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수정 : 28일 오후 6시 30분]
(주)서울고속도로가 발주한 서울외곽순환도로(일산-퇴계원 구간) 수락산터널 사업에 참여한 업체가 국내에서 제작한 '차도 터널용 전기집진기'를 고가의 '수입품'으로 속여 납품하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돼 논란이 일고 있다.
'차도 터널용 전기집진기'란 고속도로나 국도 등의 큰 터널에서 생기는 먼지를 정화하고 화재가 일어나면 연기를 제거하는 장치. 한 대 제작·설치비용만 해도 최소 20억원 이상이다. 수락산터널의 경우, 계약금액은 25억원에 달한다. 국내에 5대 정도 설치된 이 장비는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하는 것이어서 대부분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파산한 해외 업체 기술로 공사권 따내면서 몰랐다?
현재 수락산터널내 전기집진기를 납품하기로 돼 있는 업체는 로얄정보기술(주)(대표 정종승). 이 회사는 전기집진기 제작 기술로 유명한 노르웨이 'CTA International'사의 한국내 대리인 자격을 갖고 있어 국내에서 독보적인 기술을 보유한 것으로 평가받아 왔다. 지난 2005년 9월 이 업체가 수락산터널내 전기집진기 공사권을 따낸 것도 바로 CTA의 기술력 덕분이었다.
하지만 이 회사는 수락산터널 전기집진기 공사권 입찰을 하면서 해외 공급사를 CTA가 아닌 ‘KGD Developments’사로 바꿔 들어왔다. 감리단의 사실 확인 결과, CTA는 이미 2004년 12월 전인 파산한 기업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벌써 문을 닫은 기업의 기술력을 가지고 버젓이 입찰에 참가해 공사권을 따낸 것이다.
로얄정보기술은 공사권 낙찰 당시 “KGD가 CTA와 기술 제휴를 통해 사업을 양수받은 노르웨이 회사”라고 주장했다. 이 회사는 또 CTA가 파산한 사실을 “미처 몰랐다”고 해명했다.
해외 기술로 수십억원에 이르는 사업권을 따낸 업체가 정작 '원천기술'을 보유한 기업의 파산조차 몰랐다는 것은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더구나 CTA가 파산한 시점은 수락산터널 공사 계약 체결보다 9개월이나 앞선다. 로얄정보기술이 사업권을 따내기 위해 '무리수'를 둔게 아니냐는 의심이 시작된 것도 이 때문이다.
한번 시작된 의혹은 꼬리를 물었다. 로얄정부기술의 갑작스런 외국공급사 변경 신청을 수상히 여긴 수락산터널 구간 공사 감리단은 이 업체에 '해외 실사'를 요구했다. 이에 따라 로얄정보기술측과 감리단, 시공사(롯데건설), 발주처((주)서울고속도로) 관계자들은 지난해 12월과 올해 1월 두 차례에 걸쳐 노르웨이 현지 KGD 방문 등 실사를 다녀왔다. 그러나 실사 결과는 의혹을 더 부추겼다.
노르웨이서 전기집진기 보지 못해... 국내 제작 의혹
현지 실사 참가자들은 제작 현장을 눈으로 직접 보기는커녕, 전기집진기 자재를 구입했다는 문서조차 못보고 돌아왔다. 당시 실사에 참가한 관계자는 "전기집진기가 완성돼 성능시험을 하는 줄 알고 갔는데, 제작이 안돼 있어 성능시험을 못했다"고 털어놨다. 로얄정보기술은 "감리단에서 (외국 공급사) 승인이 늦게 떨어져 제작이 안 되고 있었다"고 뒤늦게 해명했다.
하지만 실사에 참가한 감리단 관계자는 "(KGD를) 가서 보니 5평 남짓한 사무실에 사장 혼자서 근무하는 '원맨컴퍼니(OneMan-Company)'였다"고 말했다. 감리단의 공급사 승인과는 상관없이, KGD가 수십억원에 달하는 전기집진기를 생산할 능력이 없는 일종의 '유령회사'처럼 보였다는 얘기다.
최근에는 로얄정보기술 여주공장에서 전기집진기를 제작하고 있는 현장이 포착되면서 '국산→수입품' 둔갑 의혹은 더 커지고 있다. 이 업체 공장에서 목격된 제작물은 전기집진기의 핵심 부품인 '셀(CELL)'. 먼지를 빨아들여 정화시키는 장비다. 지난 2월 이 공장을 방문한 한 관계자는 "미완성의 셀 장비와 재료가 되는 알루미늄판이 공장에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고 증언했다.
감리단은 파산 업체 기술을 내세워 공사권을 따낸 점, 허술한 외국 공급사, 국내 여주공장에서의 전기집진기 핵심 부품 제작 등 세 가지를 의혹을 들어 로얄정보기술이 해외 기술과 실적을 앞세워 공사를 따낸 뒤, 국내에서 '짝퉁' 제품을 제작해 납품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아울러 이 업체는 지난 2005년 6월 완공된 경주터널(건천IC-현곡)에도 국산 제품을 사용했다는 의혹도 일고 있다. 20억원 규모의 경주터널 전기집진기 공사는 이 업체가 CTA로부터 62개의 셀 부품을 수입해 납품했다.
물론 로얄정보기술은 모든 의혹을 정면으로 부인하고 있다. 정종승 대표는 "전기집진기는 모두 적법한 절차를 거쳐 수입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이어 그는 "여주공장에서 만들어진 셀 부품은 기술의 국산화를 위해 시제품으로 만든 것"이라고 해명했다.
특히 정 대표는 경주터널에 들어간 셀 부품이 모두 노르웨이에서 생산된 것이라며 '수입신고필증'을 근거로 내밀었다. '수입신고필증'에는 2005년 6월 27일 모두 62개의 셀 부품이 홍콩을 거쳐 부산항으로 수입된 것으로 나와 있다.
"수입품 속이려 반출 후 반입"- "경쟁업체 음해"
하지만 감리단은 '수입신고필증'이 오히려 전기집진기가 국내에서 생산된 증거가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경주터널에 설치된 셀의 전체 개수는 62개, 하나당 무게는 82kg이다. 따라서 수입 당시 중량은 모두 5톤 정도 된다. 그러나 정 대표가 증거로 내민 수입신고필증에는 당시 수입된 셀 부품의 총중량이 2.5톤으로 기록돼 있다. 수입품 무게가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 셈이다.
수락산터널 감리단의 한 관계자는 "로얄정보기술이 국내 여주공장에서 생산한 셀 제품을 노르웨이산으로 속이기 위해 절반 정도를 해외에 반출했다가 재수입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한편 이 업체는 수락산터널 구간에 이어 서울외곽순환도로 사패산터널 공사에서도 전기집진기를 납품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사패산터널 구간은 경주터널(20억원), 수락산터널(25억원) 보다 훨씬 액수가 큰 100억원 규모의 공사다.
로얄정보기술 정 대표는 "경쟁업체들이 우리 회사의 입찰을 방해하기 위해 노르웨이산 제품을 국내에서 만들었다며 음해하고 있다"고 반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