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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완전하게 어둠이 걷히지 않은 안개가 피어오르는 새벽이었다. 고요한 백가촌의 정적 속에서 은밀하게 움직이는 한 떼의 인물들이 있었다. 그들은 매우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는데 어림잡아도 백 명이 넘는 것 같았다.
앞에는 보통 사람 두 배나 됨직한 거한과 차갑게 보이는 여인 등이 섞인 열 명 정도가 그 무리를 이끄는 것 같았는데 그 중에는 거부를 사용하는 척탑(戚耷)과 경장차림에 가슴 양쪽에는 빽빽하게 비수를 꽂고 있는 적화(赤花)의 모습도 보였다.
그 우측 앞으로 무옥(武鈺)이란 인물이 있었는데 그를 조용히 따르는 삼십여 명은 한결같이 흑의를 걸치고 눈에 살광이 번들거리는 인물들이었다. 바로 전에 공손벽이 말한 바 있었던 백가촌 명륜각(溟輪閣) 소속의 살귀들이 그들이었다.
도데체 무었때문에 어둠도 채 가시지 않은 새벽에 움직이고 있는 것일까? 전면에 서있던 인물들은 백가촌의 입구를 벗어나는 듯하자 안도의 기색을 떠올렸다. 그러다 문득 안개가 흐르는 입구에 무언가 보이자 앞서 가던 무옥이 손을 번쩍 들었다.
“.............!”
흐릿했지만 분명 길 중앙에 무언가 있었다. 그리고 조금 더 나아가 뿌연 안개 속으로 그 물체가 무언가 깨닫는 순간 무옥의 얼굴엔 실망과 당황스런 표정이 교차되고 암울한 기색이 얼굴을 덮었다. 무옥의 뒤를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인물들도 한결같이 걸음을 멈추고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바로 공손벽이었다. 그는 길 중앙에 상의를 벗은 채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었다. 오십에 접어들었음에도 군살 하나 없는 그의 상체는 아주 매끈했다.
“실망스럽구나.....”
눈을 뜨며 공손벽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비로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그곳에 있는 인물들의 귀에는 훈장이 학동들을 야단치는 호통소리처럼 들렸다. 그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몰래 빠져나가려고 했다. 어차피 자신들이 먼저 움직이면 백가촌 전체가 움직일 것이라 생각했다.
영원히 이런 촌구석에서 썩기 싫었다. 왜 자신들이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억울했다. 그래서 벌린 일인데.....
“알고 계셨소? 우리는 절대 모르시리라 생각했소. 물론 우리들의 어리석은 생각이었지만 말이오.”
“나를 짓밟고 가겠느냐? 아니면 돌아가겠느냐?”
어찌 되었든 공손벽만큼은 진심으로 존경하고 있는 젊은이들이다. 그를 밟고 지나간다는 것은 상상도 해 본적이 없다. 갈등은 일어났지만 이미 공손벽이 가로막고 있는 이상 지나갈 수는 없다. 무옥이 공손벽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언제까지..... 도대체 무엇을 기다리며..... 우리는 어쩌란 말이오?”
나머지 인물들도 모두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공손벽도 가부좌를 틀고 그들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미안하다..... 하지만 너희들이 죽으러 가는 것을 두 눈 뜨고 두고 볼 수는 없었다.”
“.............!”
대답은 없었다. 그들은 고개를 숙이고 공손벽의 처분을 기다렸다. 백가촌의 규율은 엄하다. 분명 백가촌의 율법을 어겼고 그 어떠한 벌이라도 감수하리라 생각했다. 허나 공손벽은 몸을 일으키며 벗어 놓은 상의를 걸쳤다.
“너희들..... 장사를 해보고 싶은 마음은 없느냐? 처음에는 이곳에 많은 짐승들 가죽부터 팔아보자. 우리가 필요로 하는 지필묵도 사오고....”
