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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영유권과 관련하여 일본 측이 제시하는 핵심 근거는 1905년 2월 22일 시마네현 고시 제40호다. 독도를 자국 영토로 편입한 시마네현 고시(告示)를 근거로, 일본은 국제법상 선점 이론에 따라 자국이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갖게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최근 일본이 "국제법적으로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독도는 본래 일본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여기서는 논의의 편의상 일본의 국제법적 주장에 국한하여 검토하기로 한다.
독도편입 시기 자체가 문제
시마네현 고시의 내용이 맞든 틀리든 간에, 고시가 행해진 시점 때문에 일본의 독도 편입결정은 원천적으로 무효가 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 시점은 일본이 한반도를 단독으로 장악하고 있었으며 대한제국이 일본에 대해 아무런 항거도 할 수 없는 때였기 때문이다. 1905년 2월 22일이 어떤 시점인가를 보다 명확히 이해하기 위하여,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전쟁이 언제부터 본격화되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학계에서 이미 충분히 논의된 바와 같이, 일본은 1871년 탈아외교(脫亞外交) 표방 이후로 동북아 정복을 위한 단계를 밟아 나갔으며, 그것은 대만침공(1874년)-운요호사건(1875년)-오키나와합병(1879년) 등으로 표출되었다. 그리고 일본의 동북아정복 프로젝트는 1894년 청일전쟁을 계기로 본격화되었다. 청일전쟁은 '일본 제국주의 대외침략의 본격화'라고 평가할 수 있는 사건이다.
1895년 이후 한반도에서 러·일 세력균형
청일전쟁과 그 전후처리협정인 1895년 마관조약(시모노세키조약, 하관조약)을 통해 청나라를 한반도 무대에서 축출한 일본은, 삼국간섭(1895년) 이후 한동안 러시아와 공동으로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 시기에는 러·일 간에 일종의 세력균형이 존재했다.
이 시기에는 러·일 양국 중 어느 한쪽도 한반도에 대해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러·일 양국이 서로 상대방을 견제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를 칭할 수 있었던 것도 러·일 간의 세력균형 속에서 어느 정도의 독자적 입지를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세력균형에 금이 가기 시작한 계기는 1897년 11월 14일 독일의 교주만 점령이다. 우리나라 황해 서쪽에 있는 산동반도의 교주만이 독일의 수중에 들어가자, 이에 위협을 느낀 러시아도 1898년 3월 26일 랴오둥반도(평안도 서쪽)의 뤼순·다롄을 점령하게 되었다.
그런데 러시아의 뤼순·다롄 점령은 일종의 자충수가 되었다. 이로 인해 영국·청나라·일본이 러시아에 대항하는 공동전선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국제적 고립을 타파하기 위한 임시방편의 일환으로, 러시아는 일본과 협정을 체결하기로 했다.
일본, 1898년 이후 한반도 단독 장악
로젠-니시 협정(1898. 4. 25)이라고 불리는 이 협정에 따라, 러시아는 대한제국 주재 훈련교관 및 재정고문들을 철수시키고 한반도에서 완전히 손을 떼게 되었다. 로젠-니시 협정을 계기로 일본은 단독으로 한반도를 장악하게 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만주와 중국 본토에 대한 침략을 본격화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일본의 지배가 한층 더 공고해지는 동시에 대한제국이 사실상 '식물인간'이 되어 가고 있던 1905년 2월 22일에 일본 측의 일방적인 독도편입결정이 나왔다.
일본의 행위는 마치 이웃 주민이 식물인간이 되어 병원에 누워 있는 틈을 타서 이웃의 재산을 '내 것'이라고 선언하는 것과 똑같은 행위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진정한 소유권자라면, 이웃이 입원하기 이전 혹은 퇴원한 이후에도 얼마든지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입원 이전이나 퇴원 이후에 소유권을 주장하지 못한다면, 뭔가 문제가 있을 것이라는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만약 일본이 독도의 진정한 '주인'이라면, 1898년 4월 25일 이전 혹은 1945년 8월 15일 이후에 독도편입결정을 했어야 한다. 일본이 진정한 '주인'이라면, 설령 일본의 국력이 좀 약한 시기에 독도편입결정이 나왔더라도 한국이 이를 비판할 명분은 없을 것이다.
강박상태에서 이루어진 결정은 무효
그러나 일본의 독도편입결정은, 조선이 일제의 강박상태에 있었던 '1898년 4월 25일 이후부터 1945년 8월 15일 이전'에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타당성을 가질 수 없다. 대한제국을 '납치·감금'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결정이기에, 다시 말해 강박상태에서 이루어진 결정이기에, 그 내용의 타당성 여부를 따질 필요도 없이 그 결정은 원천적으로 무효인 것이다.
지금까지 논의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일본은 1894년 청일전쟁 때부터 제국주의 침략전쟁을 본격화하였으며, 1898년 4월부터는 러시아와의 로젠-니시 협정에 따라 한반도를 단독으로 장악하게 되었다. 그리고 1898년 4월 이후 조선은 일본에 대해 아무런 항거도 할 수 없는 강박상태에 빠졌다. 그러므로 그러한 강박상태에서 이루어진 일본의 독도편입결정은 원천 무효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강박상태 하에서 이루어진 것이라서 원천 무효임에도 일본이 1945년 패망 이후에도 여전히 시마네현 고시의 유효성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은, 한국·북한·중국이 아닌 미국이 전후처리의 주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전후 미국이 일본에 대해 '문책'한 것은 대부분 자신들과 직접 관계가 있는 사안에만 국한되었다. 만약 한국·북한·중국이 전후처리의 주체가 되었다면, 1945년 이후로 일본이 독도나 조어도(센카쿠열도)에 대해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뉴스 615>에도 동시에 실리는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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