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내가 사는 고장에 온 생명평화탁발순례단(단장 도법스님)을 접한 후 생명평화의 작은 등불이 된 나는 생명평화를 위한 목소리 탁발에 동참하는 영광(?)을 안았다.
전문 성우가 아닌 그냥 이 땅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민초들의 목소리를 모아 생명평화에 대한 100가지 서원을 녹음하고, 이를 생명평화결사를 위한 순례의 길에서 함께 듣고 100배 고행을 통해 생명평화의 진리를 깨우치기 위한 작업이었다.
이정표의 끝에서 끝까지 간다는 생각의 지루함도 3시간이면 충분했다. 2시간 가량의 여유까지 생겼다. 소통이 시간의 간극뿐 아니라 역사의 간극도 메워주기를 기대하며 잠시 5·18국립묘역에 들러 광주 오월의 역사를 되새기는 시간을 가졌다. 약속시간인 오후 4시, 서원문 녹음장소는 광주 주월동에 위치한 오래된 아파트 상가 3층의 소리모아 스튜디오였다.
내 녹음시간에 앞서 이미 여러 등불들의 녹음이 진행되고 있었고 여러 명의 어린 아이들도 자신들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들 생명 그대로인, 그래서 인간이 아닌 생명도 하나하나 소중하게 생각할 줄 아는 아이들.
그 아이들과 함께 이제 여섯 살된 여진이도, 희진이도, 목사님도, 신부님도, 스님도 입을 모아 '뭇 생명은 자연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생명공동체의 존재임을 마음에 새기고, 세상의 모든 아픔은 나의 아픔이며,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때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하게 된다는 진리, 생명의 뿌리인 자연을 함부로 취급해온 인간 중심의 이기적 삶을 참회하며 절을 올리겠다'는 서원문을 낭독했다.
이러한 100가지 화두를 담은 서원문은 적게는 여섯 살 아이부터 많게는 쉰일곱의 어르신의 목소리를 통해 담겨지고, 진정으로 너이기도 하고 나이기도 한 생명의 근원에서 모두 평화가 되자고 염원하며 100배 참회에 들어간다고 한다. 그 장중한 계획으로 조금은 주눅 들고 경직돼 있던 나를 생명평화결사 문화위원장인 김경일 신부님과 전체 진행을 맡은 신희지씨가 편하게 풀어주었다.
생명평화의 길이 이처럼 쉽게 편해질 수 있는 길이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작업 중에 간간이 나눈 이야기 속에 새만금사업 재개 건과 미군기지 이전 문제로 평화를 잃은 땅, 평택 대추리가 중심을 이뤄 가슴을 아리게 했다.
'세상의 평화를 원한다면 내가 먼저 평화가 되자'는 생명평화의 기본정신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100가지 서원문이 이러한 문제를 풀어내는 힘이 될 수만 있다면… 하는 간절함이 녹음을 하는 내내 떨리는 목소리로 전해지는 듯했다.
생명평화 100배 서원문은 생명평화결사순례단장을 맡은 도법스님이 쓰셨고 박두규 시인이 정리했으며 연출은 '직녀에게'의 작곡가인 박문옥씨와 '바위섬', '직녀에게'로 잘 알려진 가수 김원중씨가 맡았다.
그 외의 어려운 진행은 광주에서 '꿈을 꾸는 교회'를 이끌고 계시는 최명진 목사님, 성공회 김제나눔의 집 원장이신 김경일 신부님과 생명평화결사 사무국의 신희지씨가 도맡아했다.
그랬다. 생명평화를 위해서는 종교도 하는 일도 모두 하나가 됐다.
"그렇게 네가 나인 것을 / 또 내가 너인 것을 / 무릎으로 만나는 절을 통해 / 생명과 평화의 화두를 깨우쳐 갑니다."
이 마음을 일상에서 되새기고자 100가지 화두를 담은 100배 CD를 제작하게 된 생명평화결사순례단은 지난 2004년 3월1일부터 지리산과 제주도 부산을 거쳐 경남과 전남, 광주, 대구와 경북 등지의 순례를 끝내고 지난 3월 21일부터 새로운 순례길에 들었다. 이번 순례는 군산과 부안을 연결하는 새만금 걷기부터 시작해 전라북도 일대를 돌 예정이라고 한다.
"생명의 실상은 본래 죽음도 없고 태어남도 없습니다. 생명본연의 자리엔 탐욕을 부리고 집착해야 할 그 무엇도 본래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분열하고 대립하며 죽이고 빼앗아야 할 대상도 본래 있지 않았습니다. 그곳엔 영원과 무한, 자유와 평화의 빛이 가득합니다."
2년째 순례단을 이끌고 있는 도법스님의 말씀대로 세상은 그저 평화다. 하지만 그 완전한 평화를 깨는 사람들의 무지몽매함을 반성하고 참회하기 위해 순례단은 길을 떠난다.
이번 시디는 함께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종교와 이념 등을 떠나 '세상의 평화를 원한다면 내가 평화가 되기 위한' 자기 수행을 돕기 위해 제작되었으며 수익금은 생명평화운동 기금으로 사용한다고 한다.
녹음을 마치고 저녁별을 보며 돌아오는 길의 88고속도로는 여전히 좁은 2차선이었다. 하지만 갈 때의 답답함과는 달리 상행선과 하행선을 구분하는 장막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훨씬 시원해 보였다. 오고 가는 차들을 볼 수 있는 곳. 작고 불편하지만 차라리 인간미를 느낄 수 있는 88고속도로.
광주로 떠날 때와 대구로 돌아올 때 나는 88고속도로의 느림이 어쩌면 우리가 안고 있는 세월의 장벽을 녹여낼 수 있는 단서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언뜻 실수를 한 것 같아 다시 하겠다는 나에게 그냥 편하게 들리는 목소리가 훨씬 좋다며 사람 좋게 웃는 박문옥 선생님과 인기에 영합하지 않고 여전히 민중 가수로 남아있는 가수 김원중 선생님. 또 예수님의 미소를 닮은 최명진 목사님, 사람 편히 대해주시는 김경일 신부님….
새만금의 갯벌들과 바다, 거기에서 사는 뭇 생명들, 그곳의 사람들의 아픔을 함께 되새기며 걷는 생명평화 탁발순례단들의 모습이 오버랩 된다.
덧붙이는 글 | 생명평화순례단은 현재 군산에서 부안까지 새만금 걷기에 나서고 있습니다. 이번에 제작되는 시디는 이 세상의 생명평화를 위해 힘을 모은 생명평화결사운동 기금으로 사용될 예정입니다.
생명평화결사운동 홈페이지 http://www.lifepeace.org/에 가시면 생명평화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