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는 허리가 휘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허리를 펴지 못해도 할아버지의 망치질 끝에서 나무 막대는 허리를 꼿꼿이 펴고 몸을 똑바로 세웠다. 이제 늙어 허리는 구부러졌지만 손과 팔의 힘은 여전히 젊었다.
갯벌에서 한 아주머니가 나물을 뜯고 있다. 아주머니가 없었다면 갯벌은 텅비어 보였을 것이다. 갯벌이 있고, 또 나물이 그곳에서 자라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그곳이 텅비어 보일 때가 많다. 사람이 있어 그 곳이 그득해진다.
아버지와 아들. 아버지와 아들이 이렇게 손잡고 민머루해수욕장의 뻘을 걸으면 부자의 정이 새록새록 자란다. 뻘은 온갖 생명체를 키운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사람 사이의 정을 키우는 곳이기도 하다. 놀러온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큰 즐거움의 하나이다.
승재씨의 4촌형 집에 들러 차를 세워놓고 싣고 간 자전거로 갈아 탄 뒤 두 남자는 섬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그 길을 막 출발하던 참에 승재씨가 논에서 돌아오던 형수를 만났다. 둘이 길에서 간단하게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눈다. 승재씨와 그의 형수가 입가의 웃음을 보고 있노라니 이게 사람 사는 세상의 모습이지 않을까 싶다.
저녁엔 승재씨의 4촌형 남중우(왼쪽)씨의 집에서 묵었다. 술이 거나하게 오고갔다. 술과 함께 그간의 살아온 얘기들도 오고간다. 집에서 담근 붉은 색의 오갈피주도 얻어마셨다. 붉은 색이 고운 그 술을 국자로 퍼주셨다. 술이 바닥에 어른거린다 싶으면 어르신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잔을 내게.” 잔을 비우라는 말에 익숙해 있던 내게 그 말은 말 맛이 지금까지와의 말과는 다른 아주 감칠맛 나는 말이었다. 승재씨와 어르신의 대화는 그냥 듣고만 있어도 귓가에 침이 고일 정도로 말 맛이 있었다.
남중우씨 부부. 평생을 삼산면 상리에서 농사를 지으며 이 곳에서 살고 있다. 내가 풍경의 겉에서 만난 것이 바다와 산이었다면 풍경의 속에서 만난 것은 바로 이 곳의 사람들이었다. 그 어느 풍경도 풍경의 속을 이루는 그들의 아름다움을 따를 순 없다. 그리고 두 분이 내게 내준 저녁 식사 속엔 음식점에선 전혀 맛볼 수 없는 맛의 속이 있었다. 나는 이번에 처음으로 석모도에서 풍경과 맛의 속을 맛볼 수 있었다.
풍경을 구경하는 것도 즐겁지만 스스로 풍경이 되는 것도 남다른 재미이다. 승재씨는 바닷가의 긴의자에 앉아 스스로가 풍경이 되었다.
이튿날엔 석포리에 들러 승재씨의 6촌형을 만났다. 6촌형은 암으로 투병 중이었지만 하던 농사를 어찌 쉴 수 있겠냐며 고구마밭에 나가 있었다. 그의 6촌형 이태섭씨는 이렇게 말했다. “농사꾼이란 게 그저 자기가 애쓴 만큼만 가져가는 사람들이여.”
고구마밭은 이제 고구마를 심은 다음엔 이랑에 검은 비닐을 씌웠다. 그렇게 하면 잡초가 자라질 못한다고 한다. 현대적인 농법이냐고 물었더니 이태섭씨는 이렇게 말했다. “현대적인 농법은 뭐. 그냥 이제는 사람들이 약아져서 그런 거지. 이렇게 하면 김을 맬 필요가 없으니까.” 이날 서울에서 아들이 내려와 아버지의 애쓰는 손길을 돕고 있었다. 좋아보였다.
할아버지 한 분이 타고 가는 자전거 뒤에서 강아지 한마리가 상자 위로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어디 이웃집에서 얻어갖고 가시나 보다. 중간중간 강아지의 안위를 염려하여 뒤를 돌아보며 그렇게 강아지를 싣고 할아버지의 자전거는 시골길을 미끄러지고 있었다. 강아지가 자전거 뒤에서 신기한 듯 세상을 구경하며 새로운 주인집으로 가고 있었다.
이태섭씨의 아내 노정님씨는 바다로 나가 물고기를 거두어왔다. 방금 바다에서 거둔 그 물고기들은 그날 우리의 점심상을 풍요롭게 채워주었다. 그 점심에 나는 또 한번 맛의 속을 맛볼 수 있었다. 서울에서 먹는 물고기는 바다가 휘발되어 버린 그냥 음식에 불과하지만 석모도에서 그날 내가 먹은 점심상엔 바다가 그대로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에 동시에 게재했다. 블로그-->김동원의 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