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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탄 살라딘>
<술탄 살라딘> ⓒ 미래M&B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거장 리들리 스콧이 메가폰을 잡은 액션 대작 <킹덤 오브 헤븐>이 지난해 개봉했습니다. 대장장이로 살아가던 발리앙(올랜도 블룸 분)이 우연한 기회에 십자군 원정 기사가 되어 성지 예루살렘에 이르고 이교도로부터 예루살렘을 지켜낸 영웅담을 그렸던 영화였습니다. 영화가 당대 기독교도들이 가진 성지 예루살렘에 대한 동경과 구원을 그렸다면 소설 <술탄 살라딘>은 무슬림이 꿈꾼 '킹덤 오브 헤븐'의 이상을 추억합니다.

중세의 '알 쿠디스(기독교도들의 예루살렘)'는 신의 도시입니다. 기독교의 신, 유대민족의 신, 무슬림의 신이 함께 살고 있는 도시인 것이지요(믿는 자에게 신은 늘 곁에 머무르는 존재입니다).

신은 왜 그곳에서 함께 살게 되었는지? 그 때문에 역사는 처절한 피를 흘리고 신의 땅은 잔혹한 살육이 난무합니다. 같은 땅에 예수와 마호메트를 내려보낸 하늘의 심술은 그 땅을 인간의 지옥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 잔인한 형벌은 800여 년이 흐른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세계의 화약고 팔레스타인, 전쟁의 한복판 이라크가 그러합니다.

왜곡된 역사 바로잡기

영화에서 십자군 원정 기사단은 '야만의 무리' 무슬림으로부터 구원의 도시 예루살렘을 해방시키는 선한 이미지로 그려집니다. 또한 발리앙이 술탄 살라딘('살라흐 앗 딘'이 유럽인들의 귀에는 그렇게 들렸나봅니다)으로부터 예루살렘을 지켜내는 것으로 그려지고 그 성지의 사람들은 유일신 하나님의 율법을 착실히 지키며 살아가는 독실한 신자처럼 보입니다. 무슬림들은 야만의 족속이자 하나님을 부정하는 이교도로 비칩니다. 그것이 역사의 진실일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그것은 새빨간 거짓입니다. 성지회복의 명분을 내세워 교황권을 강화하려는 교황(우르반 2세)과 동방의 부에 눈독을 들인 봉건제후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마침내 1차 십자군의 원정이 시작되고 1099년 예루살렘에 기사단이 입성합니다. 이때까지가 성지회복이라는 종교적 열정과 이상이 구현된 유일한 원정입니다.

성지에 입성한 기독교도들은 유대민족을 포함한 무슬림들을 닥치는 대로 학살합니다. 이미 종교적 이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이지요. 성지는 반목과 대립 그리고 타락의 소굴로 변모하고 맙니다.

고토회복을 염원하는 무슬림 세상에 위대한 쿠르드족의 전사 살라흐 앗 딘이 등장하는 것이 이 무렵입니다. 바그다드의 압바스 왕조를 계승하는 수니파 무슬림인 이 전사는 당시 시아파 무슬림의 입장에 있던 이집트의 파티마왕조의 술탄이 되어 나일강에서 메소포타미아에 이르는 제국을 건설합니다.

이제 남은 것은 그들의 성지 알 쿠디스를 이교도의 압제에서 해방시키는 일 뿐입니다. '한 손에는 코란을, 한 손에는 칼을'이라며 서양의 왜곡된 역사관이 조작한 것과는 사뭇 다른 이 영명한 통치자는 이교도들에게도 관대한 위대한 인물입니다.

바야흐로 이슬람 제국의 전성기, 무슬림의 황금기가 그에 의해 열리는 것이지요. 당시 예루살렘의 통치자는 볼드윈 4세입니다. 나병 환자인 그는 영화에서 철가면을 쓰고 등장합니다. 그에 의해 아슬아슬한 평화를 유지하던 성지는 그의 사후 강경파 기사 '샤티옹의 레지날드'(영화에서는 '루지앵')의 도발로 깨지고 맙니다. 마침내 알 쿠디스가 술탄 살라딘에 의해 해방되는 것이지요.

그는 기독교도 누구도 함부로 해치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술탄 살라흐 앗 딘의 재위 시절에는 종교적 이유로 함부로 목숨을 빼앗는 보복은 일어나지 않았으니까요. 발리앙은 술탄 살라딘의 관용에 따라 예루살렘 성안의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치안을 유지하도록 위임된 원정기사단의 수임인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런 그가 공주와 사랑에 빠지는 등의 허구는 영화적 상상력이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1차 이후(특히 4차 이후) 극심한 타락상을 보인 원정기사단의 횡포처럼 무슬림에게 포악의 혐의를 덧씌우는 것은 오늘에도 여전한 서양 기독교도들의 빗나간 우월의식이자 역사왜곡에 지나지 않습니다.

알라 후 아크바르!(신은 위대하다!)-'술탄 살라딘'

영화에 나오는 술탄 살라흐 앗 딘과 발리앙의 대면, 그리고 (술탄의 입장에서) 이교도들에 대한 술탄의 관용을 소설은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발리앙에게) 왜 저렇게들 우는 것이오?"

"여자들은 죽거나 포로가 된 남편들 때문에 웁니다. 전하, 노인들은 이 성스러운 벽을 다시 보지 못할까 걱정이 되어 웁니다. 아이들은 겁을 집어 먹은 것이구요."

