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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청학리 주공아파트 7단지. 관리사무소 건물에 들어서자 아이들 몇이 재잘대며 2층으로 향한다. 아이들은 '민들레문고'라고 적힌 예쁜 팻말이 걸린 곳으로 쏙 들어간다. 지난 11일 주민들이 모여 조촐한 개관식을 연 지 일주일 째. 드나드는 이가 제법 많다.

"왜 민들레문고냐고요? 얼마나 갈까 걱정들을 많이 하시더라고요. 민들레처럼 질긴 생명력으로 오래오래 갔으면 해서요. 또 민들레 홀씨처럼 생명력 있게 주위로 전파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까지 담았지요."

▲ 주공 7단지 관리사무소 2층에 마련된 주민도서관 '민들레 문고'는 청학리 주민이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 지역의 작은 도서관이 되는 것이 꿈이다.
ⓒ 방춘배
많은 이름이 입에 올랐지만 '민들레'라는 말에 간단히 정리되더라는 얘기를 들려주는 민들레 문고 운영위원 장봉화씨. 그만큼 주민도서관을 준비한 이들의 마음이 통했나 보다. 장봉화씨는 팻말은 옷걸이를 이용해 재활용한 작품이라는 말에 은근히 힘을 준다. 실제로 책꽂이와 마룻바닥공사를 빼고는 돈이 들어가지 않았다. 소파며 컴퓨터, 의자 등은 모두 기증받거나 재활용한 것들이다.

"주공에 요청하면 도서 1000권 지원해 줘요"

"1년에 한두 번 주민총회를 하던 공간인데 탁구를 하는 사람들이 주로 사용했어요. 처음엔 관리동 지하를 내주려는 걸 아이들에게 좋은 공간이 필요하다며 이곳을 주장했지요. 결국 이렇게 넓고 쾌적한 공간에 도서관을 만들게 됐죠."

탁구를 하는 주민들을 일일이 설득하고 20평 남짓 도서관 공간을 확보하는 데는 입주자대표회의가 앞장섰기에 가능했다. 여섯 명 운영위원 중 유일한 남성인 입주자대표회의 부회장 배성호씨는 3교대 근무 틈틈이 문고 일에 열심이다.

▲ 옷걸이 등 재활용품을 이용해 직접 만든 팻말
ⓒ 방춘배
민들레문고가 문을 열게 된 데는 이처럼 동대표와 몇몇 주민의 의지와 더불어 주택공사의 문고설립 지원방침이 큰 힘이 됐다. 사회적으로 쟁점이 되고 있는 보증금·임대료 인하와 관련해 주택공사가 '인하 대신' 문고설립지원을 약속한 것. 장봉화씨는 "주공에 요청하면 도서 1000권을 지원해 줘요"라고 귀띔했다. 7단지 주민들은 이를 적극 활용했다.

책꽂이에는 빈자리가 많다. 공간이 넓어서인지 책이 적어 보인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눈치를 챘는지 익숙하지 않은 회원관리, 도서대출 관리를 하느라 컴퓨터와 씨름하고 있던 김수옥씨가 한마디 한다. "책이 없어 보이죠? 벌써 삼분의 일은 대출됐어요."

민들레문고에는 책이 2천권쯤 된다. 주공에서 지원받은 1천권에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기증하고, 출판사에 협조를 요청해 지원받은 책, 며칠 전에는 인근 어린이집에서 150권을 기증하고 아이들이 모두 회원에 가입하는 '경사스런' 일도 있었단다.

민들레문고의 문은 청학리 모든 주민에게 열려 있다

민들레문고는 가족 중 한 사람이 가입하면 가족 모두 회원이 된다. 가입비는 1만원이다. 한 가족이 일주일에 3권을 빌릴 수 있지만 책 욕심이 많은 엄마가 늘려 줄 것을 요구해 운영위원들은 걱정이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아침 11시에 문 열어 저녁 6시까지 운영위원과 자원봉사자가 돌아가며 관리한다.

민들레문고가 문을 열면서 주목을 받는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아파트에서 만들었으니 아파트 주민만을 대상으로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민들레문고의 문은 청학리 모든 주민에게 열려 있다.

▲ 2천권의 장서를 마련한 민들레 문고는 6명의 운영위원이 꾸려 나간다. 운영위원들이 새로 들어온 기증도서에 도서카드를 붙이고 있다.
ⓒ 방춘배
"한 걸음만 나서면 앞집이지만 공동주택의 담은 높은 게 현실입니다. 소통의 매개가 필요합니다. 이것을 작은 도서관이 할 수 있습니다. 큰 도서관과 달리 쉬운 접근성을 바탕으로 다양한 문화적 욕구 해소에서부터 정보빈곤 해소 등 책을 빌려주는 기능 이상을 작은 도서관이 할 수 있습니다."

작은 도서관의 몫을 고민하는 운영위원 장봉화씨의 말이다. 함께 살지만 닫혀 있는 주거형태 속에서 공동체 정신을 회복하고 상대적 빈곤을 없앨 수 있는 소통의 매개가 바로 작은 도서관이라는 얘기다. 번듯한 서점 하나 찾기 어렵고 쇼핑이 여가생활의 전부인 마을에서 민들레 문고는 작은 홀씨가 되려고 하는 것이다.

90년대 초반 홍은동 철거민촌에서 '사랑방 주민도서실'을 운영한 경험이 있는 장봉화씨는 그곳을 따뜻한 만남이 있던 공간으로 기억했다. 마을 주민에게 무료 한방진료도 하고 때론 넝마꾼들이 책을 주워와 기증하기도 했단다. 버스기사로 일하며 무협지를 즐겨 읽던, 지금은 '세상을 바꾸는 따뜻한 이야기' 월간 <작은 책>의 편집·발행인이 된 안건모씨에 대한 기억도 들려줬다.

모두 큰 것을 좇아 '대형'과 '대박'의 꿈을 꾸고 있는 우리네 현실에서 민들레 문고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은 여전히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믿는다. 그래서일까 다 읽은 책 한 권을 내밀며 오히려 내가 더 행복해졌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남양주지역 인터넷신문 <남양주뉴스>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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