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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ㅎㅈ스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스님은 지난 겨울 100일 기도 후 서울에 다녀오셨다. 그리고 지금은 어느새 봄을 가로지르는 때다.
"많이 바빠요?"
여전히 조심스런 인사말, 여전히 소녀 같은 목소리.
ㅎㅈ스님은 건너 마을 토굴에 사신다. 내겐 경남 하동군 악양골에 20여 년이나 앞서 자리잡은 선배님이다. 강산이 한 번 변했을 정도의 나이차가 있지만 짧은 시간에 정이 깊이 든, 언니 같고 친구 같은 벗이기도 하다.
홀로 받는 밥상에 어찌어찌 별식이라도 차릴 양이면 어김없이 전화를 건네는 스님.
"녹차수제비 빚을까 하는데…. 뜨끈하게 한 그릇 먹고 가."
뱃속은 아우성인데 입이 깔깔할 때, 반짇고리 팽개치고 휑하니 날아간다.
"표고가 쫄깃해. 군불 때니까 된장국 자주 먹는 게 좋아."
군불 지피며 매캐한 연기에 콜록거릴 때, 나 몰라라 부지깽이 내던지고 구세주 앞으로!
"매실장아찌 맛 좀 봐줄래요?"
내가 담근 매실장아찌도 자랑삼아 들고 간 날, 되로 주고 말로 받아 간장에 졸인 땅콩은 겨우내 내 밑반찬이었다.
"유부 한 봉지 뜯으면 혼자 먹기는 너무 많은 양이잖아."
알록달록한 피망 송송 썰어 넣고, 검은 깨 콕콕 박아 넣고, 잡곡밥 조물조물 밀어 넣은 유부초밥은 나도 즐겨 만드는 메뉴다.
매번 빈손으로 입만 매달고 가는 걸 미안해하는 내게 성찬을 준비한 것이 아니니 부담 갖지 말라는, 마음 편하게 해주려는 소박한 배려임을 나는 안다.
그 집에 건너갈 때면 아무리 두리번거려도 손바닥 채울 것이 없어 민망하다. 마당 안 텃밭에서 손수 가꾼 것들로 정갈한 밥상을 차려내는 스님께 무엇 하나 푸짐한 적 없던 내가 오늘 썩 폼 내며 들고 간 건 슬라이스 치즈 일곱 장.
"스님들도 치즈, 이런 것 드시던가요?"
어제(17일) 읍내 장터를 기웃거리다 큰맘 먹고 치즈 두 꾸러미를 샀다. 포장을 뜯지 않은 치즈 꾸러미만 달랑 들고 간 내 손은 오늘따라 어쩜 이리도 얄팍한지.
"병원에서 당분간 우유 같은 것 먹지 말라고 했는데…. 성의가 괘씸하니 하나 먹어볼까?"
여자의 질투는 무죄라던가. 나보다 더 맑고 밝은 표정이 부럽고 또 부럽다. 어릴 때부터 유난히 허약했다는 스님, 나이 들어가면서 관절도 안 좋고 아픈 곳은 자꾸 늘어가고.
"그 동네, 빈집이 있겠지? 내가 또 알아봐 줘야지."
이웃에 살던 수녀 한 분이 더 아랫녘으로 떠났다가, 돌아오겠다고 한다. 우리 마을로 모시고 와 여기저기 둘러보고 내 집에서 물 한 모금 마시곤 또 휘휘 걸어서 내려간다. 돌아갈 때는 늘 산책삼아 걸어가는 분. 제법 먼 길인데.
처음 만났던 작년 초여름, 서로 입고 있는 황토티셔츠에서 눈길을 떼지 못해 이야기를 나누다 그예 따라나선 그 집 마당에선 초여름에 막 접어든 들꽃들이 나를 맞아주었다.
오늘, 그 집 대문 앞에 지천인 구슬붕이는 보랏빛 애잔함으로 눈부셨다.
마당에 들어서니 샛노란 동의나물이 더미더미 함초롬히 앉아 나를 반기고 귀하디귀한 남산제비꽃과의 조우는 또 얼마나 환상적이었는지.
지닌 것 많지 않아 남에게 드리우는 민폐조차 조심스러워하는, 종교의 이념을 떠나 나눔의 믿음을 실천하는 분.
스님과 나, '돼지국밥집' 인연이다.
덧붙이는 글 | "홀로받는 밥상, 버석하잖아.
숟가락 하나 더 놓으면 되는걸."
1년의 짦은 만남,
스님이 차려주는 정갈한 밥상을 받으면
늘 가슴이 먹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