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을 돌아보는 동안 내가 가졌던 생각은 과연 꽃은 심는 것일까에 대한 의문이었다. 창덕궁의 꽃은 누군가 그곳에 심었다기 보다 그곳에 그려놓았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런 느낌은 특히 창덕궁에서 가장 사람들의 시선을 많이 집중시켰을 이 능수벚꽃의 앞에 이르렀을 때 더더욱 분명했다. 나무나 꽃을 심는다는 것이 그저 심는 것이 아니라 그리는 행위가 될 수도 있다.
나는 이번에 능수벚꽃을 처음 보았다. 다른 벚꽃과 달리 그것은 아름답게 피었을 때 하늘로 고개를 쳐드는 것이 아니라 땅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벚꽃은 가장 아름다울 때 위가 아니라 낮은 저 아래로 가고 싶어 한다.
능수벚꽃은 발처럼 휘장을 두르고 있었다. 발은 원래 바깥 풍경을 적당히 걸러내고 바람과 빛은 맞아들이기 위한 것이지만 이 능수벚꽃의 발은 그냥 그 발을 바라보기 위해 쳐두는 발이다. 때문에 능수벚꽃이 발을 치면 우리의 시선은 바로 그 발로 향한다.
담벼락은 오늘 산수유의 화폭이 되었다. 산수유는 화폭의 독특한 문양을 제대로 살려 노란 그림을 그렸다.
벚꽃만 다른 것이 아니라 창덕궁에선 목련도 남달랐다. 원래 흰빛은 저런 것이 아닐까 싶다. 향기도 매우 진하다.
누군가의 노래처럼 하얀 목련이 질 때 가슴이 아프다면 아마도 그 목련의 하얀색이란 바로 이러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목련이 진다면 헤어진 사람이 없어도 누구나 할 것 없이 가슴이 아련해질 것이다.
우리는 모이면 소란스러운데 꽃은 모이면 아름다움을 엮어낸다. 앵두나무는 작고 붉은 과실을 꿈꾸는 나무지만 그 붉은 꿈을 꾸는 봄날의 꽃은 희디 희기만 하다. 그 흰빛이 아우성처럼 피어나는 자리는 한자리에 모여있는 왁자지껄함으로 더욱 아름답다.
진달래이다. 정말 곱게도 차려입었다. 봄에 옷 한 벌 해 입고 싶은 여자들 심정이 이해가 간다. 그래서 봄엔 옷 한 벌 해주지 못하는 심정이 더욱 안타깝다.
사실 거의 모든 꽃들이 꽃보다 이파리가 먼저이다. 그리고 이파리는 대개 초록색이다. 그러나 봄에 꽃이 갖가지 색깔로 단장을 하는 순간 초록은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더 이상 색이 아니다. 나는 이파리가 예쁘다고 들여다보는 사람은 거의 보질 못했다.
나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창덕궁에서 철쭉의 이파리를 들여다보던 나는 철쭉의 그 진한 분홍빛이 초록 이파리 속에서 잉태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초록꽃이 분홍꽃을 낳고 있는 셈이다. 모든 이파리는 사실은 꽃이다. 사람들은 그 색이 초록 일색이어서 그 꽃을 놓치고 있다.
개나리는 흔히 보는 꽃이다. 지나가는 관람객들 중에서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여긴 어떻게 개나리도 이렇게 예쁘냐” 창덕궁에선 개나리도 그곳에 피어있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그곳에 그려놓은 꽃이었다. 봄의 창덕궁에선 꽃과 눈을 맞추는 순간, 그 주변이 곧장 화폭으로 뒤바뀌고 꽃은 그림이 된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에 동시에 게재했다. 블로그-->김동원의 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