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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영영 올 것 같지 않던 시골 산자락의 혹독했던 지난 겨울. 마음 한켠에 그래도 버리지 못한 건 봄이 온다는 희망이었다. 죽 끓듯 변덕스런 날씨가 교대로 들락이는 가운데 봄은 어김없이 왔지만, 버석한 가뭄은 또 흙바닥을 쩍쩍 가르며 봄이 오는 길목에 드러누워 훼방을 놓더라.
며칠 전엔 마른 먼지 일으키며 장대 같은 비까지 지나갔으니 어디로 튈지 예측할 수 없는 하늘. 농사로 평생을 살아온 이웃 어르신들의 깊은 한숨만큼이나 물들이는 사람의 가슴에도 마른 내음이 푸석거린 나날이다.
어쩌다 볕이라도 반짝 고개를 내밀면 그동안 손대지 못한 '물들이기'에 허둥거리기 일쑤. 며칠 맑은 날이 이어질 듯 오전엔 마당 한가득 말간 볕까지 머물러 염료를 끓이기 시작했는데 오후 들어 바람결이 거칠어지기 시작한다.
지붕 없는 작업장 곁을 떠날 수가 없다. 가스불의 기운이 어디를 향해 할랑할랑 혀를 낼름거릴지 종잡을 수 없는 날, 벼르고 별렀는데 가볍게 포기할 밖에. 검정이 필요하고 분홍도 필요한데 오늘처럼 하늘이 도와주지 않는 날엔 정련이라도 하면서 마음을 누그러뜨린다.
‘염색’을 생각하면 물들면서 드러나는 은은하고 고운 자연의 빛깔만을 떠올리지만, 곱게 물들어 원하는 색이 되기 이전에 정련에 마음 기울이는 정성을 결코 지나칠 수 없다. 염료에 따라 그 염료만이 지닌 고유의 ‘빛깔’은 기본이되 내가 빚은 색깔, 나만의 빛깔을 내기 위해 미리 준비하고 정성을 쏟는 이 과정도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물들이는 작업에 앞서 최선을 다하는 작업이 내겐 바로 정련이다.
‘정련(精練)’은, (천연)섬유에 들어 있는 이물질이나 화학성분을 없애고 표백이나 염색을 완전하게 하기 위한 준비 과정을 말한다. 염색을 하려면 이 과정을 놓치지 않아야 원하는 색을 고르게, 자연스럽게 얻을 수 있다.
견직물의 정련은, 하룻밤이나 물들이기 1~2시간 전에 미지근한 물에 담가 풀기를 빼준다. 비틀거나 꼭 짜지 말고 자연스럽게 빨랫줄에 널어 꾸둑꾸둑한 정도가 되었을 때 염색을 하면 좋을 것이다.
면의 정련은, 비누를 녹인 물에 폭폭 삶아 비눗기가 남지 않도록 맑은 물에 여러 차례 헹궈 볕에 잘 말린다. 염색의 본 과정보다 조금 가볍고 쉽게 하는 작업이라 나는 이 과정 또한 즐긴다. 당연한 것인데도 ‘즐긴다’라고 표현한 것은 정련을 하는 동안 이 과정 후에 벌어질 본 염색에 대한 기대감이 정련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화학기를 없애고 이물질을 제거하는 과정이 여기까지라면, 면 염색의 경우 선매염을 해두는 것까지가 나의 정련 방법이다.
자, 준비가 다 되었으면 이제부터 물을 들이자, ‘소(素)하고 담(淡)하게’ 물을 들이자.
덧붙이는 글 | 물들이기 좋은 계절입니다.
자연에 어우러져 자연에 물들기, 염색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조간경남'에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