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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삼킨 숫자 이야기> 겉표지
<세계를 삼킨 숫자 이야기> 겉표지 ⓒ 생각의 나무
현대사회에서 숫자는 생활필수품으로 생각할 만하다. 그도 그럴 것이 숫자를 빼놓고 현대생활에서 가능한 일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아침에 눈을 떠서 여러분이 출근하거나 등교하는 상황을 떠올려 보시라. 얼마나 많은 숫자가 거기 개입되어 있는지 잠시 헤아려 보자.

당신은 몇 시에 일어났는가. 휴대전화나 시계를 들여다보는 당신에게 시간이 무표정하게 숫자를 가리키고 있다. 출근시간까지 남은 시간은 얼마인가. 당신은 생각에 잠긴다. 샤워나 머리감기에 얼마나 시간을 들일 것이며, 얼마 동안 식사할 수 있는가. 우유 유통기간은 아직 유효한가. 스타킹을 신고 넥타이를 매면서도 눈길은 시계바늘을 향하고 있다.

휴대전화 소리가 울리면서 낯선 번호가 찍혀 있다. 서너 번 종소리를 듣다가 전화를 받는다. 아침뉴스를 방영하는 텔레비전에도 숫자가 빼곡하다. 현재시각이 화면에 나와 있고, 각 지역의 최저기온과 최고기온, 예상강수량과 파도 높이까지 숫자로 표현된다. 각종 운동경기 결과와 기록이 수치로 정량화되어 있다. 숫자로부터 탈주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저자 코언과 저작의 구성에 대하여

<세계를 삼킨 숫자 이야기>는 17세기 이후 유럽과 미국에서 주요한 분석대상이 된 통계와 숫자를 다루고 있다. '숫자와 통계에 둘러싸인 현대인의 생활백서'라는 부제가 저작의 핵심을 극명하게 지적한다. I. 코언은 과학사를 하나의 학문분과로 자리매김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뉴턴의 <프린키피아>를 새로이 번역한 인물이기도 하다.

옮긴이는 코언과 저작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코언은 19세에 하버드 대학에 입학한 이후 70세에 정년을 맞이할 때까지 50년을 하버드에서 보냈다. 그는 뉴턴 전문가였으며, 과학혁명기의 물리학과 프랭클린이나 제퍼슨 등의 과학업적에 대한 20권 가량의 책을 남겼다. 아인슈타인의 마지막 인터뷰를 맡았으며, 사망 2주 전인 2003년 6월 탈고한 책이 <세계를 삼킨 숫자 이야기>다." (228-229쪽)

모두 아홉 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이 서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살필 수 있다. 첫 번째 장 '수의 세계'에서 다섯 번째 장인 '숫자의 새로운 활용법'까지는 우리를 둘러싼 여러 형태의 숫자들에 대한 재미난 이야기를 다룬다. 그 이후 여섯 번째 장인 '통계의 범람'부터 마지막 장인 '플로렌스 나이팅게일'까지는 통계를 둘러싼 찬반양론이 주요내용이다.

통계사상가 케틀레이, 통계로 세상을 말하다

'평균적인' 남자나 여자라는 존재를 최초로 떠올린 인물이자 '통계혁명의 주동자' 혹은 '19세기 최고의 규칙성 판매자'라 불리는 아돌프 케틀레이는 다재다능한 인간이었다. 시와 희곡을 쓰고, 오페라를 창작하였으며, 화가로도 나름대로 재능을 보인 그는 숫자와 통계를 통해 인간의 행동과 사회를 통찰하고 이해할 수 있다는 확신에 도달하였다고 한다.

케틀레이가 발견한 것 가운데 가장 놀랍고 흥미로운 사실은 범죄의 규칙성이다. 프랑스 법무부가 매년 발간한 보고서를 바탕으로 그는 범죄분석 작업을 수행하였는데, 범죄에 관한 특정한 숫자들이 해마다 반복된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아냈던 것이다. 전체피고인의 수, 대물범죄와 대인범죄의 상호비율이 해마다 변함없이 동일하였다고 전해진다.

"한해가 끝날 때 우리는 다음해에도 똑같은 범죄가 똑같은 순서대로 벌어질 것이며, 똑같은 처벌이 똑같은 비율로 이루어지리라는 슬픈 전망을 할 수 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개인이 친구의 피로 제 손을 물들일 것인지, 얼마나 많은 위조자와 독살가가 등장할 것인지 미리 계산할 수 있으며, 이것은 마치 내년 출생률과 사망률을 미리 계산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158-159쪽)

이런 근거에 힘입어 케틀레이는 "사회가 범죄를 예비하니 죄지은 자는 도구일 따름이다"는 결정론적인 명언을 남기기에 이른다. 코언은 1853년 세계최초의 통계대회를 개최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케틀레이의 영향력을 찰스 다윈, 칼 마르크스, 지그문트 프로이트 같은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인간의 사고방식을 크게 바꾸는데 기여했다고 확신한다.

