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내 얘기가 아니다, 너무 최악의 케이스만 골라서 나열해 놓았군. 나는 이 정도는 아닌데 꼭 이 책을 읽어야 할까.
'~의 심리학', '~의 대화법'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는 책들을 읽을 때 으레 처음에 하게 되는 생각들이다. 토니 험프리스의 <가족의 심리학>이란 책도 예외가 아니다. 폭력적이고 일방적으로 지배하려드는 아빠와 자기주장이라곤 전혀 없이 수동적으로 순응하기만 하는 엄마를 자꾸 예시로 삼는 이 책이 처음에는 지리멸렬했다. 요즘 세상에 어떤 아빠가 일방적으로 자기주장만 관철시키려 할까? 그리고 이런 엄마상이 요즘도 있나? 너무 전통적인 가족상에서만 이야기를 이끌어내려고 하는 듯한 이 책이 너무 진부해 보였다.
그러나 두세 장 정도를 읽고 나면 이 생각은 서서히 바뀌어간다.
"...전통적인 문화와 종교들은 대개 부모, 특히 어머니의 헌신을 강조한다. 가족을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하라고 말한다. 어머니의 헌신적인 사랑은 고귀한 이타적인 사랑의 표본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그것은 허황한 신화일 뿐이다. 반드시 깨야 한다.
'헌신적인 사랑'은 이타적인 것이 아니라 극도로 이기적인 것이다. 헌신하는 관계는 그냥 베푸는 것이 아니라 '돌려받기 위해' 베푸는 것이다. 이는 받는 사람이 지극히 충족하기 어려운 조건을 내세우는 관계다. 지나치게 헌신하는 사람은 자신의 고유한 자아를 발현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다른 가족들이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뿌리째 뽑는다..."
이 부분에 이르러 나는 알게 되었다. 내가 이 책을 진부하다고 느꼈던 진짜 이유를. 왠지 거북하고 눈살을 찌푸리게 되는 원인이 무엇인지를. 폭력적인 남편이나 순종적인 아내라는 말은 단지 육체적, 현상적인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꼭 아내를 두들겨 패지 않더라도 언제나 자기 의견을 따를 것을 강요하는 남편은 폭력적인 남편이며, 신체적으로 얻어맞지 않더라도 자기 의견 없이 수동적으로 늘 남편이 하라는 대로만 따라가는 아내도 순응적인 아내인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은 그런 정신적 폭력이 사실은 신체적 폭력보다 더한 폭력임을 여러 가지 사례를 들어가며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니까 나는 내 주위의 가족들 대부분이 이런 모습으로 살아오고 있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일종의 폭력 상태에 방치한 상태로 관계를 지속해오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이 책이 몇 안 되는 문제가족에게나 일어나는 일들을 일반화시키려 한다며 '진부하다'고 외면하고 싶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심리학책들이 잘못된 사례들을 열거하고 문제점을 깊게 파헤치는 선에서 끝나는 데 반해 이 책은 잘못된 사례에 대한 대안을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열거하고 있다. 가족간의 문제 중 가장 큰 부분이라고 지적하는 '폭력적인 대화'에 대한 부분도 마찬가지다.
"...아이나 어른이나 꼭 알아야 하는 중요한 사실 중 하나가 바로 '내 감정은 언제나 나에 대한 것'이라는 점이다. 즉 자신의 사랑받고 싶은 욕구, 인정받고 싶은 욕구, 보호받고 싶은 욕구, 주목받고 싶은 욕구, 칭찬받고 싶은 욕구를 드러내는 것이다. 하지만 많은 부모들이 자신의 감정이 자신에 대한 것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때문에 아이들에게 가르쳐주지도 못한다.
부모들은 대개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가지고 아이나 배우자를 탓하며 비난하고 꾸짖는다. '무거운 침묵'으로 자신의 기분 나쁜 감정을 전달하기도 한다. 이는 모두 자신의 감정을 다른 사람에 대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태도다. 감정은 당신 안에 있고, 따라서 감정은 당신 자신에 대한 것이다. 그런 진실을 깨닫고 자신의 감정을 자기 것으로 인정하고 책임져야 한다. 당신의 감정 때문에 남을 탓하는 것은 상대방을 공격하는 행위다. 상대방을 화나게 하거나 움츠러들게 할 뿐 당신의 욕구를 푸는 데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다..."
