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서 '고마녀'로 통하는 고미숙(46)은 자신의 직업을 '고전평론가'라고 소개한다.
아무 분야든 뒤에 붙여 자칭 평론가로 행세하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이어서 고미숙의 '고전평론가' 역시 같은 범주에서 생각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3년 전 펴낸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그린비 펴냄)이 4만여 부나 팔려나가며 인문서치고는 공전의 히트를 쳤던 기록을 들춰보면, 이름붙이기는 자칭이었지만 그 만만치 않은 내공으로 누구나 인정하는 타칭으로도 '고전평론가'가 되었다.
그런 고미숙은 이번에도 기대를 배반하지 않고 문제작을 내놓았다. <나비와 전사>(휴머니스트 펴냄). 제목만 봐서는 요즘 말로 '대략난감'이다. 낯선 제목 위에 얹혀진 '근대와 18세기, 그리고 탈근대의 우발적 마주침'이라는 부제를 보고 나서야 근대성을 이야기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미숙은 이 책에 대해 지금까지 해온 공부에 대한 하나의 마디를 맺게 된다는 점에서 남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그러면서 묻는다. 이제 그동안 잡고 있었던 물음들을 놓아버려야 새로운 길을 나설 수 있지 않을까?
고전을 공부하다 근대에 도달했다던 고미숙. 이제 다시 근대를 통해 고전을 탐사하고 싶다고 말하는 고미숙을 지난 25일 서울 원남동에 자리잡은 연구공간 '수유+너머' 2층 찻집에서 인터뷰했다. 인터뷰 도중 이 곳에서 최근 새 책 <미래의 맑스주의>(그린비 펴냄)를 낸 이진경 서울 산업대 교수, 연구소의 추장 고병권씨의 얼굴도 마주칠 수 있었다.
푸코와 연암, 그리고 고미숙
"푸코가 고고학적 탐사를 무기로 근대성의 지축을 뒤흔든 전사라면, 연암은 그 위를 사뿐히 날아올라 종횡으로 누비는 나비다!"
낯선 책제목을 보완하려는 의도에서 <나비와 전사>의 책등에 박아놓은 문구다. 푸코를 '전사'로, 연암을 '나비'로 비유했다는 점에서 이 책을 '연암과 푸코'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 같은데, 어쨌든 연암과 푸코를 씨줄과 날줄로 삼아 근대의 심연을 탐색한다.
탈근대·근대·18세기라는 세 개의 그물망을 교차시켜 새로운 앎과 삶을 찾아나서는 이 책의 여정은 기차가 우리의 전통적 시공간을 어떻게 해체하고 근대적 시공간을 만들었는지를 탐색하는 것을 시작으로 '시공간-인간-성(性)-몸-앎-글쓰기'의 순서로 진행된다.
물론 각각의 주제가 따로 놀지만, 다른 주제들에 인접해 있으면서 때로는 엇갈리기도 하고 때로는 겹치기도 하면서 함께 어우러져 근대의 출구를 향해 나간다. '입구'에서 '오늘 여기에서의 삶'의 이야기를 물음으로 던지고, '출구'에서 '미래 거기의 삶'으로 날아가는 비전을 담아내는 형식이다.
"처음 공부를 시작하며 이 책을 구상할 때는 '근대성에 대한 계보학적 탐구'였는데, 공부를 시작하면서부터 사유가 달라져 처음 의도와는 사뭇 다른 책이 되었습니다."
그렇다. 고미숙이 텍스트로 삼은 근대가 우리에게 준 것은 균질화된 지식과 사유가 아니던가.
그럼에도 이 균질화된 근대적 사유에서 고미숙이 일탈(?)할 수 있었던 것은 고미숙이 코뮌적 지식인 공동체 공간 '수유+너머'의 정서적 분위기를 한껏 타면서 강의·발표·세미나를 거치는 동안 이질적인 것들이 다양하게 섞여들어와 비빔밥을 만들어놓았기 때문일 터이다.
연암의 내공은 유머에서 나온다
"잘 다듬어지고 완결된 학술적 보고서가 아니라, 이질적인 말과 사물들이 충돌하는 '활발발(活潑潑)한' 다큐멘터리로 감상되기를 기원한다."
고미숙은 많은 사람들이 근대나 푸코, 연암과 같은 용어 때문에 딱딱한 학술서라는 선입견을 가질까봐 그런 책이 아니라고 먼저 선을 긋는다.
그러면서 고미숙은 이 책을, '앎과 혁명'을 다시 구성하는 길 위에 설 수 있도록 매혹적인 갈림길을 마련해준 두 사우인 연암과 푸코에 대한 '헌정 앨범'이라고 했다.
"푸코의 고고학적 삽질을 보고 역사를 보는 눈을 배웠고 그러면서 연암을 만났는데, 푸코를 통해 '열하일기'를 보니까 이건 다른 세상이었습니다. 푸코는 근대성이 얼마나 견고한 요새로 둘러싸여 있는지를, 연암은 그 요새를 돌파하는 것이 얼마나 유쾌한 질주인지를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러면서 고미숙은 단지 명문장가나 실학자 정도로만 여기던 연암을 천의 얼굴을 가진 지식인으로 평가하면서, '천재와 범부의 경계를 깨뜨린 존경과 감동의 인물'로 치켜세운다.
