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는 <문장론>에서 사색ㆍ독서ㆍ글쓰기의 유기적인 조화를 강조하고, 오늘날 현대인에게 만연해 있는 형식적인 책읽기를 신랄하게 꼬집는다. 모티머 애들러의 <독서의 기술>, 에밀 파게의 <독서술> 등이 독서의 기법을 친절하게 전수한다면, 쇼펜하우어는 직설적인 비판을 서슴지 않는다.
"독서는 타인에게 자신의 생각을 떠넘기는 행위이다. 책을 읽는 동안 우리는 타인이 밟았던 생각의 과정을 더듬는 데 지나지 않는다." "거의 하루종일 독서로 시간을 보내는 근면한 사람일수록 조금씩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잃게 된다. 항상 탈 것에 의존하면 마침내 걸어다니는 힘을 잃어버리는 현상과 비슷하다."
"다독(多讀)은 인간의 정신에서 탄력을 빼앗는 일종의 자해(自害)다. 압력이 너무 높아도 용수철은 탄력을 잃는다. 자신만의 고유한 사상을 가장 안전하고 확실하게 손에 넣는 방법은 독서다. 천성이 게으르고 어리석은 일반인이라도 꾸준한 독서를 통해 일정한 학문적 수준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렇게 얻어진 길은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 독서는 어디까지나 타인이 행한 사색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비유컨대 포프의 조소처럼 '영원히 읽히지 않기 위해 영원히 읽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쉬운 길을 선호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동일한 사색도 나의 개인적인 사색보다는 책을 통해 작가의 사색을 좇는 것을 더 좋아한다. 눈앞에 놓인 가시밭길보다 작가의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힌 평탄한 길을 더욱 사모하는 것이다. 다독의 함정이 바로 여기에 있다. 지나친 독서는 현실에 대한 감각을 떨어뜨리는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다."
그렇다고 해서 쇼펜하우어가 독서의 가치를 부정하는 건 아니다. 다만 그는 다독이나 기계적인 독서의 해악을 지적하고, 보다 능동적이고 효율적으로 독서할 것을 조언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독서는 자신의 머리가 아닌 타인의 머리로 생각하려는 행위를 의미한다.
예컨대 타인의 신체조직을 나의 몸에 이식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올바른 독서법은 "독서가 사색의 대용품에 불과하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사상의 분출이 잠시 두절되었을 때 이를 만회하기 위한 휴식으로 활용" 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이 책 저 책 옮겨다니며 타인의 사상이나 학설을 긁어모아 하나의 체계를 만드는 '서적 철학자'들을 오늘날 우리 주위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데, 쇼펜하우어는 이들에게서 타국의 화폐를 통화로 사용하는 약소국의 비애를 감지한다.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올바른 독서법의 제일보가 주체적 사고(思考)라면, 제이보는 고전을 가까이 하는 것이다. 쇼펜하우어 자신도 청년 시절 슐레겔의 아름다운 경구를 만난 이후 고전의 중요성을 깨닫고 그의 문체를 닮기 위해 노력했음을 고백한다.
"고전을 읽어라. 지금 사람들이 고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슐레겔)
고전과 친해지기 위해선 먼저 악서를 멀리 해야 한다. 악서는 식물의 양분을 빨아 먹는 잡초처럼 독자의 돈과 시간과 인내력을 고갈시키는 주범이기 때문이다. "양서를 읽기 위한 조건은 악서를 읽지 않는 데 있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그리고 책을 읽을 땐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읽는 것이 좋다. 에밀 파게도 <독서술>에서 같은 얘길했는데, 좋은 책은 읽으면 읽을수록 더 깊은 맛과 향기가 우러나는 법이다.
