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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어차피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요. 최선의 선택이란 없소.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나은 쪽이 있다면 그 쪽을 선택하는 것뿐이오. 그리고.....”

담천의는 청허자와 독고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두 분께서 나머지 분들은 챙겨주셔야겠습니다. 부상을 입은 분들 때문에 더디고, 희생이 클지 모르나....”

그 때였다. 구효기가 마른기침을 하며 담천의의 말을 끊었다.

“험험.... 외람된 말씀이나 이번 계획에 너무 가볍게 생각한 중대한 변수가 있소이다. 깊이 생각해 보았으나 역시 이번 계획은 다시 재고해야 할 것이란 결론이오.”

이번 계획을 세우는데 아무런 의견을 제시하지 않고 있는 것이 이상했다. 몽화를 앞세워 일을 처리해왔기 때문에 서운한 마음이 들었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계획의 수정은 몰라도 정면으로 이번 계획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니....?

“지금 거동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중상자들이 적지 않소. 그들을 안전하게 옮길 방법을 생각해 보신 분이 있소이까? 더구나 만약 무리해 움직인다면 혼수상태에 빠진 환자는 치명적인 위험에 빠질 수도 있소.”

구효기는 틀린 말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성한 사람의 수만큼 부상자들이 있다. 제 몸을 추스르며 따라갈 수 있는 부상자들도 있지만 아예 거동을 하지 못하는 환자들도 많다. 그렇다고 이 문제를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미 식수나 식량마저 고갈되어 가고 있는 지금 이곳을 빠져 나가지 못한다면 방법은 두 가지 중 하나다. 버틸 때까지 버티다가 모두 죽는 것, 아니면 무모한 짓이지만 최후의 한 사람까지 공격을 하다가 장렬히 전사하는 것이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부상자를 데리고 나가는 것은 불가하오. 부상자들은 물론 오히려 멀쩡한 사람까지 다치게 하는 일이오. 우리는 이제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할 기로에 있소.”

좌중의 곱지 않은 시선이 구효기에게로 쏠렸다. 구효기의 말이 이어지지 않아도 그가 말한 두 가지 선택이 무엇인지 모를 사람은 없었다.

“버리고 가자는 말씀이오?”

무당의 청송자가 검미를 치켜세웠다. 그래도 정도(正道)를 걷는다는 무당으로서는 할 짓이 아니다. 좌중의 시선도 다를 바 없었다. 구효기가 청송자를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그런 말은 아니오. 우리가 선택해야 할 기로에 섰다는 말씀을 드린 것뿐이오.”

그럼 어쩌자는 말인가? 이곳에 남아 죽을 때까지 기다리자는 것인가? 아니면 냉정하게 부상자들을 팽개치고 도망가자는 말인가?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부상자들을 안전하게 데리고 나갈 방도를 찾아야 할 인물이 이런 문제점을 들고 나오는 이유는 무엇인가?

말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할 기로에 섰다고 했지만 이곳 좌중의 결론은 오직 하나 뿐이었다. 부상당한 인물들은 모두 동료요, 형제다. 만약 자기들만 살자고 부상자를 내팽개치고 천마곡을 빠져나왔다는 사실이 중원에 알려지면 어떻게 될까?

문파나 자신의 명예를 목숨보다 더 중하다고 생각하는 소위 정파라는 인물들이 내릴 결론이야 뻔하지 않은가? 좌중은 침묵에 잠겼다. 선뜻 나서서 해결책을 제시할 사람은 없었다. 자칫 말을 잘못한다면 모든 멍에를 뒤집어 쓸 판이다.

“저는........”

잠시간의 침묵이 흐른 뒤 몽화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곳에서 모두 공멸할 수는 없어요. 그렇다고 부상당한 분들을 두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죠.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부상당한 분들을 모두 데리고 나가는 수밖에 없어요. 그 와중에서 불행한 일이 발생한다 해도 감수해야죠.”

처음 생각했던 그대로였다. 몽화가 이런 문제를 사소하게 흘려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자 구효기가 고개를 저었다.

