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돈을 앞세운 공민왕의 개혁
공민왕은 무신집권기와 원의 간섭하에서 미약해진 왕권을 재확립하고 개혁을 시도했던 왕으로 알려져있다. 고려사에서 공민왕대는 외부적으로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 국내적으로는 정치적 변란, 그리고 개혁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갈등으로 우여곡절의 역사적 사건들이 많이 벌어진 시기이기도 하다.
이 때문인지 고려시대의 역사관련 사료에서 당시 공민왕대의 기록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재위기간이 짧지 않은 것도 있겠지만 이처럼 역사적 주요 사건들이 많이 벌어졌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고려 말의 개혁군주라고 칭하는 공민왕을 꺼내게 된 것은 해남윤씨가의 첫 실존인물로서 중시조가 된 광전(광전)이 당시 공민왕대의 인물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이를 보면 해남윤씨가는 고려말 공민왕대에 이곳 조선의 땅끝 서남해안을 무대로 그 기틀을 잡았음을 알 수 있다.
고려말의 어지러운 상황에서 이곳 서남해안지역 또한 잦은 왜구의 침입으로 백성들이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해남윤씨가는 해남과 가까운 강진 지역에 그 둥지를 틀었다.
녹우당 종택의 전시관에 들어가면 많은 고문서들을 볼 수 있다. 이 고문서들은 이 집안의 오랜 역사와 그 뿌리의 흔적을 말해주고 있는데, 이 고문서들 중에서 눈에 띄는 것 중에 하나가 <전가고적(傳家古跡)>이라 쓰인 고문서다.
이 '전가고적' 속에는 '지정14년 노비허여문기((至正十四年奴婢許與文記)'가 들어있다. 해남윤씨가의 고문서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자 우리나라 노비문서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그런데 이 '지정14년 노비허여문기'에 중시조 광전이라는 인물이 등장하고 있다.
이 노비문서에 쓰인 연대를 보면 이는 고려말인 공민왕 3년(1354)에 만들어진 것으로 이를 통해 광전이라는 인물이 이 시기에 살았던 실존인물로서 확인되고 있는 것이다.
드라마 <신돈>에서 신돈이 공민왕을 등에 업고 강력하게 추진하는 것이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을 설치하고 토지와 노비를 정리하는 것이다. 신돈 자신이 노비의 출신이라서 개혁을 더욱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민변정도감은 원종 10년(1269년)에 최초로 실시되어 여러 차례 시행되었는데 권문세족에게 빼앗긴 토지를 원주인에게 돌려주고 불법적으로 노비가 된 사람을 해방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 제도는 기득권 세력인 권신들의 강력한 반발로 결국 실패하게 되는데 당시 이같은 사회상황 속에서 해남윤씨가의 '노비허여문기'라는 고문헌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 '노비허여문기'에는 광전의 처가로부터 전래된 노비 1구(口)를 자식인 단학(丹鶴)에게 상속하고 있는 것이 기록돼 있다. 이 기록을 통해 해남윤씨가는 광전 대에 이미 노비를 소유한 향리(鄕吏) 집안으로 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같은 노비문서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해남윤씨가 기반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처가 쪽의 힘이 컸다. 처가쪽의 사회 경제적 지위로 말미암아 재산이 사위(광전)에게 상속될 수 있어 향촌사회에서 사회 경제적 지위를 구축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다.
광전 대에 해남윤씨는 신흥무관 세력으로 성장하여 무관직을 역임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공민왕대에는 서남해안 지역에 자주 출몰하는 왜구 때문에 많은 손해를 입고 있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무관으로 활약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때까지 광전은 지역에서 그다지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집안이었으나 거족(鉅族)인 함양박씨(咸陽朴氏)와 통혼하게 됨으로써 동정직(同正職)으로나마 관계에 진출할 수 있었다. 또한 혼인과 더불어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어느 정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광전의 처인 함양박씨의 부(父)는 대호군(大護軍)을 지낸 환(環)이고 조부 박지량(朴之亮)은 몽고의 일본정벌 연합군 김방경의 휘하에서 지중군병마사(知中軍兵馬使)로 출전, 대마도와 일기도(壹岐島)를 친 공으로 원나라로부터 무덕장군(武德將軍)의 벼슬과 금패인(金牌印)을 하사받고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올랐던 인물이다.
