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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다는 모습이었다. 담천의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행동이었다. 담천의는 시선을 멍하니 허공으로 던졌다.

(너에게 정말 씻지 못할 죄를 졌구나….)

그는 남궁산산의 손길을 느끼며 더욱 깊은 자책에 빠져들었다. 지금 이 상황은 고지식한 그로서는 해결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밖의 정황은 어떻더냐?"

나가보지 못했으니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이미 두 차례나 병장기 부닥치는 소리를 들었고, 어느 쪽의 것인지 모르지만 연이어 비명이 터졌었다.

"오라버니가 혼절해 있는 동안 두 차례나 공격해 왔어요. 어려운 것 같아요."

안 봐도 뻔한 일이었다. 더구나 부상자를 치료해야 할 갈인규가 전적으로 자신에게 매달려 있었다고 생각하니 군웅들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진 이 빚을 어찌 갚을 수 있을까?"

그는 탄식을 터트리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러다 문득 남궁산산에게 말했다.

"산산… 이제 되었다. 옷이라도 걸쳐 주었으면 좋겠구나."

"오라버니는 아직…."

"형님은 당분간 움직이시면 안 되오. 아직까지 모공에서 탁기가 흘러나오는 중이오. 답답하시더라도 조금만 참으시오."

그것을 모를 담천의도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리 몸을 섞었다 하나 정신을 차린 지금 벌거벗은 몸으로 남궁산산의 손길을 느낄 수 없는 노릇이었다. 더구나 밖의 상황이 궁금해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래도…."

그가 힘겹게 몸을 일으키려 하자 일어나지 못하게 남궁산산이 지긋이 그의 몸을 눌렀다. 그리고는 짐짓 냉정한 어조로 말했다.

"이미 이 안에 있는 우리 세 사람은 모두 아는 일이고, 거둘 수 없는 일이에요. 지금 움직이시려 하면 오히려 우리의 수고를 헛되이 만드는 일일 수가 있어요. 그래도 움직이시겠다고 고집을 부리시면 혈도를 짚겠어요."

이럴 때 보면 확실히 사내보다 여자가 독하다. 그녀의 말에 담천의는 속으로 끄응 신음을 뱉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빨리 체력을 회복하는 것만이 우선이었다.

"그렇다면 한 가지 부탁을 하마. 사방 어느 곳에서나 훤히 볼 수 있는 곳이라면 좋을 것이다. 검은색 천에 흰색으로 하(霞)자를 써서 걸어 놓거라. 그것을 보고 누군가 나를 찾아오면 이쪽으로 안내하라고 하고…."

무슨 의미인지 갈인규나 남궁산산은 알지 못했다. 하지만 분명 누군가를 찾기 위함이다. 이곳에 들어온 지 겨우 사흘이 지났을 뿐인데 누구를 찾는 것일까?

"임시로 세운 망루가 있으니 그곳 꼭대기에 걸어 놓으면 될 거예요."

남궁산산에게 담천의는 미소를 지어 보이는 듯했다. 허나 그의 뇌리에는 이미 복잡한 생각이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백결…. 그 사람은 천마곡에 들어와 무사한 것일까? 섭노선배와 만났을까?)

어쩌면 이 위기를 벗어날 실낱같은 희망을 백결이 쥐고 있는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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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장은 폐허로 변해있었다. 곳곳에 시신이 나동그라져 있고 선혈이 내를 이룬 듯 했다. 시산혈해(屍山血海)란 말은 이런 것을 두고 한 말인 것 같았다. 혈투가 끝나 적막이 내려앉은 지 하루가 지났지만 피비린내가 진동을 하고 있었다.

육양수를 비롯한 네 분의 검저유혼 덕으로 이가장을 지킬 수 있었지만 대부분의 수하를 잃었다. 백 명이 넘는 상대를 척살한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번 혈투로 인해 옥형위 소속 인원을 거의 잃었을 뿐 아니라, 개양대 세 개조도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그 외 이가장에 남아 있던 오위의 인원들도 화를 면하지 못했다.

단사는 이런 모든 참변이 자신의 탓이라 생각했다. 어찌 얼굴을 들고 동료들을 볼 수 있을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가장을 다시 복원시키는 일은 그녀의 몫이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불가능했다. 이가장을 정리할 인원조차 없었다.