토머스 칼라일과 찰스 디킨스, 통계에 반기를 들다

통계가 인간성을 빼앗고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던 칼라일은 공식통계가 사람들의 실상을 왜곡하며, 정부는 개혁을 저지하려고 통계를 사용할 따름이라고 생각하였다.

"표라는 것은 거미줄과 같다. 아름답게 짜여 있어서 바라보면 질서에 눈은 즐겁지만 거기에는 아무런 결론도 없다. 표는 추상일 뿐이다." 19세기 영국을 대표하는 인문학자이자 역사가인 칼라일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숫자에 대한 불신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노동자가 품고 있는 감정, 자기가 공정한 대우를 받고 있는지 여부에 대한 의구심을 숫자나 산수가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는가? 노동자의 신중한 평정심, 검소함, 넉넉함은 물론이려니와 그의 쓰라린 불안감, 무모함, 술에 대한 의존심, 점차적인 타락을 어떻게 숫자가 표현하겠는가?" (180쪽)

칼라일의 생각에서 커다란 영향을 받은 <위대한 유산>의 작가 디킨스 역시 통계를 극력 반대하였다. 도시빈민과 노동자의 처지를 개선하는 사회적 입법을 반대하는 근거로 정치지도자나 정부가 제시하는 것이 통계이며, 본질적으로 통계는 인간의 특질을 비인간적인 숫자의 나열로 환원함으로써 인간성을 말살한다는 것이 그가 통계를 반대하는 논거였다.

디킨스는 자신의 생각을 소설로 펴냈는데 그것이 <어려운 시절 Hard Times>이다. 냉혹하고 쓰디쓴 이 작품은 노동자를 억압하고 개인성을 말살하는 사회-경제체제에 대한 통렬한 비난과 공격을 담고 있다. 그것과 더불어 유익한 교훈까지 소설은 담고 있다.

>"작품의 주인공 그래드그라인드가 지켜온 체계, 즉 사실만을 믿고 의지하는 체계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그는 좋은 삶을 위해서는 숫자의 규칙 이상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두뇌의 법칙은 가슴의 법칙으로 보완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193쪽)

글을 마치면서

<세계를 삼킨 숫자 이야기>에는 흥미진진한 내용이 넘쳐난다. 그것은 코언의 박식하고 폭넓은 교양과 유려한 문체에 힘입은 바 크다. 저자는 17세기 이후 유럽에서 시작된 과학혁명과 숫자가 어떻게 연관되었는지를 논증하기도 하지만, 숫자에 몰두한 과학자들의 숨겨진 이야기도 들려준다. 예컨대 제3장 '수비학과 신비주의 철학'이 그렇다.

우리가 흔히 '백의의 천사'라고 부르는 나이팅게일이 어떻게 통계를 통하여 군대의 위생개선과 질병퇴치를 위하여 헌신했는지에 관한 마지막 장도 매우 신선하게 다가온다. 크림전쟁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녀는 영국군대의 보건상태에 대한 보고서를 1858년에 제출함으로써 영국군의 비위생적인 상황을 극적으로 반전시키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사물에는 양면성이 존재한다. 빛과 그림자처럼 선과 악이 공존하며,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있기 마련이다. 통계나 수치에 드리워진 어둡고 음습한 면모도 존재하지만, 그것이 명징하게 드러내 보이는 의미심장한 측면도 분명히 존재한다. 전쟁으로 인한 민간인 사망자 수나 부상자 수, 전쟁고아들의 실태조사 등은 모두 통계수치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다.

"세상에는 세 종류의 거짓말이 있는데 그것은 거짓말, 지독한 거짓말 그리고 통계다"라고 마크 트웨인은 너스레를 떨었다고 한다. 양면의 칼날처럼 유용하기도 하고 위험하기도 한 통계와 숫자를 효율적이고 과학적인 정책과 비판적이고 합리적인 사고에 원용할 수 있다면 얼마나 풍요롭고 넉넉한 현대와 미래사회가 도래하겠는가!

덧붙이는 글 | <세계를 삼킨 숫자 이야기 The Triumph of Numbers>, I. 코언 지음, 김명남 옮김, 생각의 나무, 2005.


세계를 삼킨 숫자 이야기 - 숫자와 통계에 둘러싸인 현대인의 생활백서

I. B. 코언 지음, 김명남 옮김, 생각의나무(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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