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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젱킨스는 2004년 탈북 전까지 무려 40여 년 간 북한에 살았다. 그는 북한에 가장 오래 머문 미국인이었다. 일본인 부인 사이에 두 딸을 둔 그는 지금 일본의 사도 섬에 살고 있다. 도쿄에서 활동 중인 <오마이뉴스 인터내셔널>의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맥닐이 북한에서의 삶과 새로운 환경에 힘겹게 적응하고 있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편집자주>
ⓒ 데이비드 맥닐
젱킨스는 지인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가고 있었다. 철저히 고립된 북한에서 40여 년을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극적으로 북한에서 탈출한 뒤 접근이 쉽지 않은 일본의 외딴 섬에서 살고 있는 그는 부인 히토미씨, 두 딸 브린다와 미카와 더불어 예전에 수용소 군도였던 섬 사도의 작은 집에 머무르고 있다.

짙게 드리워진 주름살 안으로 슬픔에 젖은 듯하면서도 신중한 그의 눈빛과 겸연쩍어 하는 태도에 이르기까지, 조심스러움이 몸에 배어 있는 젱킨스의 모습은 뭔가에 눌려 있는 듯했다. 정확하게 39년 간 북한에 남겨진 그의 삶은 냉전시대의 전리품이었다. 올해 66세인 그는 너무나도 다른 환경에 놓여 있다.

"아무튼 북한에서의 생활에 적응해야 했다. 날마다 얼굴에 구타를 당하다보면 어느새 그 일이 일상이 된다." 미국 남부 특유의 느린 말투로 그가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면 더이상 신경 쓸 여력도 없이 둔감해지고 만다."

파란만장한 인생 3막

그의 파란만장한 삶은 한 편의 스파이 소설을 옮겨 놓은 듯 했고 3막으로 이루어진 한 편의 드라마 같기도 했다. 가난한 노동자들이 살고 있던 노스캐롤라이나가 고향인 그는 15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미군에 입대해야 했다.

1막은 살을 에이는 것처럼 추웠던 1965년 1월 어느 날 밤 막을 내린다. 마음이 무거웠던 그는 술에 취해 근무지를 이탈한다. 그의 근무지는 남한과 북한을 나누는 비무장지대 안에 자리잡고 있었다. 만취상태인 그의 발걸음은 북한 쪽을 향했다. 그의 말대로 "생애 최대의 실수"였다.

2막은 대나무 장막 건너편 북한에서 시작된다. 정체성을 박탈당한 그는 폭력과 기아를 견뎌내야 했다. 그는 장민형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살게 되었다. 젱킨스에 따르면 그를 구원해준 사람은 일본인 여성 히토미 소가였다. 1978년 북한공작원이 히토미 모녀를 평양으로 납치했을 때 히토미의 나이는 19세였다. 그 어린 나이에 히토미는 젱킨스와 혼약을 맺었다.

히토미의 모친은 행방이 확인되지 않았다. 젱킨스는 그녀가 살해된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기관원들이 그녀의 머리를 내리친 뒤 바다에 던진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일처리 방식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목격자를 결코 살려두지 않았다."

2002년 9월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고이즈미 일본 총리의 역사적인 정상회담을 계기로 젱킨스의 존재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의 생존 사실이 확인되면서 그의 삶은 마지막 장으로 접어들었다. 북한 당국은 인질납북프로그램을 운영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 후 그의 아내를 비롯한 일본인 5명에 대한 송환 결정이 내려졌다. 그러나 그와 두 딸은 여전히 북한에 남아 있어야 했다.

그로부터 가족이 다시 만나기까지 21개월이 걸렸다. 양국 관계 정상화를 위해 원만하게 현안에 접근하려던 고이즈미의 계획은 양국 강경파의 입김이 작용하면서 차질을 빚고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 자유의 시간은 찾아왔다. 냉전이 만들어 놓은 거대한 장벽 아래 생애의 절반을 고통스럽게 보내야 했던 젱킨스와 그의 부인은 자유의 몸이 되었다.

2004년 그가 자카르타 공항에 내렸을 때 부부는 입맞춤을 나누었다. 되찾은 자유에 대한 상징적 행위였다. 그는 말했다. "북한에 있을 때는 밖에서 입을 맞출 수 없었다. 북한에서는 아주 나쁜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현재 일본 정부가 지원하는 연금과 일본에서 출간한 책의 인세로 생활하고 있다. 그의 집은 장을 보러 나갔던 부인과 장모를 북한 공작원들이 납치했던 문제의 장소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그는 지금도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걱정할 때가 있다고 했다.

"동전 몇 푼의 값어치도 되지 않는 삶을 살았다. 정말 그랬다. 그러나 지금 와서 그들이 다시 나를 붙잡아 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먼발치에서 총알 한 방으로 나를 죽일 수는 있을 것이다.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지금까지 내가 써온 모든 기록이 출간될 것이다."