그 말에 그들은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그들의 눈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이제 이곳을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이 비치고 있었다. 그들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사를 하려면 밑천이 필요하고, 팔 물건을 준비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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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어쩔 수 없이 정면으로 승부하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우우전(愚牛殿)의 취의청(聚議廳)이었다. 십여 명이 넘는 인물들이 모여 있는 가운데 좌상(左相) 뇌마(腦魔)가 공손하게 말했다. 중앙에는 방백린이 앉아 있었고 그의 왼쪽으로는 유항이, 그의 오른쪽에는 운령이 앉아있었다.
죽은 회마(灰魔)와 장마(掌魔)를 제외한 절대구마의 후인들이 앉아 있었고, 백결을 제압했던 우상(右相)이라 불린 인물 역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독 안에 든 쥐들을 완전히 소탕하지 못하고 있다니...... 아버님을 뵐 낯이 없군.”
방백린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자조하듯 중얼거렸다. 그의 얼굴에는 한 가닥 불만스러운 기색이 나타났는데 그의 시선은 유항을 바라보고 있었다.
“본 곡으로 들어 온 자들은 전 무림의 오할 정도의 전력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오. 그 중 구할 정도를 처리했다면 큰 성과라 할 수 있소.”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대군이 곤혹스러워 하는 뇌마의 입장을 옹호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숫자상으로 본다면 거의 전멸시킨 것과 다름이 없다. 허나 방백린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우리의 피해도 예상보다 훨씬 심각해. 실혼인과 시검사도를 거의 잃었지 않은가? 자네들의 수하 역시 태반을 잃었어. 더군다나 저들 중 살아남은 인물들은 한결같이 문파의 수뇌들이나 초절정고수들이란 말이야. 전력으로 본다면 저들만으로 거의 칠팔 할이야. 우리는 겨우 쓰레기 들이나 처리하기 위해 막대한 희생을 치렀고...”
방백린의 목소리는 비난에 가까웠다. 숫자상으로는 대군이 말한 것이 맞지만 전력으로 본다면 주력은 그대로 남은 셈이다.
“그 때문에 정면승부를 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완전하지 못한 실혼인이나 시검사도 정도로 남아 있는 자들을 처리할 것이라고는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았잖습니까?”
“물론이지. 허나 어느 정도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못 미친 결과야. 실망이로군.”
“저들에게 아주 뛰어난 모사(謀士)가 있습니다. 구효기가 아닙니다.”
뇌마의 말에 방백린은 고개를 끄떡였다. 그 역시 인정하고 있었다. 구효기를 당황시킨 것까지는 성공적이었다. 헌데 누군가 있었다. 소수로 다수를 상대할 수 있는 진을 구축하고 적절한 시기에 소수 고수들을 투입해 피해를 최소화 시키는 자. 방백린은 무의식중에 고개를 돌려 운령을 힐끗 보았다.
만약 운령이 도와주었다면 일이 훨씬 쉽게 풀렸을 터였다. 운령이라면 자신들이 파악하지 못한 상대의 모사가 생각하는 계책까지 짐작했을 터였다. 허나 운령은 냉랭한 표정으로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 애꿎은 찻잔만 만지작거리고 있다. 그녀를 설득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지금 그럴 시간은 없었다.
“정면승부를 하면 우리의 피해도 너무 커......”
정면승부는 문제가 있었다. 가장 큰 걸림돌이 바로 자신들의 등 뒤에서 나타날지 모르는 섭장천 일행이었다. 아무리 치명상을 입었다 해도 만약 장철궁이 회복한다면, 또한 우상이 잡았다 놓친 백결까지 합류한 상태라면 심각한 일이었다. 그들이 어둠 속에서 노리고 있는 한 마음 놓고 정면승부를 벌일 수 없다. 그의 시선이 우상에게로 돌아갔다.
“어찌 되어가고 있는가?”
우상은 눈을 가늘게 뜨고 생각에 잠겨 있다가 방백린의 물음에 자세를 고치며 입을 열었다.
“그들이 지금까지 이리저리 옮겨가며 숨어있던 곳은 모두 일곱 군데였소. 이미 덫을 놓았으니 어느 곳이든 나타나면 해결될 거요.”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은 우상의 성격에 맞지 않는다. 그런 그에게 이것저것 묻는 것도 옳은 방법이 아니다. 그는 임무를 주고 기다리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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