눈 감으면 코 베어가는 서울에서 자본의 액세서리가 되지 않고, 창조적 변혁자로 설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