저자가 제시하는 대안적인 대화법은 '나 중심 대화법'이다. 어떤 사안에 대한 감정을 표현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신이...'라는 말로 대화를 시작한다. 이것은 감정상태의 책임을 온전히 상대방에게 전가하는 것으로 책임소재가 모호해지고 서로 순식간에 감정을 상하게 되는 공격적인 대화법이라는 것. 남편이 밤마다 술을 마시고 늦게 들어오는 경우 "당신은 만날 밖으로만 맴돌잖아!"라고 말하는 것보다 "나는 밤마다 집에 혼자 있는 게 싫어. 당신과 좀더 같이 있고 싶어"라고 말하면 대화는 훨씬 잘 풀린다. 남편은 아내가 늦게 들어온 자신의 행위를 질책한다고 느끼기보다는 혼자 있어 외로운 자기 자신의 상황을 호소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므로 훨씬 더 이성적이고 부드러운 대화를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저자가 지적하는 또 하나의 가족문제는 성별 분업에 기초한 전통적인 가족개념이다.
"...특히 여자아이들에게 어릴 때부터 집안일을 과도하게 떠맡기는 가족이 많다. 그렇게 자란 여자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남 뒤치다꺼리하는 일'만 계속하게 된다. 자신의 권리와 욕구가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남을 돌보는 데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며 자신의 자아는 아주 꼭꼭 숨기는 '한없이 자애로운 어머니'가 된다.
그런 여자들은 자녀에게도 똑같은 운명을 물려준다. 딸은 어릴 적부터 집안일을 시켜 '순교자' 역할을 따르게 만들고, 아들은 모든 뒤치다꺼리를 다 해줘 '응석받이'로 키운다. 가족을 유지하기 위해 꼭 해야 하는 일들은 반드시 공평하게 나눠 수행해야 한다. 건강한 가족에서는 책임을 공정하게 분배하고 적절하게 수행한다. 하지만 기본적인 기능들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거나, 어느 한 사람에게 책임이 쏠리면 가족에 위기가 찾아온다..."
가족문제를 다룬 책들을 읽다보면 어느 시점에선가 페미니즘적인 시선과 만나게 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가족내에서 일어나는 많은 문제들이 결국 성별을 기초로 뚜렷하게 역할 구분을 지으려 하는 전통관념에서 발생하다보니 가족문제를 조명하는 책은 결국 페미니즘적인 시선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아직도 유교적인 가치관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 한국에서, 이 책이 제시하는 열린 사고들이 얼마만큼 실용성을 띨 수 있을까. 아직도 아이는 어른에게 말대꾸해서는 안 된다는 사고가 지배적인 나라, 집안일과 육아는 여자의 몫이라는 고정관념이 지배적인 나라에서 이 책이 제시하는 해법이 얼마만큼 힘을 발휘할 수가 있을까 하는 씁쓸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변화의 출발은 항상 이런 사고를 가진 이들에게서 시작되는 법. 이 책을 읽는 것이 하나의 시작점이 될 수도 있다. 가족간의 관계 문제로 고통을 받고 있는 '이'라면 반드시 읽어보아야 할 책이다. 책의 분량이 부담스러워 한 권을 다 읽기가 부담스럽다면 7장 감정표현, 8장 소통의 문제만이라도 읽어볼 것을 권한다. 저자가 제시하는 '나 중심 대화법'의 효용을 그저 책 몇 페이지를 읽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느껴보게 될 것이다. 갓 결혼한 이들에게, 그리고 이제 막 부모가 된 이들에게 꼭 선물해주고 싶은 책이다.
덧붙이는 글 | *'나'를 주어로 하는 대화법에 대해 조금 더 깊게 들어가보고 싶다면 마셜 B.로젠버그의 <비폭력 대화>를 읽어보길 권한다. 우리의 일상이 얼마나 폭력적인 대화로 채워져 있는 지를 깨닫고 놀라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