"당신네 사람들에게 말하시오. 우리는 당신네 선조들이 처음 이 도시를 점령했을 때 우리를 대접한 것처럼 당신들을 대접하지는 않을 거요… 두려워하는 이 기독교도들에게 우리 신자와 유대인들이 90년 전에 무슨 일을 겪었는지 말해주시오… 이 거리에는 우리의 피가 흘러넘쳤소, 발리앙… 이 거리에 피가 흐르기를 바라오. 물론 이번에는 당신들 피지… 나는 우리가 모두 성서의 사람들이며 이 도시는 성서를 믿는 모든 사람들의 것이라고 말했소… 안타깝게도 우리에게는 당신네 예언자 예수와 같은 힘이 없어 죽은 자를 살릴 수가 없소. 하지만… 다시 우리에게 무기를 들지 않겠다고 맹세하면 석방할 거요."(본문 474쪽)


영화 '킹덤 오브 헤븐'의 한 장면
영화 '킹덤 오브 헤븐'의 한 장면 ⓒ 20세기폭스
실제로 술탄 살라흐 앗 딘은 가신의 상당수를 유대인으로 발탁하여 그들의 학문과 철학을 통치의 기반으로 삼았다고 역사는 전합니다. 또한 그는 기독교도를 친구로 인정한 열린 군주였습니다.

성지회복을 위한 지하드(성전)의 와중에서 그는 많은 해안 도시들을 먼저 해방시키지만 유독 '티레'만은 가신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그냥 지나칩니다. 이유는 어쩔 수 없이 적으로 만난 운명이지만 그곳에는 이교도 친구 '레몽'이 피신해 있기 때문이지요.

"문제는 내 오랜 친구 트리폴리의 레몽이 티레의 요새에 숨어 있다는 거요. 나는 하틴에서도 그가 도망치도록 해주었소… 운명 때문에 우리가 적이 되었지만 나는 아직도 그를 가깝게 생각하오. 우정이란 신성한 믿음이오."(본문 440쪽)

친구를 위한 티레 침공의 포기는 위대한 술탄의 운명을 재촉하는 위기의 시발점이 됩니다. 계속 이어지는 십자군 원정대의 교두보가 바로 티레가 되는 것이지요. 군대를 상륙시키고 보급물자를 실어 나를 수 있는 전략적 요새로서의 교두보 말입니다. 사자왕 리처드의 원정대는 티레가 있었기에 예루살렘의 성벽 앞까지 진출할 수 있었던 이 역사의 아이러니 속에서 기자는 우정을 깨지 않은 술탄의 결정에 더한 연민이 솟구칩니다.

소설은 위대한 무슬림의 지도자 술탄 살라흐 앗 딘의 생애와 그가 품은 위대한 이상과 포부를 그의 유대인 서기(이븐 야쿠브)의 눈을 통해 들여다봅니다. 또한 중세 이슬람 제국의 내밀한 궁정을 엿보는 즐거움을 덤으로 선사합니다. 왕비 자밀라와 첩인 할리마의 동성애와 재상 이마드 앗 딘의 동성애 등 많은 변태적 사랑과 집착이 거기에 있습니다.

역사적 인물과 허구의 인물들이 함께 그려내는 중세 이슬람의 세상은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중동의 위기를 피상적으로 이해하는 우리에게 새로운 시선에 눈뜨도록 충동질합니다.

550여 쪽에 달하는 책의 두께는 읽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만큼 재미나게 읽히도록 소설적 완성도를 가지고 있지요. 인류 최초문명의 발원지인 메소포타미아에 사는 중세 무슬림들의 생활상이 촘촘한 그물처럼 짜여져 있습니다. 오늘날 세계 최대의 유랑민족으로 남아 있는 쿠르드족의 운명이, 살라흐 앗 딘을 만나면 선뜻 이해하기 어렵고 그들의 고단한 삶을 그린 영화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이 떠올라 슬퍼지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이슬람과 서구의 대립을 '문명의 충돌'로 본 사무엘 헌팅턴의 진단이 오늘날에 이르러 왜 많은 비판을 받고 있는지 소설을 읽으면 자연스런 해답을 얻게 됩니다.

팔레스타인의 긴장은 유대인들이 지금의 땅에 토착민들을 내쫓고 이스라엘을 건국한 데서 비롯된 점을 깨닫게 되지요. 중세 이슬람의 세상에서 그들의 신앙은 타종교의 미덕을 인정한 포용의 종교였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술탄 살라흐 앗 딘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킹덤 오브 헤븐'을 꿈꾼 진정한 세계인이었습니다. 알라 후 아크바르(Allahuh akbar), 신은 위대하다. 알라는 고유 명사가 아니므로 모든 신은 위대한 것이지요.

저자 타리크 알리(Tariq Ali)

영국의 이슬람 문학가이자 영화 제작자.

<술탄 살라딘>을 비롯하여 <석류나무 그늘 아래> <돌기둥 여인> 등 이슬람을 주제로 하는 소설을 집필해오고 있다.

정치평론가이자 저널리스트로도 활동하고 있으며, 국내에는 <근본주의의 충돌>을 비롯한 여러 권의 책이 번역되어 있다.

그는 스스로 아립인이면서 이슬람 신자가 아닌 무신론자임을 밝히고 있다.
/ 임흥재
그것을 충돌과 적대의 종교로 만든 것은, 적어도 무슬림이 먼저였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오늘날 이라크의 현실은 세계의 그리스도화를 부르짖는 기독신앙의 사명의식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시간에도 인간의 구원을 빙자하면서 오직 자신들의 교리만을 내세워 세상을 전쟁으로 몰아넣고 있는 보수적 기독교도(부시 같은), 그들에게 저는 묻고 싶습니다. 쿠오 바디스!(Quo Vadis)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덧붙이는 글 | <술탄 살라딘>/ 타리크 알리 씀/ 장영목 옮김/ 미래M&B/ 1만5000원


살라딘 - 십자군에 맞선 이슬람의 위대한 술탄

스탠리 레인 풀 지음, 이순호 옮김, 정규영 감수, 갈라파고스(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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