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뱃속에서 아기는 어떤 생각을 하며 지낼까? 제왕절개 수술로 세상에 나오게 되는 아기는 어떤 느낌을 가지게 될까? 아기의 신체와 뇌, 영혼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태어나 처음 접하는 수많은 사물들을 아기는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을까? 아기는 스스로 얼마만큼의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어른들의 도움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우리 사회 최고의 약자, 아기들의 속삭임을 담은 책이 나왔다. 말도 못하고, 자신의 신체도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아기들이 세상과 만나면서 어떤 느낌을 갖게 되는지를 아기의 입장에서 세세하게 살핀 책 <아기에게서 온 편지>.
...제가 그동안 느낀 것이지만 사람의 모습이 되는 일은 정말 엄청나게 큰일이었어요. 정말이지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갖추어야 할 것이 많더군요. 머리, 얼굴, 목, 몸통, 손과 발처럼 엄마 아빠가 맨 처음 보게 될 저의 겉모습을 갖추는 것은 그래도 쉬운 일이었어요. 문제는 그 조그만 몸속에 들어있어야 하는 온갖 핏줄과 근육과 뼈와 뱃속의 수많은 장기를 만드는 일과 그 복잡한 머릿속 뇌를 만들 땐 정말 정신이 없었어요...
머리와 얼굴과 목을 형성하는 아기라니. 몸속의 핏줄과 근육과 뼈를 만드는 아기라니. 아기가 그런 기관들을 스스로 만들어간다니 이 얼마나 기발한 생각인가. 아기는 눈과 코를 스스로 주조했을까, 아니면 자연히 만들어지는 과정일 뿐일까. 자연적인 힘에 의한 것이라면 그 과정에서 아기는 고통을 느낄까. 뱃속의 장기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아기는 어떤 역할을 하게 되고 얼마만큼의 신체적 아픔을 느끼게 될까.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탄생'의 과정을 탄생의 당사자인 아기의 시선으로 들여다본 작가의 상상력이 신선하다.
임신과 출산, 육아에 관해 우리 사회에서 당연하게 여겨지는 많은 것들에 대해 작가는 '아이'의 입장에서 바라보며 예리한 질타를 날린다.
...그런데 엄마 아빠, 제가 엄마 뱃속에서 가장 슬프고 힘들었을 때가 언제인지 아세요? 제가 어떤 장애를 가지고 태어날지 의심하고 불안해하고 병원에서 검사를 할 때였어요. 제 건강을 지켜주고 치료해주기 위한 것이라고 믿고 싶었지만 자구 엄마가 어쩌면 저를 버릴지도 모른다는 무서움이 머릿속에 떠나질 않았거든요. 엄마, 의심받고 있을 때 힘들잖아요. 엄마, 짐이 되고 있을 때 슬프잖아요. 엄마, 생명에 위험이 느껴질 때 정말 무섭잖아요...
임신과 동시에 행해지는 많은 검사들이 있다. 다달이 받게 되는 기형아 검사, 입체 초음파, 양수 검사. 우리는 일정 기한이 되면 기형아 검사를 통해 어떤 장애들이 있는가를 검사받고, 또 일정 기한이 되면 초음파를 통해 손가락 발가락 등 외형상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갖추어져 있는지를 알게 된다. 대다수의 임산부들이 이 과정을 '당연히 해야 되는 절차'쯤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은 아기에게는 하나의 '위협'이다. 내가 정상인이 아니라면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정상인이어야만 세상의 빛을 보게 되리라는 단계적인 시험절차.
작가의 시선은 자연적인 분만법이 아닌 인공적인 분만법, '제왕절개'로도 향한다.
...엄마 아빠, 갑자기 무슨 일이 일어난 거예요? 너무 놀랍고 무서워요. 제 뜻을 모른 척하고 갑자기 저를 엄마한테서 꺼내다니... 저는 엄마 뱃속에서 있을 만큼 있다가 마음 단단히 하고 제 뜻과 힘으로 엄마와 헤어지려 했는데... 이렇게 갑자기 엄마와 떨어지니 너무 허전하고 섭섭하고 무서워요...
제왕절개, 신생아실의 별도 운영, 산후 조리원 시설 이용 등 우리 사회에서 대부분의 산모와 아기가 거쳐 가는 모든 과정은 '아기'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낯설고 두렵고 쓸쓸하다. 아기를 낳은 엄마가 산후휴가를 마친 후 직장에 나가는 것, 다른 이에게 맡겨지게 되는 것, 모유 대신 분유를 먹게 되는 것 이 모든 것들이 아기에겐 섭섭하고 슬픈 일이다.
또한 작가는 정부의 출산장려정책의 비합리성에 관해서도 날카로운 질타를 날린다.