“뻔히 죽을 것을 알면서 데리고 나간단 말이요? 그렇다면 차라리 죽이고 나가는 것과 다를 바 뭐 있겠소? 부상당한 사람들이 그들을 위해 부상당한 것이오? 우리 모두를 위해 싸우다 그렇게 된 것 아니오? 지금 낭자는 사소취대(捨小取大)라는 명분으로 부상자들은 아예 배려 할 생각조차 하지 않은 계획을 실행하고자 하고 있소.”

“그럼 어쩌자는 것이지요? 모두 죽을 것을 알면서 이대로 죽음을 기다리자는 것인가요?”

몽화의 목소리도 올라갔다. 뻔히 알면서 왜 저러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구효기 역시 얼굴이 잔뜩 굳어 있었다.

“우리가 이곳에 들어온 본래의 목적이 무엇이었소? 사마외도를 응징함이 아니었소? 그런데 저들이 아직 건재해 있음을 뻔히 알면서 이제는 오히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도망치자는 생각은 비겁할 뿐 아니라 발상부터 잘못된 것이라 생각하오.”

이 무슨 말인가? 좌중이 머리를 짜내어 세운 계획을 애당초 발상조차 잘못된 것이고 비겁하다고 비난하다니..... 좌중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허나 구효기는 이미 내친걸음이라 생각했는지 단호하게 말을 덧붙였다.

“노부라면...... 차라리 옥쇄(玉碎)를 택하겠소.”

함부로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모두 끝까지 싸우다 죽자는 말. 어찌 보면 가장 확실한 명분이오, 명예를 지킬 수 있는 길이다. 사내대장부라면, 무림인들이라면 택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정면으로 구효기의 의견에 반박할 말은 찾아내기 어렵다.

“좌통수(左統帥)께서는 그만 하시지요.”

뜻밖이었다. 구효기의 의견에 제동을 걸고 나온 인물은 바로 천선위(天璇衛)의 위장 백렴이었다. 지금껏 전혀 의견을 제시한 바도 없었고, 의견을 제시할 입장도 되지 못했다. 균대위의 위장으로 균대위의 수장인 담천의가 있는 자리에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이유나 입장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가 왜 나선 것일까? 허나 그가 나서자 구효기의 얼굴에 뚜렷한 변화가 일었다. 당혹감과 노기가 번갈아 스쳐 지나갔다. 더구나 호칭도 구거사나 만박거사가 아닌 ‘좌통수’란 생소한 것이다.

“네...네가....?”

“이곳에 있는 분들을 충동질할 필요 없소. 결국 개죽음하자는 말씀과 다를 바 없소.”

구효기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의도를 가장 잘 알고 자신을 도와주어야 할 인물이 백렴이다. 다른 사람이 나섰다면 자신의 세치 혀로 의도대로 끌어갈 수가 있다. 하지만 백렴이 나섰다면 정말 아니다.

“네놈이 나설 곳이 아니다. 감히.....”

노기서림 목소리로 엄하게 꾸짖었다. 당황스러웠다. 일단 저 놈의 입을 막아놓고 보아야 한다. 기껏 적절한 시기를 맞추어 본래의 의도대로 이끌어가는 마당에 재를 뿌리고 있는 것이다.

“누구를 위하여....? 무엇을 위하여 이 분들이 개죽음을 당해야 하오? 지금까지의 희생만으로 만족할 수 없겠소?”

저 놈이 왜 이곳을 들어왔는가? 예정에 없던 일이었다. 그의 뇌리로 불길한 느낌이 스쳐지나갔다. 명분은 균대위의 수장인 담천의를 보호한다는 것이었지만 저 놈이 이곳에 들어올 이유는 전혀 없었다. 분명 다른 목적이 있었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구효기는 앉은 채로 백렴을 향해 쏘아갔다.

슈우욱----!

그의 쌍수에서 뿜어진 위맹한 장력이 백렴의 상체를 향해 뿌려졌다. 너무 급작스런 공격이기도 했지만 영문을 알 수 없는 두 사람 간의 일이라 이곳에 있는 누구라도 선뜻 나서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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