이러한 처가쪽의 사회ㆍ경제적 지위로 말미암아 '노비허여문기'에서 보여주듯 처가의 재산이 일정하게 상속될 수 있었다. 광전의 이같은 사회경제적 지위는 그가 향촌사회에서 어느 정도 재지적 기반을 구축했음을 말해준다.
해남윤씨는 강진땅에서 해남으로 첫발을 내디딘 사람이자 녹우당에 터를 잡은 어초은 윤효정(1476~1543)대에도 당시 해남의 강력한 재지적 기반을 가졌던 대부호 정귀영(鄭貴瑛)의 딸과 혼인을 하게 되어 해남으로 옮겨 살게 되었고, 과거에 합격함으로써 막대한 경제적 기반과 사회적 영향력을 가진 가문으로 행세하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처복이 좋아 이같은 경제적 기반을 잡을 수 있는 행운을 잡게 되어 이후 재지사족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보면 당시는 남녀가 공평하게 재산을 물려받은 때였으므로 이같은 상황은 당연한 것으로 여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때가 지금보다 더 평등한 세상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 것 같다.
한 장의 고문서 속에 고려말 상황이
'노비허여문기'에는 '탐진감무(耽津監務)'라는 기록이 나오는데 탐진은 강진의 옛 이름이다. 이를 통해 당시 광전이 해남의 이웃 고을인 강진에 살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노비허여문기'를 통해보면 광전은 3형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한 명은 요사(夭死)한 것으로 보이며 차남인 단학이 봉사조(奉祀條)의 노비를 받은 것으로 보아 제사가 그에게 물려졌으며 이때 장자(長子)인 단봉(丹鳳)은 이미 죽은 것이 아니었나 보고 있다.
고려시대에 노비의 매매는 토지나 가옥의 매매와 같이 매매 후 100일 이내에 관에 청원하여 입안(立案)을 받도록 하였다. 해남윤씨가의 <노비허여문기>는 이러한 절차에 따라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노비매매의 경우 토지매매의 경우보다 훨씬 엄격한 입안제도가 준행되었는데, 노비는 토지나 가옥과는 달리 살아있는 재산으로서 출산에 따른 증가가 있고 도망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양반집의 노비매매는 양반이 직접 매매에 관여하지 않고, 양반에게 위임받은 노(奴)에게 대행시키는 형식을 취했다.
후기사회로 접어들면서 고려의 노비신분 질서는 문란해진다. 무인정권 몰락 이후 나타난 몽고의 내정간섭, 권문세가의 등장, 농장의 확대, 빈번한 외침 등의 사회적 변화는 신분질서의 변화를 가속화하였다. 공민왕(1352~1374) 때에는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으로 해마다 군사를 일으켜 국고가 바닥이 나 관직으로 상을 주기도 하였다고 한다.
많은 역사적 기록들을 토대로 역사드라마가 만들어지고 있는데 역사를 소재로 한 드라마가 항상 역사적 사실성과 흥미를 위한 허구성 사이에서 그 진실에 대한 논쟁을 유발시키기도 하지만 적어도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은 무시할 수 없을 것 같다.
해남윤씨가의 '노비허여문기'는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문서로서 광전이라는 실존인물에 대한 확인뿐만 아니라 고려말을 배경으로 한 당 시대인들의 다양한 삶의 자취를 느낄 수 있어 새삼 기록의 중요성을 느끼게 한다.
덧붙이는 글 | 녹우당 해남윤씨가의 5백년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