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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겉그림.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겉그림. ⓒ 이마고
...수술 당일에 크리스티너의 증세는 더욱 심해졌다. 발밑을 보지 않고는 서 있을 수도 없었다. 눈을 잠시라도 떼고는 뭔가를 들 수도 없었다. 무엇인가를 잡으려고 손을 뻗거나 먹을 것을 입으로 가져가려 해도 손이 다른 데로 빗나가버렸다. 손의 움직임을 조절하고 통제하는 데 근본적인 문제가 생긴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했다. 그녀의 몸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얼굴은 기묘하게 무표정하고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턱이 자꾸만 아래로 처져서 입은 헤벌어져 있었다. 심지어는 목소리를 내기조차 힘들어졌다. - 제1부 '상실' 중 '몸이 없는 크리스티너'

어느 날 몸이 없어졌다고 말하는 여인이 병원에 나타났다. 그녀는 몇 십 년 동안 정상적으로 몸을 움직이며 멀쩡히 살아왔는데 며칠 전부터 갑자기 의도하는 대로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뇌와 몸이 따로 노는 현상이 나타난 것. 현장에 있었던 의사들로서도 처음 겪는 해괴한 경우였고, 신경학 전문의 올리버 색스는 이 여인에게 눈으로 발을 쳐다보면서 발을 움직여서 걸어보라고 권한다. 여인은 '고유감각'을 잃었기 때문에 뇌에서 신체로 바로 의사전달이 되지 않는다는 것, 따라서 뇌의 명령을 '시각'이라는 오감을 통해 전달해야 하는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는 이렇게 전례가 없었던 '해괴한' 환자들에 관해 이야기 한다. 인류의 존재 이래 언제나 존재해왔던, 그러나 병이라고 밝혀지지 않아 일반인들에게 인식되지 못했던 사례들에 대한 임상 보고서이다. 19세기 이후에야 비로소 의학의 한 분야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한 신경학과 정신학. 그 짧은 역사에서 미처 발견되지 못했던 수많은 뇌의 질병 중 일부분이 올리버 색스라는 신경과 전문의에 의해 조명을 받게 된 것이다.

뇌신경에 이상이 생긴 이들에게는 일반인들이 볼 때 굉장히 기이하고 괴상한 행동들이 나타난다. 그리고 의사들은 이를 보통 '결함이 있는 환자'로 인식하고 그들의 결함을 연구하고 그 결함을 치료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저자인 색스에게 이 환자들은 '결함'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의자에 앉아서 가식 없고 숭고한 자연의 경치를 즐기는 그녀를 바라보면서, 나는 우리가 그녀에게 접근한 방법이나 평가가 아주 터무니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방법이나 평가는 결함을 발견할 수 있을 뿐, 결코 능력을 찾아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음악, 이야기, 연극처럼 그 자체에 내재한 힘으로 자연스럽게 진행하는 것이 필요했음에도, 우리가 한 테스트는 단순히 퍼즐과 도표를 보여줄 뿐이었던 것이다.

처음에 왔던 그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의 그녀를 우연히 발견한 것은 대단한 행운이었다. 어떻게 손써볼 도리가 없을 정도로 결함투성이인 그녀, 그러나 한편으로는 너무나 믿음직스러울 정도로 능력이 뛰어난 또 하나의 그녀, 내가 진료한 최초의 저능아 환자가 그녀였던 것도 내겐 행운이었다. 왜냐하면 그녀를 통해서 알게 된 사실을 다른 모든 환자에게도 적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제4부 '단순함의 세계'중 '시인 리베카'


아이큐가 60도 안되는 레베카, 간단한 거스름돈 계산도 할 줄 모르는 레베카. 병원에 와서 저능아 프로그램을 받으며 매일매일 계산연습을 해도 절대로 나아지는 법이 없었던 레베카가 색스라는 신경과 전문의와 만나 내면에 내재되어 있던 그녀만의 능력을 발견하게 된다.

그녀는 이성적인 계산이나 이론에는 저능아였지만 언어능력이나 상징적인 이야기능력에서는 탁월했고, 색스의 도움으로 그 재능을 살려 결국 유명한 연극배우가 되어 이름을 날린다. 병원에서 단순한 계산 능력 개선 프로그램을 받으며 여생을 보낼 뻔 했던 신경장애 환자가 혜안을 가진 의사 한 명을 만나 눈부신 인생을 갖게 된 것, 이후 그녀를 알게 된 어느 누구도 그녀가 '저능아'라는 것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색스가 레베카에게 인생을 다시 한 번 주었던 것은 향후 이와 같은 질병을 앓는 수많은 이들에게, 그들을 도와주게 될 수많은 의사들에게 의미심장한 선례가 될 것이다. 의사가 환자를 단순히 '자신이 치료해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고 '인생이라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나가야하는 동일한 운명에 처한 동료'로서 바라볼 때, 그 의사는 환자의 인생 전체를 바꾸어 놓을 수 있다. 아니, 인간의 질병의 역사 자체를 바꾸어 놓을 수 있는 것이다. 의사란 인류에게 얼마나 많은 공헌을 할 수 있는 존재인가. 또한 얼마나 많은 해악을 끼칠 수 있는 존재인가.

이 책을 읽고 나면, 살아오면서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많은 것들에 주의를 돌리게 된다. 내 신체와 나의 정신, 그리고 그 둘을 연결해주고 있는 신체기관인 '뇌'에 대해서 경이로운 시선을 갖게 되는 것이다.

내 뇌의 일부기관을 떼어내 버리면 내 일생의 일부 기억이 완전히 소멸된다니. 그 기간이 다시는 생각나지 않게 된다니. 그렇다면 그 기간에 있었던 내 인생도 없어지는 것일까. 내가 다시는 기억해내지 못하는 시간들을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뇌란 무엇일까, 뇌는 신체인가. 아니면 정신인가. 인간이란 무엇일까. 뇌라는 신체기관을 통해 정신작용을 하게 되어 있는 이 기이한 존재는 누가 만들었을까…. 수많은 의문은 급기야 신의 존재 유무와 그 기원, 즉 신은 태초에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을까라는 까마득한 질문으로 연결된다. 갑자기 팔다리를 움직이며 걸어가는 내가 장난감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수많은 사람들이 커다란 게임 속에 나오는 등장인물처럼 보잘 것 없고 초라해 보이기도 한다.

자신에게 찾아온 환자들을 단순히 치료대상으로 보기보다는 완전히 그 환자 자신이 되어버려 그들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았던 올리버 색스. 그가 쓴 이 따뜻한 의학서는 이후 수많은 예술작품의 영감이 되었고 각종 연극과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과학이 결코 인문학과 따로 떨어져 서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과학과 인문학이 결합하여 그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예술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가슴 저리게 실감하게 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올리버 색스는 영국 런던 태생의 신경학 전문의로 현재는 미국으로 이주해 있다. 그 자신이 건망증과 약간의 틱 증세를 보이는 체질을 갖고 있으며, 데이터와 통계에 의지해 환자를 기계적으로 대하는 종래의 관습을 깨고 환자의 내면을 중심에 두는 독특한 임상법으로 남다른 평가를 받고 있다. *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올리버 색스 지음, 조석현 옮김, 이정호 그림, 알마(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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