"동전 몇 푼 값어치도 되지 않는 삶을 살았다"

그는 2004년 북한을 탈출한 직후 미국 군교도소에서 25일을 갇혀 지내야 했다. 하사관 출신이었던 그는 근무지 이탈이라는 이유로 뒤늦게 불명예제대를 당해야 했다. 그는 미 당국이 북한에 대한 정보를 대가로 자신을 풀어주었다고 믿고 있다.

"미국 기관원들로부터 북한에서 20년 넘게 활동하고 있는 미국쪽 첩보원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그 첩보원이 제공한 정보는 내가 말해 준 것에 비해 1/10도 되지 않았다."

그는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한다고 해도 전혀 놀랄 일이 아니라고 미국 쪽에 말했다고 한다. "내가 살던 곳 인근의 산에 러시아가 장착해 놓은 미사일들이 있었다. 동네 사람 모두 다 알던 사실이었다. 그곳에 올라가 보거나 입에 올리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그 미사일들은 분명 일본과 한국을 겨냥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1965년 이후 떠나 있어야 했던 모국 미국에 대해서도 따끔한 일침을 놓았다. "1990년대 미국은 북한에 발전시설을 제공하기로 했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 때 이후 양국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미국 때문에 내가 그들의 원수가 되었다. 나 역시 북한 사람들이 겪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는 여전히 북한에 많은 미국인들이 있다고 믿는다. "확실한 물증을 제시하기는 어렵지만 북한에는 더 많은 미국인들이 있다. 한국전과 베트남전으로 북한에 남겨진 사람들이다. 북한에는 미국인 집단농장이 있다."

베일에 가려진 북한에서의 삶은 수많은 탈북자들이 증언한 바 있다. 그러나 젱킨스의 이야기는 더욱 세밀한 부분까지 가 닿는다. 그는 '수령'이 군림하는 '전인민이 병사'인 병영국가가 어떻게 사람들의 삶을 통제하고 있는지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사소한 잡담으로부터 침실의 내밀한 대화에 이르기까지 권력의 촉수는 깊숙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는 결혼 상대자도 자신이 고를 수 없었다.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거나 한 잔 하기 위해 집에 초대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술에 취하면 속에 있던 소리를 꺼내놓는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김정일이 국방위원장에 취임했을 때 의사나 교수 같은 지식인들이 모여 있던 과학연구소에서 잔치가 열린 적이 있었다. 내가 살고 있던 곳에서 5백m 쯤 떨어진 곳이었다. 잔치가 무르익으면서 점점 술이 돌자 김정일 위원장에 대한 이런 저런 얘기가 나왔다. 그런데 한 참석자가 그 사실을 당국에 일러 바쳤다. 그 이후 그들을 다시 볼 수 없었다. 집단수용소로 보내진 터였다."

그는 평양에 "5~7개의 집단수용소"가 운용되고 있다고 말했다. 앞선 탈북자들이 증언했던 내용처럼 집단수용소에 문제 인물의 가족까지 모두 격리시킨다는 사실도 확인해주었다. "기관원들은 반동분자의 가족들을 색출해 집단수용소에 함께 가둔다. 한 번은 이유를 물었더니 가족들도 반동분자가 될 수 있으니 모두 잡아넣는 거라고 했다."

그는 몰래 미국 록음악을 즐길 수 있었다. 주파수가 한 곳에 고정되어 다른 방송은 나오지 않았던 라디오를 얻을 수 있었다. "엘비스 프레슬리나 베토벤을 비롯해 모든 종류의 음악을 듣고 녹음할 수 있었다. 한국의 음악방송 덕이었다. 두꺼운 합판을 가져다가 옷장에 고정시켜 공간을 만들어 비디오 테이프를 숨겨 두었다. 북한에 온 외국학생들이 건네준 <007>이나 <다이하드> 같은 영화들이었다. 창문을 담요로 가려 놓고 그 학생들과 함께 영화를 보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의 기억 속에 강렬히 남아 있는 것은 빈곤의 실상이었다. "쌀이 있으면 적어도 네다섯 번은 씻어야 했다. 그래도 여전히 깨끗해지지 않았다. 4~5년은 묵은 쌀이라 쌀벌레와 돌들이 그득했다. 그러니 밥을 지어 먹다보면 이를 부러뜨리기 십상이었다. 풀려나 일본에 와서 깨끗한 밥을 먹을 때 좀체 믿겨지지가 않았다."

1990년대 중국과 러시아의 원조가 끊어지면서 북한은 심각한 식량난에 허덕이게 되었다. 젱킨스는 배급되던 소시지도 더 이상 먹을 수 없었다고 한다. 소시지 안에 쥐고기가 들어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부터였다. 심지어 그는 먹을 것을 주면 성상납을 하겠다는 제의도 받았다고 한다. 기술자로 일하던 친구의 제의였다. "어느 날 그 친구가 '먹을 것을 주면 내 아내와 잘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말했다. 나는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더 이상 그와 친구로 지낼 수 없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김정일 위원장은 세계식량원조프로그램에 긴급 구제요청을 했다. "그의 부친 김일성이라면 생각도 하지 않았을 일이었다. 그의 요청으로 많은 북한주민들이 도움을 받았다." 그는 "아버지보다 아들이 더 나은 것 같다"며 김 위원장이 강제수용소를 직접 돌아본 후 많은 이들을 풀어준 사실도 일러주었다.