익명 뒤에 숨지 마라
<쇼펜하우어의 문장론>(엄밀히 말하면 원전인 <여록과 보유>)은 이미 동서양의 수많은 전배(前輩)들이 손떼를 묻혀가며 탐독할 만큼 빼어난 고전이다. 비록 재능이 모자란 작가들을 거침없이 삼류작가로 매도하고 평론가에 대한 적대감을 여과 없이 표출해 오만하고 독선적이란 비난을 받기도 하지만, 그가 제시하는 글쓰기의 기준은 참으로 엄정하고 명확하다.
게다가 누구나 공감할 만한 내용을 간결하고 명쾌한 문장으로 전달하기 때문에 굳이 다른 작가에게 눈을 돌릴 필요 없이 그의 문장 자체가 전범이 되고도 남는다. 그가 제시한 글쓰기의 세 가지 유형은 다음과 같다.
"우리 시대의 작가는 세 가지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그룹에 속하는 사람들은 생각하지 않고 글을 쓴다. 다시 말해 자신의 지극히 개인적인 기억과 추억을 바탕으로 글을 쓰거나, 타인의 저서를 인용하는 것이다. 작가 중 대부분이 첫 번째 그룹에 속한다. 두 번째 그룹에 속하는 사람들은 쓰면서 생각한다. 즉 무엇인가 쓰기 위해 생각하는 것이다. 이 또한 매우 많은 수를 헤아리고 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그룹에 속하는 사람들은 책상에 앉기 전에 필요한 모든 사색을 끝마친다. 그들이 남긴 저작은 오래 전에 자신의 머릿속에서 결론을 내린 확고한 신념의 결과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수는 극히 적다.
두 번째 그룹의 사람들, 즉 쓰기 전까지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는 작가들은 사냥을 나가기 직전에 하늘에 모든 운을 맡기는 사냥꾼에 비유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세 번째 그룹은 사육이라고 볼 수 있다. 울타리를 치고, 필요한 짐승을 길들이는 것이다. 즉 언제든 원하는 수만큼 짐승을 잡을 수 있다. 게다가 사육의 방법도 여러 가지다. 자신의 철학에 맞게 방목할 수도 있고, 양식을 선택할 수도 있다. 하늘에 운을 맡기는 사냥꾼보다 훨씬 경제적이고 지혜로운 방법인 것이다."
김태길도 수필 '글을 쓴다는 것'에서 같은 얘길 했다.
"글이란, 체험과 사색의 기록이어야 한다. 그리고 체험과 사색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만약 글은 읽을 만한 것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면, 체험하고 사색할 시간의 여유를 가지도록 하라. 암탉의 배를 가르고, 생기다만 알을 꺼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따라서 한동안 붓두껍을 덮어 두는 것이 때로는 극히 필요하다. 하고 싶은 말이 안으로부터 넘쳐 흐를 때, 그때에 비로소 붓을 들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글쓰기에 왕도는 없다. 머릿속의 생각이 여물기를 기다려 그것을 진솔하게 써내려가는 것 외엔. 그 과정에서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거나 현학의 허세를 부리지 않도록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해야 한다.
아울러 쇼펜하우어는 '익명'이란 편의를 교묘하게 악용하는 얼굴 없는 작가ㆍ비평가들을 준열히 꾸짖고 있는데, 이는 시대를 뛰어넘어 오늘날에도 고스란히 적용되는 경계가 아닐 수 없다. 이제 우리도 인터넷에 만연한 무책임한 댓글(이른바 '악플')에 대해 경각심을 갖고 좀 더 엄격한 잣대를 적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예나 지금이나 익명의 비난은 붓을 칼처럼 휘두르는 살인미수, 복면을 쓰고 백주에 저지르는 범죄 행위와도 같기 때문이다. 누군가 복면을 쓴 채 흉기를 휘두르는 걸 방치한다면 우리는 늘 미지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는 두려움 속에서 살아야 할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문장론>은 진정 시대를 초월한 울림과 향기로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고전이다. 이 책을 반려 삼아 독서와 글쓰기에 정진해 보길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