"연암의 내공은 어깨에 힘주고 비분강개하는 것이 아니고 평이한 일상을 통해 세상의 심연을 보는 눈이 있습니다. 그래서 연암의 시선은 어떤 대상과도 만나고 접속할 수 있습니다.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가로지르기에 능수능란한 선비였습니다."
고미숙이 말하는 연암의 이 범접할 수 없는 내공의 힘은 유머다. 자기를 틀에 가두지 않는 그런 유머를 구사한다. '세상 사람들을 따뜻하게 하는 것은 유머'라는 달라이라마의 사유와도 맞닿아있다.
"한·미 FTA라니, 우리는 근대적 '욕망의 노예'인가"
20년째 앞을 보지 못하다가 갑자기 눈을 뜨게 되자 정작 집으로 가는 길을 찾을 수 없어서 울고 있는 사람이 쉽게 집을 찾아갈 수 있는 방법은? "도로 눈을 감고 가시오."
연암의 산문에 소개된 서경덕의 이 일화에 나오는 사람은 그동안 세상을 시각이 아닌 다른 감각으로 구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반대로 우리가 보고 있는 세상은 그저 우리의 시각에 의해 구성된 것일 뿐 '본래 면목'이 아니라는 의미일 수 있고, 그걸 확대하면 우리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세상은 그만큼 달라진다는 뜻이 될 터이다.
그래서 고미숙은 그동안 우리에게 들씌워져있던 근대에서 과감히 벗어나 세상을 보자고 한다.
"새만금이나 한·미 FTA를 한번 보세요. 한·미 FTA의 궁극적 목적이 결국 미국 중산층과 똑같이 되겠다는 것인데, 그건 지금의 삶의 다양성은 다 깨지는 것을 의미하고 젊어서부터 노후대책을 세워야 하는 비참한 삶으로 가자는 겁니다. 이건 근대의 구조화한 욕망의 노예가 된 우리가 새로운 비전을 찾을 수 없는 절박한 상황에 놓여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동안 "사회적 참여가 없다"는 비판을 받아왔던 '수유+너머'는 최근 연구소 외벽에 'FTA 결사 반대'라고 적힌 현수막을 걸어놓는 등 실천적 참여에 본격 나섰다. 공교롭게도 바람이 이 현수막을 강제철거(?) 하는 관계로 카메라에 담을 수는 없었지만 텅 빈 그 자리가 왠지 남다르게 보였다.
"고병권은 장애인 이동권 문제에, 이진경은 코뮌적 방식에, 그리고 저는 새만금에 관해 끊임없이 글쓰고 발언해오는 등 개별적이었습니다. 다만 이번에는 모든 회원들의 의견이 자연스레 모아지면서 한 목소리를 낸 것이죠."
'수유+너머'는 최근 인터넷 홈페이지에 "한·미 FTA, 새만금 간척사업, 대추리 미군기지 확장을 반대한다"는 글을 올려 "모든 이슈에 모두가 싸우자"고 선언했다.
때마침 고병권이 인터뷰하는 옆자리에서 5월 10일부터 보름 동안 새만금에서부터 서울시청까지 걸으면서 여러가지 현실적 문제들을 몸으로 배우는 행사의 선언문을 영어로 번역하느라 고심하고 있었다.
고전으로 첨단을 말한다
고미숙은 말한다. 공부는 더이상 취미나 교양이 아니라 삶이라고. 앎이란 결국 일상으로 돌아오기 위한 과정이라고. 배움이란 배고프면 밥 먹고 목마르면 물 마시는 것과 다르지 않는 '원초적 본능'이라고.
"한번 생각해보세요. 우리네 삶에서 날마다 하고 평생을 해도 변함없이 삶을 풍요롭게 해줄 수 있는 것이 공부 말고 달리 무엇이 있는지를. 실용적 목적이 없을 때 하는 공부야말로 최고의 지식이며 동시에 자기 삶을 통찰하는 지혜의 수행이 됩니다."
최근 연구소에 개설한 청소년 고전강좌에 남다른 관심을 보이는 고미숙은 삶에 대해 근본적으로 묻고 재구성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는 고전을 읽자고 했다. 역시 '고전평론가'라는 직업병(?)의 발동이다.
결국 우리가 그토록 믿어 의심치않는 근대를 과감히 벗어나 모든 것을 재구성하자고 말하는 고미숙. 그래야 비전 있는 미래와 만날 수 있다고 말한다. 삶과 앎을 일치시키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삶이라고 말하는 고미숙은 이제 근대를 갖고 글 쓸 것은 없을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고미숙은 18세기 이전으로 가서 오래된 시대를 통해 첨단의 문제를 말할 것이라며 연암의 <답경지지삼>(答京之之三)의 한 구절을 들려주면서 인터뷰를 갈무리했다.
"아이가 나비잡는 것을 보면 사마천의 마음을 얻을 수 있지요. 앞발은 반쯤 꿇고 뒷발은 비스듬히 들고는 손가락을 집게 모양을 해가지고 살금살금 가다가 잡았는가 싶었는데 나비는 호로록 날아가 버립니다. 사방을 둘러보면 아무도 없고 계면쩍어 씩 웃다가 부끄럽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는, 바로 사마천이 글을 쓸 때의 심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