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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음사
제인 오스틴의 원작을 영화화한 <오만과 편견>이 상영 중입니다. 이 작품은 제인 오스틴이 1813년에, 자신의 소설 '첫인상'을 개작해 출간했습니다. 비단 영화뿐만 아니라 영국 BBC 등을 통해 네 차례나 미니시리즈로 제작됐을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고전입니다.

오늘의 고전독법

사형수에서 성공회대 교수로 신분이 바뀐 신영복님('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등의 저자)은 자신의 고전강독을 정리하여 출간한 <강의>(돌베개)의 머리말에서 고전을 읽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고전을 읽는 이유가 역사를 읽는 이유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과거는 현재와 미래의 디딤돌이면서 동시에 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짐이기 때문에 지혜가 되기도 할 것입니다. 그것을 지혜로 만드는 방법이 대화라고 생각합니다. 고전독법은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면서 동시에 미래와의 대화를 선취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단순히 그 시대에 있었던 역사적 사실을 암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님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굳이 E.H. Carr의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다"라는 정의를 빌지 않아도 과거의 역사를 통해 현재를 들여다보고 미래의 전망을 모색하는 것이 역사를 대하는 태도여야 한다는 점에 이견이 있을 수 없습니다.

고전을 읽는 우리의 자세가 그와 같습니다. 고전에서 배우는 값진 경험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고전은 새로운 현대의 정신과 풍속을 이어받고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이는 고전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몫이고, 독자들에겐 열린 정신을 필요로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민음사가 야심 차게 준비해 내놓은 세계문학선은 새로운 고전 독법의 기회를 제공해줍니다.

"세대마다 문학의 고전은 새로 번역되어야 한다. 엊그제의 괴테 번역이나 도스토예프스키 번역은 오늘의 감수성을 전율시키지도 감동시키지도 못한다. 오늘에는 오늘의 젊은 독자들에게 호소하는 오늘의 번역이 필요하다.... 어엿한 우리문학으로 읽히리라 자부하면서 새로운 감동과 전율을 고대하는 젊은 독자들에게 떳떳이 이 책들을 추천한다."(출판사의 추천사 중에서)

<오만과 편견>은 88번째 결실입니다. 지난 3월 영미문학회의 '번역작품 샘플평가'에서 당당히 대상을 수상하며 번역문학의 최고봉을 차지했습니다. 윤지관, 전승희 두 영문학자의 10년에 걸친 수고가 고스란히 작품 속에 녹아 있고 당대 인물들이 오늘의 사람들로 다시 태어나 성큼 우리 앞으로 걸어 나옵니다.

제인 오스틴 문학의 묘미라 할 수 있는 '묘출화법'(직접화법과 간접화법 사이의 중간화법으로 인물의 심리 상태 등이 잘 드러난다)의 적절한 구사와 풍자, 현대 풍속에 맞는 어휘의 선택 등은 독자들을 단박에 소설 속으로 빠져들게 합니다. 다양한 인물들과 소위 '신데렐라 플롯'이라 할 수 있는 줄거리 그리고 사랑과 결혼에 이르는 연인들의 탁월한 심리묘사는 두터운 책의 무게를 거의 느낄 수 없도록 합니다.

오만과 편견을 넘어선 우여곡절 결혼 이야기

영화 <오만과 편견>의 포스터, 신성 키이라 나이틀리(엘리자베스 베넷 역)의 청순한 외모가 어디선 본 듯 하다.
영화 <오만과 편견>의 포스터, 신성 키이라 나이틀리(엘리자베스 베넷 역)의 청순한 외모가 어디선 본 듯 하다. ⓒ UIP 코리아
하트퍼드셔의 작은 마을에 사는 베넷가에는 다섯 자매가 있습니다. 위 두 딸이 결혼 적령기에 이르렀습니다. 근처 네더필드에 귀족출신 빙리가 세를 얻어 이사 옵니다. 딸들을 결혼시키기 위해 안달하는 어머니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기회입니다. 큰 딸 제인은 온순하고 사려 깊으며 내성적인 예쁜 아가씨인 반면에 동생 엘리자베스는 쾌활하고 인습에 구애받지 않는 재기 발랄한 처녀입니다.

빙리와 제인은 서로 호감을 갖지만 내성적인 제인은 쉽사리 자신의 속마음을 표현하지 못합니다. 빙리의 친구인 다아시는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은 청년 귀족입니다만 남을 관찰하고 냉정하게 평가하기를 즐기는 엘리자베스의 눈에는 자부심만 강하고 남에 대한 배려에는 인색한 오만한 청년으로 비칠 뿐입니다.

사랑에는 운명의 장난이 깃드는 법이어서 제인의 사랑을 확신하지 못한 빙리는 제인을 떠나고, 오만하고 신분의 우월을 고집하는 다아시가 엘리자베스를 사랑하게 됩니다. 베넷가의 어머니와 아래 세 동생의 천박성을 이유로 내세우며 우유부단한 빙리를 제인에게서 떼어놓은 오만한 청년 다아시가 말입니다. 그것은 다아시에게 견디기 힘든 갈등을 불러일으킵니다. 엘리자베스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그는 결코 즐겁거나 행복해보이지 않습니다.