운 좋게 살아남은 인원들도 멀쩡한 사람이 없을 정도로 모두 극심한 부상을 입은 상태. 이런 상황이라면 이가장을 포기하는 것이 나았다. 허나 지금 부상자가 있는 상태에서 거처를 옮기기도 어려운 일이다. 다행이라면 기습해 왔던 상대도 막대한 타격을 입고 채 십여 명도 안 되는 인물들만 허둥지둥 돌아갔기 때문에 당분간 다시 공격하지는 못할 것이란 게 단사의 판단이었다.

웬일인지 그 어지러운 난전 속에서도 그녀는 가벼운 타박상과 몇 번 도검에 스친 상흔에서 피는 배어 나왔지만 심한 부상을 입은 것은 아니었다. 허나 그녀 역시 지쳐있었다. 생존자를 파악하고 부상자를 돌보는 일은 그녀의 몫이었고, 일단 임시방편을 취하고 나자 참을 수 없는 피곤이 몰려왔던 것이다.

무공을 익혔다 하나 여자의 몸이었다. 그녀는 허탈감과 피곤으로 온 몸에 기운이 빠진 채 자신의 침실로 들어섰다. 지금 그녀의 뇌리에는 오직 침상에 몸을 누이는 것뿐이었다. 그녀는 침실문도 닫지 않고 쓰러질 듯 침상으로 다가갔다.

"……!"

그러다 그녀의 시선이 얼핏 침실 한 쪽에 서있는 서가(書架)쪽을 무심코 지나치다가 갑자기 다시 고개를 홱 다시 돌렸다. 그리고는 그녀의 모든 동작이 멈추며 몸이 굳었다. 그곳에는 회의를 걸친 한 사내가 서있었다.

허리에는 검을 차고, 피부는 구릿빛으로 그을려져 있었다. 퀭하니 움푹 꺼진 눈에는 분노를 안은 듯 핏발이 서 있었고, 깎지 않은 짧은 구레나룻이 떡 벌어진 어깨와 더불어 강인함이 엿보였다.

황량한 들판을 치달리는 늑대와 같은 느낌이 드는 사내다. 그리고 언젠가 경덕진(景德鎭)의 함노인(咸老人)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훌쩍 떠났던 사내였다. 함노인의 아들이라던 함곡(咸鵠)이란 사내.

"당… 당신…!"

한참 만에 단사의 입에서 복잡한 감정이 서려있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의 표정 또한 복잡했다. 원망하는 듯한…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반가워하는… 종잡을 수 없는 기색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그녀는 표독한 표정을 지으며 소매에서 비수를 뽑아들었다. 동시에 지친 그녀의 몸 어디에서 힘이 솟았는지 빠르게 사내에게 다가들며 목줄기를 찔러 들어갔다. 그녀의 손에 들린 비수는 사내의 목을 뚫는 듯하였지만 놀랍게도 비수의 끝이 피부를 파고들었을 때 그대로 멈췄다.

그렇다고 사내가 호신강기를 운용했다거나 막은 것도 아니었고, 피한 것도 아니었다. 비수를 잡은 그녀의 손이 가늘게 떨리는 것으로 보아 그녀 스스로 멈춘 것 같았다.

"왜… 왜 피하지 않았죠?"

사내는 퀭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메말라 터진 입술이 떨어졌다.

"피하고 싶지 않았소. 짧은 순간이었지만 어쩌면 당신 손에 죽는 것도 괜찮을 것이란 생각을 했소."

나직했지만 듣기 매우 좋은 목소리였다. 그의 깊은 동공을 바라보면서 단사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녀의 비수를 잡은 손뿐 아니라 몸까지 가늘게 떨었다. 그리고는 갑자기 비수를 방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몸을 홱 돌리며 소리쳤다.

"나를… 이용했으면 그만이지 무엇 때문에 왔죠?"

나이가 들어 처음으로 사랑하게 된 사내였다. 우연히 만나 지독한 아픔과 고독 속에 허우적거리는 눈빛을 잊지 못해 사랑하게 된 사내였다. 만나기 시작한 지 4년이 넘었지만 실상 그와 만난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훌쩍 떠나 소식이 없다가 어느 때 불쑥 찾아왔다. 비가 몹시도 오던 날 그녀의 품으로 파고드는 사내를 뿌리치지 못해 그의 고독을 안았고, 외로움을 보듬었다. 그가 누군지, 무엇을 하는지 알아내고자 했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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