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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사일검 현천은 그런 감정을 떨쳐버리 듯 고개를 두세 번 흔들었다.

“노부의 얼굴에 금칠을 하지 말게. 자네의 양의검법(兩儀劍法) 역시 노부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으니까.....”

“과찬의 말씀...... 헌데 일엽(一葉) 그 녀석은 잘 있소? 영주를 노리다가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하던데....”

“곧 이곳에 당도할걸세. 생각해 보니 자네와 겨루면 좋은 승부가 되겠군.”

풍철한이 피식 웃었다.

“그 말은 마치 내가 선배에게는 한참이나 못 미친다고 말하는 것과 같구려. 일엽이 육맥신검을 연성했다는 말은 들었소. 허나 나를 모르는 사람들은 대개 그렇게 말하오. 그렇지만 나는 풍철한이오.”

일엽은 바로 사일검 현천의 제자다. 허나 일엽과 자신을 비교한다는 것은 자신을 업신여기는 것과 같다. 풍철한 만큼 자신에 대해 자부심을 가진 인물도 드문 터. 풍철한은 검을 비스듬히 세우며 전신을 긴장시켰다.

“어렸을 때와 다름없이 광망스럽다 할 정도군.... 그 아이는 육맥신검을 대성했네. 천룡무상신공도 역시 마찬가지..... 자네처럼 입으로 큰소리치는 것은 승부와는 전혀 무관하네. 승부는 말로 결정되는 게 아니야. 이 말은 한 때 균대위에 몸을 담은 적이 있던 노부가 정말 한심스러워 하는 말이네. 자네 정도가 풋내 나는 아이들을 가지고 감히 균대위의 개양대 대주를 맡고 있다니 말이야.”

“보기와는 달리 현천 선배는 얼굴에 스스로 금칠을 할 줄 아는 분이셨구려. 그것은 조직을 배신하고 떠난 사람이 할 말은 아니오. 더구나 등을 돌리고 떠난 조직에 칼을 들이대는 사람이 할 말은 더 더욱 아니오.”

풍철한은 의식적으로 조롱하는 듯한 비웃음을 떠올렸다. 상대가 자신을 격동시키는 것 이상으로 상대를 격동시키려 했다. 허나 노인은 격분하거나 감정에 흔들리지 않았다.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배반....? 조직을 떠났다 해서 배반했다고 말하는 겐가? 이미 존재 가치조차 잃어버린 조직에 머물고 있어야 충성이란 말인가? 더구나 조직의 수장이 황실에 이용당하고 죽음을 당했음을 알고도 황제를 위해 일하는 것이 조직에 대한 충성인가?”

현천도 할 말은 많았다. 그저 조직을 떠났다고 배신자로 낙인찍히는 것은 그 스스로 인정할 수 없었다. 그건 절대 아니었다.

“죽음이 두려워 눈치만 보고 조직에 남아 있는 것이 충성이었냔 말일세. 하기야 자네는 당시 어려서 그런 속사정까지 알지 못했겠지만.......”

헌데 그 때였다. 갑자기 어디선가 벼락이 치는 듯한 고함이 들렸다.

“현천..... 네 이놈,,,,!”

고함은 장내에서 드잡이질을 하는 인물들의 고막을 파고들어 파열시킬 듯 했다. 곳곳에서 혈전을 벌이던 인물들이 그 고함에 놀라 분분히 싸움을 멈출 정도였다. 동시에 현천의 머리 위로 엄청난 광풍이 몰아치듯 가공할 기류가 쏟아져 내렸다.

쿠쿠쿵---!

누군가? 도대체 누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이렇듯 가공할 경력을 짓쳐오는 것인가? 사일검 현천은 상대를 알아볼 사이도 없이 갑작스런 변화에 몸을 눕히며 일순간에 검을 처 올렸다.

츠으파--- 퍼퍽---!

현천의 몸이 엄청난 압력에 밀려 튕겨나가듯 지면에 끌리면서 일장 여 정도 밀려나갔다. 막강한 압력을 해소시키려 짧은 순간에 검을 십여 초나 펼쳐냈음에도 오히려 검을 잡은 손아귀에 맹렬한 통증이 느껴지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허나 현천 역시 초절정의 노련한 검수였다. 그는 몸을 뒤집으면서 신형을 재빨리 세웠다.

