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碑)는 거북 모양의 받침돌 위에 비석을 세우고, 그 위에 팔작지붕 모양의 덮개돌을 얹은 형태로 둘레는 비각(碑閣)으로 보호되어 있다. 비의 앞면에는 '御筆 仁祖大王龍潛之時別墅遺基碑'라는 숙종의 어필(御筆:임금이 쓴 글씨)이 새겨져 있는데, '용잠지시(龍潛之時)'란 '임금에 오르기 전'을 뜻한다. 비의 뒷면에는 인조반정과 비의 건립 내력을 약술한 숙종의 어제음기(御製陰記, '陰記'란 비각의 뒤편에 새긴 글을 말한다)가 새겨져 있는데, 글씨는 동평군(東平君) 이항(李杭)이 썼다고 전해진다.
'인조별서유기비'를 보기 위해 들어가는 문은 두 개가 있다. 문 하나는 자물쇠로 굳게 잠겨져 있었고, 한 곳은 철제 울타리를 두르고 들어가지 못하도록 경고판을 세워 놓았다. 하지만 취재진이 찾았을 때, 인근 놀이터의 아이들은 별 어려움 없이 철제문 사이를 넘나들면서 놀고 있었다. 문화재를 보호하기 위해 설치한 문이 아이들의 작은 손조차 막지 못한다면, 그 안의 문화재는 방치 상태나 다름없을 것임을 짐작 할 수 있었다.
문 안으로 들어가니 '인조별서유기비'로 올라가는 계단과 주변의 조경시설은 마치 오랫동안 방치된 공사장 같았다. 그곳은 소주병과 담배꽁초, 과자봉지와 음료수 캔 등 쓰레기로 가득했다. 아무나 비의 보호시설 내부로 들어와 음주와 흡연, 그리고 쓰레기를 버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쓰레기더미를 지나니 비각이 나왔다. 비각의 나무 기둥과 살들은 심각할 정도로 파손되어 문화재라기보다는 을씨년스러운 흉가에 가까웠다. 비의 받침인 거북의 얼굴 안에도 누군가의 장난에 의해 담배꽁초가 놓여있었고, 비각 내부도 외부와 마찬가지로 쓰레기와 먼지, 흙으로 뒤덮여 있었다. 오히려 비(碑) 자체에 심각할 정도의 훼손이 없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스러웠다.
국가 지정 문화재가 되기 전 이미 1972년에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등록되었던 '인조별서유기비'. 그동안 보호받아 왔어야 할 '인조별서유기비'는 지난 30년 동안 단 한 사람의 관리인도 없이, 단 한 차례의 정비도 받지 못한 모습으로 그렇게 서 있었다. 아니, 국가지정 문화재로 등록, 발표하기 전에 단 한차례라도 방문하여 관리상태를 점검하였더라면,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모습은 아니었을 것이다.
얼마 전, 우리는 100년 만에 고국의 품으로 돌아온 '북관대첩비'에 대해 대단한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역시 100년 만에 국민에게 문을 연 숭례문이 모든 언론이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이처럼 문화재는 국가만의 보물이 아니다. 물질적 자산이며, 이를 발굴하고 보호하여 후손에게 물려줄 의무가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있다.
문화재는 세계인에게 우리나라와 민족의 역사를 내보이는 얼굴이며, 후손에게 지금 우리의 삶을 보여 줄 수 있는 기록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문화재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도 성숙해져야 하지만 이를 보호하는 행정기관도 이번 사례와 같은 일을 되풀이하면 안 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수앙 기자는 cpn문화재방송국 소속이며, 이 기사는 iMBC에 동시게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