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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구효기가, 아니 비원에서 자신들을 이용하기 위해서 만든 제마척사맹이라지만 맹주가 내정된 이상 중대한 결정은 맹주가 해야 하는 법이다. 특히 위기상황에서 중구난방 떠들다가는 아무런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자멸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노련한 인물들은 결정을 서둘지 않았다.
더구나 이 문제는 아무도 함부로 결정할 수 없는 중대사였다. 이 안 군웅들의 생사를 좌우하는 일이다. 이 안에서 가장 연장자인 무당의 청송자도, 중원최고의 문파라는 철혈보의 보주 독고문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선뜻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상대의 제의는 현 상황에서 군웅들에게 아주 달콤한 독약과 같은 것이었다. 몽화가 있었지만 연동에 들어선 군웅들의 느낌은 이곳을 통과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많은 희생이 따를 것이다. 헌데 상대는 단 한 번의 승부로 안전하게 밖으로 내보내 주던지, 아니면 천마곡 내에 갇혀 있던지 내기를 하자는 것이다.
군웅들에게 있어 철혈보의 신화는 언제나 무적이었다. 비록 반당이 패해 시신으로 돌아왔지만 철혈보주 독고문은 아직까지 무림인들에게 경외의 대상이었다. 또한 무당의 청송자도 있다. 소림과 함께 무림을 이끌어 온 양대 산맥 중 하나. 패할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군웅들은 상대의 제의에 응해야 한다는 의견이 압도적이었다.
승부에서 이길 수만 있다면 모든 위험이 사라진다. 악몽과도 같았던 천마곡 내에서의 막연한 두려움과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유혹이 군웅들의 가슴속을 채우고 있었다. 더구나 떼어놓고 온 부상자들도, 저들의 손에 잡혀있다는 동료들도 구해낼 수 있다는 제의는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것이었다.
허나 정작 청송자를 비롯한 수뇌부들은 매우 신중했다. 그들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백결과 대화를 나눈 몽화가 택한 것은 연동에서의 움직임을 멈추고 기다리는 것이었다. 답을 바라는 과노인과 무상에게 기다려 줄 것을 요구했다. 그녀의 명분은 한 가지였다. 제마척사맹의 맹주인 담천의가 와야 대답을 할 수 있다는 것.
반나절이 채 지나기 전에 나아가지 않고 기다리던 담천의 일행이 합류되자, 곧 바로 회의에 들어갔다. 하지만 격렬한 토론도, 의견이 상반되지도 않았다. 서로 설득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결론은 하나였다. 그들은 무인이었고 승부를 피하는 것을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문제는 오직 하나였다. 누가 과연 제마척사맹을 대표해 나설 것인가? 누가 승부를 나설 것인가? 선뜻 나서려는 인물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지목되면 사양할 생각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누가 결정되든 따를 정도의 능력을 가진 인물들이 있었고, 그만큼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무위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했다.
“헌데… 이 제의는 매우 불공평한 것 같소.”
상대의 제의를 몽화로부터 전해 듣고 한 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담천의가 불쑥 몽화를 바라보며 말했다. 좌중의 시선이 모두 담천의에게 쏠렸다.
“무엇이 말인가요?”
“이 한 번의 승부로 모든 것을 결정짓겠다면 조건은 동일해야 하오. 저들이 제의한 내용에 우리 역시 조건을 달아야 한다는 말이오.”
아직까지 좌중은 제마척사맹이 어떤 조건을 내걸어야 하는지 감을 잡지 못했다. 허나 몽화는 금방 담천의의 의도를 파악했다.
“저들이 패하면 저들 역시 천마곡에 갇혀 있어야 한다는 조건을 말함인가요?”
“물론 그렇지. 그래야 승부에 따른 내기의 조건이 같을 게 아닌가?”
대답은 담천의의 입이 아니라 구양휘에게서 나왔다. 청송자 등 수뇌부들의 고개가 끄떡여졌다. 모름지기 정당한 승부라면 조건이 같아야 한다. 쫓기는 입장이라 경황이 없어 깊이 생각해 보지 못했지만 그것이 공평한 조건이 될 것이다.