...아기 엄마, 우리나라에서 지금 모성이 정부혜택 받으려면 이렇게 해야 해. 우선 실력을 갖추어 법이 잘 지켜지는 좋은 직장에 반드시 취직해야 해. 급여가 높은 곳에 취직해야 출산휴가비도 많이 받아. 상한선이 있긴 하지만 통상임금을 주거든. 그리고 건강해야 해. 임신해도 절대로 그만두지 않고 악착같이 다니고 아이가 태어나면 아이는 90일 지나서 꼭 시설에 맡기고 또 악착같이 계속 직장 다녀야 해. 취직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서 취직 못 하고 있다가 결혼하고 임신하면 아무 혜택도 못 받아. 또 임신 때문에 건강이 좋지 않아 직장을 그만 두어도 혜택을 받을 수가 없어. 아프고 힘들어서 직장일 그만두면 꽝이야. 아이가 하나 있고 취직이 안 된 상태에서 임신해도 아무런 혜택을 받을 수 없어...
작가는 '고소득 직장 여성'에게만 혜택이 돌아가게 되는 지금의 출산장려정책의 비합리성을 지적한다. 결국 대다수의 가임기 여성들이 이러한 혜택을 받을 수 없는 계약직이거나 전업주부라는 점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임신한 모든 여성, 태어나는 모든 아기, 아기의 출생을 맞은 모든 엄마들에게 똑같은 혜택을 주어야 해. 적어도 임신을 장려하고 모성을 보호한다면 무슨 조건을 달지 말고 임신 후 아이를 돌봐야 하는 모든 모성을 차별 없이 대하는 것이 맞잖아. 동일노동 동일임금. 좋은 직장에 다니고 있던, 비정규직이던, 집안일 하고 있었던, 임신하고 아이 출생을 맞는 것은 똑같잖아. 학교의무교육도 그렇게 조건 따져가면서 시키나? 그냥 국민이면 누구나 받잖아...
뉴스에서 출산장려정책이라고 매번 발표할 때마다 무심코 흘려들었었다. 출산휴가 세 번째 달의 임금을 나라에서 지원해주겠다고 했을 때에도 '이제 우리나라도 좀 복지국가 흉내를 내기 시작하는 것이군'하고 내심 흡족해 했다. 그 뉴스를 들은 많은 수의 전업주부 임산부, 계약직 근로 임산부들의 소외감과 박탈감에 관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회사에 다니던 여성이 출산관련 보조금 지급을 받을 때, 전업주부였던 여성이 아무런 혜택을 받지 못하고 혼자서 모든 걸 해결하면서 느꼈을 자격지심에 관해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옆집 아줌마가 갓 결혼한 새댁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을 취한 이 부록은 이 책 전체를 통틀어 가장 신랄한 사회비판적 성격을 가진다. 독자들의 사고방식에 가장 큰 전환을 가져다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책은 아기에게만 초점을 맞춘 나머지 아기를 임신하고 출산하는 주체인 또 다른 인격체인 '여성'에 대해서는 일방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아기가 태어나면 여성은 직장을 나가기보다는 아기를 돌보는 일에 전적으로 임해야 한다는 것.
현대사회에서 여성의 지위가 상승한 핵심요인은 '임신과 출산'으로부터의 자유에 있다. 임신과 출산을 선택할 수 없었던 과거의 여성들은 평생을 임신과 출산, 육아에만 집중하면서 인생을 마감했고 이는 원천적으로 사회진출을 봉쇄했다. 과학기술의 발달이 피임을 불러오면서 여성은 출산을 선택할 수 있게 되었지만 아직도 임신과 출산, 육아는 많은 여성들의 삶의 질에 실질적으로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종래의 페미니스트들이 '여성이 밖에서 일을 하는 것'만이 근본적으로 여성의 처지를 개선시키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입장을 취해온 것과는 달리 근래에는 '인권분만, 친환경적 육아' 등 여성 본연의 업에 충실하며 자연과 여성성을 회복하는 것이 진정한 페미니즘이라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끊임없이 '여자도 자기 일을 가져야 한다'며 환상적인 커리어 우먼의 이미지를 불어넣고 있다. 아울러 육아가 끝난 후의 여성의 인생에 있어서도 아직 그럴싸한 롤모델이 서 있지 않은 상태다. 여성의 자립과 여성 본연의 업(출산, 육아)을 강조하는 정반대의 사고방식들이 다양한 대중매체를 통해 이미지화되고 있으며 현대 여성들은 그 누구도 이런 모순 된 여성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게 해서 결국 일을 가진 엄마는 아이에 대한 죄책감에, 아이 키우면서 전업주부인 엄마들은 상대적 박탈감으로 괴로워하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의 출판은 현대 여성들이 처한 이런 복잡한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저자가 아이의 입을 빌어 속삭이는 이런 생각들이 전통적 페미니스트뿐만 아니라 이 사회 각계각층의 모두가 한번쯤 생각해보아야 할 근본적인 문제들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