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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 첫 마을로 가는 풍경
섬진강 첫 마을로 가는 풍경 ⓒ 윤재훈
이제 기지개를 켜고 새 봄을 준비하는 경운기 한 대
이제 기지개를 켜고 새 봄을 준비하는 경운기 한 대 ⓒ 윤재훈
길가에는 눈을 뒤집어쓴 경운기 한 대만 올봄의 화려한 부활을 꿈꾸고 있었으며 우리 탐사에서 맨 먼저 맞이하게 될 원신암 마을로 들어가는 개울가에는 아직 얼음이 두껍게 깔려 있었다.

마을은 정적 속에 잠겨 있었으며 여기저기 펼쳐진 흙담은 겨울 속에서도 우리가 따뜻함을 느끼기에 충분히 정겨웠다.

처마 및 고드름
처마 및 고드름 ⓒ 윤재훈
고샅길에 마을 사람 하나 보이지 않고, 이 산골짜기에는 개 한 마리도 짖지 앉았다. 얼음꽃만이 나뭇가지 마다 찬연하게 꽃을 피우는 아 한가한 시골의 하루여.
고샅길에 마을 사람 하나 보이지 않고, 이 산골짜기에는 개 한 마리도 짖지 앉았다. 얼음꽃만이 나뭇가지 마다 찬연하게 꽃을 피우는 아 한가한 시골의 하루여. ⓒ 윤재훈
옛날에 이 길은…
옛날에 이 길은… ⓒ 윤재훈
마을을 벗어날 때 마지막으로 본 겨울나무. 찬바람 속에 솟대처럼 홀로 서서 손을 흔드는 것 같았다. 잘 가라고, 언제 다시 올 거냐고. 옷 다 벗은 그 몸이 춥기만 하다.
마을을 벗어날 때 마지막으로 본 겨울나무. 찬바람 속에 솟대처럼 홀로 서서 손을 흔드는 것 같았다. 잘 가라고, 언제 다시 올 거냐고. 옷 다 벗은 그 몸이 춥기만 하다. ⓒ 윤재훈
우리가 마을을 빠져나올 때까지 단 한 사람의 주민도 만나지 못했으며 나뭇가지마다 맺힌 얼음 꽃만이 햇빛 속에서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슬레이트 지붕에는 고드름이 달려 한층 더 고즈넉했으며, 동네를 빠져나오는 길에 서 있는 외로운 겨울나무 하나, 마을을 떠나는 길손에게 솟대처럼 우두커니 서서 마지막 작별을 고하고 있었다. 다음에 꼭 오라고.

마을을 막 벗어나자 눈을 뒤집어쓰고 홀로 서 있는 무덤 하나. 옛 산천은 그대로인데 인걸들은 다 간데없고, 쓸쓸한 표정으로 동구 밖을 지키고 있었다. 마치 공동묘지처럼 수많은 십자가를 눈 위에 늘어뜨린 인삼밭을 지나 띄엄띄엄 서 있는 폐가들, 그들은 마치 유령처럼 서서 오랜만에 보는 사람들을 반기는 것 같았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 윤재훈
ⓒ 윤재훈
요즘 시골 마을은 어디를 가나 노인들만 살고 젊은 사람들 보기가 힘들다고 한다. 고샅길 어귀에서 아이들 노는 소리 사라진 지는 이미 오래되어 버렸다고 한다. 젊은 사람들과 아이들 목소리가 얼마나 그리우면, 사람들을 유치하기 위해 어느 바닷가 마을에서는 생활의 터전인 어업권까지 무료로 내준다고 한다.

서울에서는 저녁 무렵, 지하철을 타려고 역에 내려서면 사람들 때문에 발 디딜 틈이 없고, 지하철 안에서 빠져나올 때도 한참을 버둥거려야 하는 그야말로 인산인해(人山人海)의 세상인데.

빈집 몇 개를 더 지나며 보니 여기저기 없는 듯 다가선 지류들이, 살며시 다가와 계곡에 몸을 섞는다. "여울을 건너 듯 내 이웃을 조심해야 한다" 라는 여유당의 이야기를 신정일 선생에게 듣고 있노라니, 저 멀리 다음 마을이 보인다.