2003년 그의 부인이 혼자 일본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하자 북한 당국자들이 당황해 했던 일화도 털어 놓았다. 그들은 "그러면 두 딸 가운데 한 명을 일본으로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북한이 자신의 두 딸을 간첩활동에 내몰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내를 일본으로 보내야만 한다고 하더라. 어쨌건 그들은 한다면 하는 이들이었다. 일본으로 건너가면 아내는 다시 돌아올 수 없을 터였다. 결국 그들은 아내가 딸 한 명을 데려가고 남은 딸을 내가 데리고 있으라고 제안했다. 물론 나는 결코 가족과 헤어질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당국자들이 자신에게 북한에 머물도록 회유한 사실도 이야기해 주었다. 그들은 새로운 자동차와 집 그리고 26살 난 젊은 신부를 안겨 주겠다며 회유에 나섰다. "신장이 좋지 않던 나를 전담해 치료해주던 간호사가 있었다. 내가 북한에 머물고 딸을 다시 북한으로 돌아오게 한다면 그에 대한 보상으로 나를 돌봐주던 간호사나 내가 원하는 다른 여성을 부인으로 맞게 해줄 심산이었던 것 같았다. 어쨌거나 그들은 내가 떠나는 것을 결코 달가워하지 않았다. 내가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탈출에는 성공했지만... 또다른 힘겨운 삶의 연속

언론의 관심이 쏟아지던 2004년 온가족이 재회했을 때 한 일본 기자는 "히토미 소가 부인의 꿈이 마침내 이루어졌다"고 전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젱킨스가 맞게 된 새로운 삶은 동화처럼 행복한 결말과는 거리가 있었다. 이들을 주변에서 지켜본 관계자에 따르면 일본에서 새로 시작된 이들의 삶은 또 다른 힘겨움의 연속이었다.

젱킨스는 일본어를 전혀 못하기 때문에 가족들과는 한국어로만 의사소통을 하고 있다. 그가 설명한 대로 상황은 결코 "좋지 않았다." "40년을 북한에서 살았기 때문에 영어보다 한국말을 더 많이 썼다. 때로 내가 한국인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때도 있었다." 부인이 사도 시청에 출근해 일하고 있는 동안 그는 대부분 홀로 미국 영화를 보며 지낸다. 한 관계자의 말대로 "그들은 각자의 삶을 살고 있었다."

사도시는 그에게 관광 안내원 자리를 제공했지만 그의 나이와 짙은 억양의 남부 사투리가 문제였다. 올 7월 그는 일본 시민권을 신청한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 절차가 진행되는지 전혀 모른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어를 배워야 했다." 딸들은 어느새 일본어가 유창해져 별 어려움 없이 정착하고 있다. 올해 미카는 유치원교사 양성과정을 들어가며 브린다는 결혼설계사를 꿈꾸고 있다. 지난 해 병약한 노모를 만나기 위해 미국에 갔을 때 딸들은 미국을 무척 좋아했다. 그러나 미국 이주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무엇보다 "일본 쪽에 모양새가 좋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19살 연하의 부인과 이혼을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때가 있었다. 일본 정부가 한국어로 된 결혼서약서를 일본어로 바꿔주겠다고 제안한 직후 불거진 일이었다. 그는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아내에게 얘기했다. 떠나고 싶으면 지금 떠나라고. 아내는 이혼하면 딸아이들은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다. 그래서 아내가 재혼하면 내가 일본을 떠나겠다고 했다. 그러나 난 일본을 떠날 수 없을 것이다. 딸들 곁에 늘 머물 것이니까. 아내도 마찬가지로 나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뜻과 무관하게 뿌리 뽑힌 삶을 살아야했던 이의 험난한 생의 여로가 뇌리 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과거에 그를 괴롭히던 악몽 같던 전제국가의 독선적인 전횡은 사라졌다. 지금 그를 힘겹게 하는 것은 과거로부터 끈질기게 이어진 기억의 짐이었다. 북한에서 죽어가고 있던 자신을 구해준 나라에 대한 의무도 마음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다. 이제 서서히 준비해야 할 죽음과 더불어.

"다 잘 될 것이다." 이제 막 운전을 배워 몰기 시작한 자동차로 향하면서 그가 마지막 말을 던졌다. 생전에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는지 물었다.

"김정일 위원장과 직접 한 번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물론 어려울 것이다. 북한과 관계된 일은 절대 하지 않겠다고 미국에 약속했기 때문이다."(*번역:이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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