“누....누구.......”

현천은 순간적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 노인이 누군지 아는 순간 현천은 머리 속에 하얗게 비는 느낌이었다. 현천의 전면에는 한 노인이 서 있었는데 그 노인의 입에서 또 다시 벼락같은 고함성이 터졌다.

“감히 네 놈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단 말이냐?”

허나 그 노인은 다행스럽게 놀라 몸이 경직된 현천을 더 이상 공격하지는 않았다. 이어 그 노인의 뒤로는 네 명의 노인이 가볍게 내려섰다.

“당...당신은....?”

여전히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좀 전까지 어떠한 일이 있어도 흔들릴 것 같지 않던 현천의 깊고 맑은 눈엔 격랑이 일고 뚜렷하게 경악스런 빛이 표출되고 있었다. 표정 역시 쉴 새 없이 변했다.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가운데 입이 벌어졌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저 인물이 살아있다니.... 더구나 그 뒤에 내려 선 노인들이 누군지 아는 순간 현천은 오늘 일이 예상대로 풀리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허나 그것은 나중 일이었고, 더 이상 그런 생각을 이어 나갈 수 없었다.

“이....이미..... 죽지 않았소?”

“내가 유령이라도 된다는 말투로구나?”

“어....어떻게...... 열세 명 모두 죽었다고 들었....는데......”

현천은 아직 제 정신을 차리지 못한 듯 했다. 그만큼 무곡이란 노인이 존재에 대한 충격이 컸다. 과거 균대위 내에서도 무곡은 추혼사자(追魂使者)였다. 균대위의 인물은 대부분 내노라 하는 인물들만 모여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전설을 가진 인물이었다.

“네 놈들이 멀쩡하게 살아있는데 노부가 어찌 죽을 있을까? 네 놈과 같이 지금에 와서 허튼 소리를 지껄이는 놈들의 입이라도 뭉개버려야 하지 않겠나? 우선은 네 놈의 입부터 뭉개놔야겠지만 말이야.”

현천은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지금 무의식적으로 무곡에 대한 두려움이 솟아올랐지만 정신을 차리며 애써 무시하려고 했다. 세월이 이미 많이 흘렀다. 그리고 세상도 변했다. 또한 자신도 과거의 그가 아니듯 무곡 역시 마찬가지다.

더구나 이곳에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동료들이 있다. 모두 없애야 할 놈 중에 한 놈을 놓치는 바람에 먼저 움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 조금 성급했다지만 그들도 반시진이 지나지 않아 이곳에 당도할 터였다. 그는 주위를 의식하며 내심 숨을 골랐다.

(시간....시간을 벌어야 한다.)

무곡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은 아직 가시지 않았다. 자신이 과거 한 때 두려움과 경외감을 가졌던 인물이라면 세월이 얼마나 흐르던, 어떻게 변하던 그러한 감정을 극복하기 쉽지 않다. 현천은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역시 세상의 소문이란 믿을 것이 못되는구려. 대명의 하늘 아래 대명의 황제를 시해하려 한 사람이 아직까지 살아 있는 일은 아마 대주와 세 노형의 경우가 유일할 거요. 정말 대주께서 살아 계신지 정말 몰랐소.”

현천은 새삼스레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그것은 과거 한솥밥을 먹었던 선배에 대한 예의처럼 보였지만 무곡은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마치 반드시 죽었어야 하고, 죽기를 바란 놈 같구나..... 그렇겠지. 비겁하게 도망친 놈들이니까....”

과거 그 당시 무곡은 참을 수 없었다. 담명 장군이 살해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그 순간부터 무곡은 복수심에 불타올랐다. 기껏 부려먹고 자신이 모시던 담명장군을 죽인 주원장을 가만 둘 수 없었다.

황제를 시해하기 위한 준비가 시작됐다. 균대위 내에서 뜻을 같이 하는 인물들을 모으기 위해 노력했다.

“어차피 생각은 모두 다르고, 타인이 그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도 모두 다른 법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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