이런 마을을 수백 개 지나고 지나 섬진강의 그 마지막 마을까지, 불경에서 나오는 "무소의 뿔처럼" 우리는 혼자서 가야할 것이다. 우리가 산의 품에 안길 때처럼 그 누구도 나를 부축해 줄 수 없고, 또 대신 걸어줄 수도 없는 그 길. 헤쳐가야 할 인생의 길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봄 내음 묻어나는 강바람을 흠뻑 맞으며 그동안 탁해진 심장을 깨끗이 씻으며, 우리 국토와 강을 따라 일어났던 문화의 흥망성쇠(興亡盛衰)를 나의 두 발로 철저하게 느끼며 걸어가야 할 것이다.

사람들, 도대체 다 어디로 갔나

아직 논밭으로 나가기에도 이른 계절인데 도대체 집에도, 마을에도, 밭에도 사람들을 볼 수 없다. 차를 거의 볼 수 없는 그 길이 좋았지만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문득 어린 시절 초등학교를 십 리 이상 걸어다니던 일이 생각난다. 얼마쯤 걸으면 검정 고무신에 땀이 차 걸을 때마다 깔닥깔닥 나던 소리. 그러면 발 위로는 동그랗게 고무신 자국이 나고, 논둑길을 걷다가 풀피리를 만들어 불다가, 둑 위에 오도카니 앉아서 눈 시리도록 파란 하늘만 바라보다가 가곤 했다.

그러다가 아이들과 둑을 막아 물을 퍼내고 고기를 한 양동이 잡던 일, 아카시아 꽃 흐드러지게 피어있던 그 하굣길, 바람이 불면 그 아카시아 향들, 숨 쉴 수 없을 정도로 내 얼굴로 밀려들어 오고, 바람에 눈처럼 날리던 그 무수한 꽃잎.

하루에 두어 번 지나가는 그 버스를 조금이라도 빨리 보고 싶어 소나무 위에 올라가 한정 없이 산모롱이를 바라보며 기다리고. 그러고 있노라면 멀리서 흙먼지 일으키며 옛 흑백영화처럼 버스는 돌아오고 그 버스를 따라 한참이나 달려가던 일. 집에 돌아오는 길에 개울 아래로 지나가는 뱀을 친구들과 돌을 던져 괴롭히던 그 일은 지금 생각해도 죄스러운데, 요즘은 그리운 마음으로 고향을 달려가도 반겨주는 이도, 하룻밤 선뜻 재워주는 집도 드물다.

한참 상념에 젖다 보니 다른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아직 나오지 않는 벌과 꽃들을 기다리며 이 아름다운 자연과 벗삼아 걸어가는 길이 벅차다. 정태춘씨의 '북한강에서'의 노래가 저만큼 앞서간다.

저 어두운 밤하늘에 가득 덮인 먹구름이
밤새 당신 머릴 짓누르고 간 아침
나는 여기 멀리 해가 뜨는 새벽 강에
홀로 나와 그 찬물에 얼굴을 씻고
서울이라는 아주 낯선 이름과 또 당신 이름과
그 텅 빈 거릴 생각하오
강가에는 안개가 안개가 천천히 걷힐 거요.
흘러가고 또 오는 시간과….



그리움이 상실된 시대


길가에 다시 빈집들이 띄엄띄엄 나타나고 아직도 사람들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단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멀리 산 위에는 눈꽃들만 찬연하다.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고, 개들의 짖는 소리도 들리지 않고, 우표도 팔지 않고….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고, 개들의 짖는 소리도 들리지 않고, 우표도 팔지 않고…. ⓒ 윤재훈
개울 쪽으로 완전히 기울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운 빈집.
개울 쪽으로 완전히 기울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운 빈집. ⓒ 윤재훈
@IMG12@멀리 친숙한 풍경이 하나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이제는 낯익지 않은, 옛이야기 속에서나 볼 수 있는 편지 부치던 곳이 있다. 그 옛날 우리는 이곳에서 우표를 사서 혓바닥에 싹싹 문질러 정성껏 봉투에 붙였는데. 그리고 손바닥으로 치거나, 손가락으로 꼭꼭 문질러서 몇 번을 확인하곤 했다. 그리운 그 사람에게로 꼭 들어가라고.

