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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4 장 흑룡기주(黑龍旗主)
어찌 된 일일까? 이미 도착할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마차는 더욱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마차 안에는 여자 네 명만이 타고 있었고, 그들은 한결같이 오랜 여정에 지루해 하고 있었다. 마차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자 참지 못한 서가화가 밖을 향해 물었다.
“정노(程老).....! 아직 멀었어요?”
정노는 서장군가의 가정(家丁)으로 이번 여정에 데리고 나온 초로의 노인. 정노를 포함해 데리고 나온 식솔들만 모두 다섯 명 뿐이다. 번거롭다 하여 호위무사들은 데리고 오지 않았고, 마차 안에 같이 앉아있는 시비 두 명과 정노 그리고 믿을만한 두 장정뿐이었다.
허나 밖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마차를 모는 정노인이 못 들었을 리는 없을 것인데 대답이 없자 서가화가 다시 목소리를 높이며 불렀다.
“정노....!”
그제 서야 마지못해 정노의 늙수레한 목소리가 떠듬거리며 들렸다.
“아가씨.... 그게....”
뭔가 석연치 않은 말투다. 정노가 왜 저러는 것일까? 서가화는 창문의 휘장을 걷으며 밖을 바라보았다. 그 때 말발굽 소리와 함께 말을 탄 사내가 휘장이 걷힌 창문 쪽으로 다가들었다.
“문제가 생겨 일정이 바뀌었소. 나중에 말씀드릴 터이니.....”
들어 본 목소리다. 마차 안에 있던 송하령이 창가로 다가들며 물었다.
“조대주이신가요?”
얼굴은 아직까지 창백했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었을까? 그녀의 얼굴에는 생기가 흐른다.
“조국명(趙國明)이 주모를 뵈오. 일이 급박해 인사를 드리지 못한 점 사과드리오.”
송하령의 눈에 비친 인물은 뜻밖에도 조국명이었다. 그는 말을 타고 마차와 일정한 속도로 달리면서도 가볍게 포권을 취한다. 헌데 어찌하여 그가 왜 이 마차를 호위하게 된 것일까?
“무슨 일이 있나요? 우리는 용대에 있는 이가장으로 가려 했는데.....”
“영주께서 전갈을 보내셨다는 연락을 받았소. 주모를 정주로 모시라는 말씀이 계셨다하오. 아마 그곳에서 영주를 만나보실 수 있을 것 같소.”
확실치 않은 대답이었다. 조국명은 힐끗 앞서 가고 있는 요광대(搖光隊) 수석조장인 반중유(潘重愈) 조장을 보다가 다시 송하령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럼 우리는 지금 이가장을 들르지 않고 정주로 가는 건가요?”
“그렇소이다. 갑자기 중원의 정세가 급박하게 변해가고 있소. 너무 흉흉하여 이런 시기에 주모께서 이리저리 다니시다가는 어떤 변을 당하실지 모르오. 더구나 이가장 역시 안전한 곳은 아닌 것 같소.”
이상한 일이었다. 이 마차를 은밀하게 뒤따르며 호위하던 옥형위의 이개조가 거의 몰살당한 것 같은데 어떻게 조국명이 이 마차를 호위하게 된 것일까?
“조대주께서는 이가장에 계시지 않으셨던 모양이군요.”
“그렇소. 영주께서 지시한 일을 처리하고 이가장으로 돌아가는 길에 연락을 받았소.”
“얼마나 걸릴까요?”
“족히 닷새 정도는 걸릴 것 같소이다. 불편하신 몸인지 알고 있으나 조금만 더 참아주시길....”
“소첩은 괜찮아요. 조대주께서 계시니 한결 마음이 놓이는군요.”
송하령은 해사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조국명의 입가에도 엷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심성이 곱고 가냘프지만 보기와 다르게 심지가 굳다. 사랑은 아마 그녀의 삶을 이어주는 유일한 힘일 것이다. 오랜 여정이겠지만 그녀는 그 힘으로 참아낼 수 있을 것이다.
“별말씀을... 편안한 마음을 가지시고 쉬시길.....”
조국명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서가화가 불쑥 물었다.
“산길이나 험한 길은 되도록 피해주시면 좋을 것 같네요. 언니 몸이 정상이 아니라....부탁드려요.”
“충분히 알고 있소. 다만 답답하시더라도 되도록 밖으로 얼굴을 보이시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소이다.”
조국명의 얼굴에는 여전히 엷은 미소가 흐르고 있었지만 은은하게 긴장감도 감돌고 있었다. 무슨 연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서가화는 고개를 끄떡였다. 그녀의 눈으로 마차를 호위하며 움직이고 있는 인물들이 십여 명은 넘어 보였다. 그녀는 내심 안도하며 휘장을 닫았다.
“언니..... 잘 생긴 분인데.....? 균대위에 있는 분이야?”
허나 조국명은 마차와 말발굽 소리에 서가화의 말을 듣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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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劍)과 검(劍)이 허공에서 십여 차례 부닥친 것도 같았다. 사방으로 난비하는 검영으로 누가 누군지 알아보기 힘들었다. 신형 또한 쾌속하게 움직이고 있어 더욱 분간하기 어려운 상태였지만 가까이 갈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한 혈투였다.
파파파팍-----!
어둠 속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리고 한 순간 모든 검영과 불꽃이 씻은 듯 사라졌다. 모습을 나타난 두 인물은 사오 장 정도 거리를 둔 채 검을 치켜세우고 있었다. 뒤늦게 잘려진 앞섬이 나풀거리며 지면에 떨어져 내렸다.
풍철한의 오른쪽 가슴 근처의 예리하게 갈라진 앞섬 사이로 가늘게 피가 배어나왔다. 허나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것은 아니었다.
“제법이구나. 무당검의 오의(奧義)를 완벽히 깨달았다니.........”
칭찬인가? 아니면 비웃음인가? 풍철한은 고소를 머금었다. 마지막 검을 막아내지 못했다. 변화가 표흘하고, 힘에 있어서도 자신에 비해 밀리지 않는다.
“사일검법(射日劍法)이 극에 달하면 그 어떠한 검법보다 무섭다고 하더니.... 현천(玄天) 선배의 검은 정말 무서웠소.”
풍철한의 상대는 풍채가 당당한 초로의 노인이었는데 반백의 머리와 부리부리한 호목으로 인해 본래의 나이보다 더 젊게 보였다. 사일검법(射日劍法)은 점창 비전의 절학으로 빠른 변화와 강맹함을 위주로 한 점창 최고의 검법이다.
“자네가 아직까지 노부를 기억하고 있다니 뜻밖이군. 하기야 노부 역시 자네가 기억났으니 당연한 일이겠지.”
처음부터 균대위에 소속되어 있던 녀석은 아니었다. 가끔 균대위에 들러 이 사람 저 사람에게서 사사받기도 하였지만 무당의 속가제자라 정식으로 다른 사부를 모신 적도 없었다. 천방지축 철모르고 날뛰던 아이. 덩치만 커 가지고 힘으로만 검을 휘두르던 녀석이었다.
“어찌 나이 삼십에 점창의 비전 사일검법을 완벽히 소화해냈다는 사일검 현천선배를 잊을 수 있겠소?”
그 말에 현천이라는 노인의 입술 끝이 비틀어졌다. 풍철한의 말에는 뼈가 들어있었다. 아니 풍철한은 그런 의미로 말하지 않았어도 듣는 장본인은 뼈있는 말로 들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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