군웅들에게는 이곳을 무사히 빠져나가는 것이 유일한 목적이라 생각할 여지도 없었지만 수뇌부들은 달랐다. 이미 자파가 공격을 당한 입장이다. 어차피 이곳을 무사히 나간다 해도 저들과는 또 다시 중원에서 부닥칠 수 있다. 저들의 의도처럼 이곳에서도 천마곡 내의 인물들만이라도 묶어 둘 수 있다면 자파의 피해는 그만큼 줄어들 것이다.
“맹주의 말에 동의하오.”
철혈보의 독고문이 고개를 끄떡이며 말했다. 그러자 곧 이어 청송자 역시 같은 대답이다. 담천의의 시선이 수뇌부들과 눈을 마주치고는 몽화에게 멈추었다.
“상대에게 그 조건을 전하시오. 그들이 이길 확신이 없었다면 이러한 조건을 내걸지 않았을 것이오. 우리가 어떠한 조건을 내걸든 그들은 받아들일 것이오.”
몽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확신이 없으면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 담천의다. 그녀가 생각해도 상대는 이 조건에 동의할 것이다. 사실 이러한 조건도 중요한 것이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승부의 결과다.
과연 상대에서 승부를 결하기 위해 나올 인물은 누구일 것인가? 그리고 상대를 전혀 모르는 가운데 과연 누가 나서서 그를 꺾을 수 있을까? 무공이란 것이 무위만 뛰어나다고 해서 무조건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상극이 되는 무공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그래서 상극이 되는 무공을 가진 문파를 없애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 무림이다.
상대가 너무 자신 있게 승부를 제의했다. 그것은 이곳에 있는 누가 나오더라도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없다면 할 수 없는 제의다. 상대는 이 안에 있는 인물을 모두 파악하고 있다. 하지만 자신들은 상대를 모른다. 그녀는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휴우......”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시선이 창백한 안색의 백결에게 돌려졌다. 저 인물은 적들에 대해 잘 알고 있음이 분명했다. 아마 누가 승부에 나올 것인가까지 알고 있을 것이다. 몽화의 시선에 따라 좌중의 시선이 그에게 몰리고 있었다. 모두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험험....”
좌중의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백결은 헛기침을 했다. 함부로 말할 사안이 아니다. 더구나 자신도 완벽하게 알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좌중의 시선을 외면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아마 상대는 방백린이 직접 나서게 될 것이오.”
“방백린.....?”
누군가 그 이름을 뇌까리자 백결이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 사형제 중 셋째, 대사형을 몰아내고 천마곡을 접수한 인물이오. 모든 음모의 주역이기도 하고 모용화천과 연관을 가지고 있는 인물....”
그 말이 끝나기 전이었다. 석로(石路) 한 쪽 구석에서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모용화천의 아들이지. 바로 정주의 손불이의 친아들로 모용백린이라고 불러야 하는 인물이지.”
석로 한쪽 귀퉁이가 밀리며 백발의 노인이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주위에 퍼져있던 군웅들이 분분히 일어나는 기색을 보이자 담천의가 자리에서 일어나 좌중을 진정시키려는 듯 손을 젓더니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섭노야.”
청송자나 독고문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며 가볍게 아는 체를 하며 예를 취한다. 비록 지금까지 걷는 길은 달랐지만 한 때 중원을 울렸던 천하제일검의 명성은 그리 가벼운 것이 아니다. 그의 뒤를 이어 다섯 명의 인물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여섯째 등자후와 강명의 수족이었던 항인과 종륜, 그리고 항인과 종륜의 부축을 받고 있는 장철궁이었다. 그 외 한 명은 강명에게 철혈보에 대한 공격을 멈추라던 섭장천의 말을 전했던 사내였다.
“다행스런 일이군. 자네는 지금까지 자네의 역할을 기대 이상으로 했어. 비원에게나 우리에게, 그리고 모용화천에게 말이지. 마치 자네의 부친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야.”
말에 가시가 있었다. 하지만 섭장천의 얼굴에는 담천의에 대한 반감이나 비웃음 따위는 없었다. 오히려 아주 대견하다는 듯한 기색이었다. 섭장천은 천천히 다가왔다.
덧붙이는 글 | 5월 5일 어린이날은 하루 연재를 쉬겠습니다. 기다리시는 독자 분들의 양해 바라며 가족을 위해 하루를 봉사하시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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