@IMG13@ 그리고 며칠 후부터는 우체부를 기다린다, 더러는 산모롱이에 올라가서. 조금이라도 우체부를 빨리 보고 싶어, 멀리 신작로를 바라보며. 버스 꽁무니에서 일어나던 그 흙먼지를 기다리며 하루를 다 보내던 그 하릴없던(?) 시절이 생각이 난다. 그러다가 눈이라도 많이 와버리면 열흘이고 한 달이고 우체부는 오지 않았다. 그러면 기다리는 사람들은 더 그리워서 날마다 야위어가고.

요즘 아이들은 알기나 할까. 궁금하면 전화하면 되고, 더구나 이제는 모두의 손에 손전화가 들려있는 시대인데.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풍요 속에, 주체할 수 없는 속도 속에, 우리가 잊어버리고 사는 것이 너무나 많다.

하얀 사각봉투에 그리움 묻어 날아오던 편지도 이제는 점차 사라져가고. 두드리면 이메일로 몇 초안에 다 들어가 버리는 시대이니 이 시대는 정말 "그리움이 상실되어 버린 시대"같다.


풀꽃

전 원 범

살다가 결국 우리는
무엇으로 化하여 남게 되는가

걸어온 길은 안개처럼 아득하고
가야 할 길은 언제나 가파른데
휘휘 둘러 보아도
바람뿐인 들판

눌린 생각들을 펴면서
들 끝에 와 서면
누구의 태우지 못한 한(恨)이기에
저리도 풀빛만 짙어오는가

낮은 목소리로 낮은 목소리로
흔들리다가
몇 개의 풀꽃으로 살아나는 목숨

살다가 결국 우리는
무엇으로 화하여 남게 되는가


특히나 옛날에는 이런 외진 산골마을에는 전화를 놓을 엄두도 못 내고, 그래도 조금은 부유하고 큰 마을에 가야 한두 대 정도가 고작이었다. 어쩌나 한 번씩 전화가 와서 바꾸어 주면 왜 그렇게 고맙고 또 미안하던지, 그러면 동네 사람들은 항상 그 집 눈치를 보아야 했다. 혹시라도 아이들이 그 집 얘들하고는 싸워서도 안 되고. 고구마를 삶던가, 혹여라도 맛있는 것을 하면 항상 갖다가 주고 평상시에 공덕을 잘 쌓아야만 했다.

어떤 마을들은 마을 회관에 전화가 있어 전화가 오면 온 마을에 방송을 한다. 그러면 마을 사람들은 저 전화는 서울에 있는 자식들이니 또는 누구 전화니 하면서, 모여앉아 나름대로 점들을 치기에 바빴다. 그리고 또한 전화가 오면 100미터 달리기 선수처럼 부리나케 뛰어가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어른들로부터 생야단을 들어야만 했다.

왜 그리 돈이 아깝고, 시간도 잘 갔는지. 아버지가 전화 빨리 끊으라는 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쟁쟁하게 들리는 듯하다. 돈이 얼마나 비싼데 그렇게 오래 쓰느냐고, "땅을 파보라고, 하루종일 파면 10원짜리 한 푼 나오는지 아느냐", "단 돈 10원이 없으면 버스를 못 탄다"고 하시던 그 소리도 이제는 아, 아득한 옛날의 소리가 되어 버렸다.

지금은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손전화를 가지고 다니시고 거리에서도 수시로 쓰시는 걸 보면, 우리나라가 부강해지기는 진 모양이다. 그래도 자식들 전화 오면 우리네 부모님들은 더 말하고 싶은데, 주위 눈치를 보다가 못내 다 못하시고 머쓱해 하시면서 끊으신다. 그리고 밤늦도록 뒤, 덜 보고 허리춤 올린 사람처럼 엉거주춤하며 혼잣말을 하신다. 두고두고 한마디 더 못한 것이 서운하다고 하시는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광고판 아래에는 지금은 사라진 미원 회사의 '맛나' 광고(?)가 보인다. 멀리 마을이 하나 보인다. 젊은 처자들도 없는데 산모들이 많은가. 마을 이름이 '임신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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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5년여 세계오지 배낭여행을 했으며, 한강 1,300리 도보여행, 섬진강 530리 도보여행 및 한탄강과 폐사지 등을 걸었습니다. 이후 80일 동안 5,830리 자전거 전국일주를 하였습니다. 전주일보 신춘문예을 통해 등단한 시인으로 시를 쓰며, 홍익대학교에서 강의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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