"그녀의 신분이 열등하다는 것, 그런 결혼은 집안에 수치라는 것, 그녀의 집안을 생각하면 이성은 언제나 감정에 제동을 걸었다는 것 등을 하나하나 열심히 설명했는데, 그렇게 열을 올리는 것은 지금 자신이 스스로 손상시키고 있는 그 신분 때문인 듯했지만, 그의 청혼에는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268쪽)

"애를 써보았지만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 봤자 안 될 것 같습니다. 제 감정을 억누를 수가 없습니다. 제가 당신을 열렬히 사모하고 사랑하는지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267쪽)


영화를 아직 보지 못해서 알 수 없지만 이 장면에서 다아시의 표정이 너무나 궁금해집니다. 신분과 교양의 차이에서 오는 회피하고 싶은 대상에게 사랑의 감정을 고백해야 하는 다아시의 곤혹스러움은 활자만으로도 충분히 그려집니다. 엘리자베스의 당돌한 거절은 또 얼마나 당당한가요?

그런 연인들이 오만과 편견을 넘어서 우여곡절 끝에 결혼합니다. 다아시와 엘리자베스의 사랑은 제인과 빙리의 사랑을 이어지게 하는 가교이기도 하답니다. 결코 첫인상이 그 사람의 진면목이 아니라고 깨닫는 과정에서 갈등과 오해를 풀어가는 연인들의 심리가 무척이나 세심하고 재미있게 그려져 있습니다. 경박하고 젠체하는 사촌 콜킨스에서부터 위컴과 사랑의 줄행랑을 치는 막내 리디아에 이르기까지 적절한 인물 배치는 소설의 재미를 잘 살립니다.

영화 <오만과 편견>의 한 장면
영화 <오만과 편견>의 한 장면 ⓒ UIP 코리아
전근대와 근대 사이

<오만과 편견>을 젊은 남녀의 연애와 사랑이야기로만 읽는다면 앞서 말한 참다운 고전독법은 되지 못합니다. 그들이 살던 시대는 근대 여명이 동트기 시작한 무렵으로 보입니다. 중세의 신분질서인 귀족 출신 두 청년, 콜킨스가 성직 임명될 때부터 후견인 역할을 하는 캐서린 영부인, 베넷가의 이웃인 월리엄 경 등은 전근대 사람들입니다.

베넷가는 귀족은 아니지만 생활하는데 크게 부족하지 않은 중간계급의 지주 정도로 보입니다. 그의 삼촌들은 런던에서 제법 알려진 상인이거나 변호사입니다. 군인으로 등장하는 피츠 윌리엄 대령이나 위컴 등은 아마도 몰락한 귀족가문 자제들 같습니다. 그러나 여자의 상속재산이나 노리는 걸 보면, 위컴을 전근대의 인물이라 불러야 할지 의문이 듭니다.

이처럼 귀족계급이 존재하는 가운데, 한편에서는 몰락한 귀족이 등장하고 한편에선 한참 번성하기 시작한 상업과 기술의 발달로 부를 축적한 상인(시민)계급과 변호사를 비롯한 독립자영업자가 등장합니다. 여기서 서서히 여물고 있는 근대의 봉우리들이 상징적으로 드러냅니다. 그럼에도 구시대의 신분질서가 강하게 남아 있고 새로운 질서의 형성이 미성숙하다는 점에서 그들의 시대는 전근대에서 근대로 가는 중간쯤으로 여겨집니다.

베넷 자매를 결혼시키려는 어머니의 안달은 특별한 생계수단이 없었던 그 시절 여성들의 위치를 단적으로 설명합니다. 돈 많은 사람과의 혼인이 내일을 보장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던 것이지요. 특히 베넷가처럼 아버지의 재산이 한정 상속(저도 이 제도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모릅니다)으로 사촌 콜킨스에게 고스란히 전해지는 제도의 피해자들에게는 더욱 절박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베넷 자매, 특히 둘째 엘리자베스가 다아시의 청혼을 거절하고, 미모와 집안이 아니라 활달한 재치와 지성 같은 근대 미덕으로 결혼을 성취한다는 면에서 이 시기는 근대의 밀물에 발을 담근 때라고 해도 그리 틀린 말이 아닐 것입니다. 재산이나 신분, 교양보다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이끌려 결혼을 하는 두 귀족자제의 선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재산상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연애를 성취하는 여성의 이야기는 그대로 전근대와 근대로 가는 여정을 보여줍니다.

그밖에도 소설 속에는 전근대에서 근대로의 이행을 짐작하게 하는 많은 징후들이 나옵니다. 외적 조건을 중시하는 전통적인 규범과 개인의 성품과 선택을 중시하는 새로운 개인주의적 가치관이 충돌하는 모습은 곳곳에서 드러납니다. 제인 오스틴의 업적은 바로 전근대와 근대, 구질서와 새로운 정신의 대립과 충돌이 일어나는 시대의 한복판에서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균형 잡힌 시각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역자의 표현처럼 영국적 중용일 수도 있을 것이며 합리성에 근거한 타협의 산물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바람이 봄을 시샘하는 어수선한 계절에 영화관 옆 문학카페에 들러 제인 오스틴이 전해주는 이야기를 보고 읽으며, 때로는 무심한 시선을 창밖으로 던지며 마시는 커피 한잔, 어떠세요?

오만과 편견

제인 오스틴 지음, 민음사(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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