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상 '전제조건 없는 남북정상회담'을 제안한 노무현 대통령의 울란바토르 발언을 둘러싸고 정파간 논란이 격화되고 있다. 한나라당은 노 대통령의 발언을 '선거용', '남북정상회담 구걸'로 폄하하면서 보수층의 집결을 노리고 있다. 이에 맞서 열린우리당은 한나라당을 반북·냉전세력으로 몰아붙이면서 친DJ 세력의 결집을 시도하고 있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또 다시 민족문제를 정략적으로 활용하려는 고질병이 도진 것이다.
언론 역시 민족문제를 정략적으로 접근하려는 여야를 비판하고 합리적인 대안을 모색하려는 모습보다는 갈등을 키우는 보도 양태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에 따라 노 대통령의 울란바토르 발언은 그 타당성과 실행가능성에 대한 진지한 논의는 뒤로 밀리고 정쟁의 늪에서 허덕이다가 끝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다. 미국의 전방위적인 대북 압박과 봉쇄, 그리고 북한의 '핵 억제력' 강화 및 중국을 통한 버티기로 조성되고 있는 한반도 정세의 민감성은 한국에게 감당하기 힘든 딜레마를 잉태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와 국회, 그리고 언론과 시민사회가 힘과 지혜를 모아도 헤쳐나가기 쉽지 않은 '엄중한 정세'를 앞에 두고 민족문제를 정쟁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것은 화를 자초하는 행위나 다름없다.
중요한 것은 '갈등의 축'인 민족문제를 어떻게 하면 '협력의 축'으로 전환시킬 것인가에 있다. 이는 노 대통령의 발언을 어떻게 하면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할 것인가라는 '잔머리'보다는, DJ의 방북과 남북정상회담을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과 남북관계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경로와 방안을 찾는 '큰머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DJ 방북 때 여야 대표도 동행을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노 대통령의 행보에 아쉬움이 남는다. 울란바토르 발언에 앞서 여야 대표들을 초청해 현 정세의 엄중함과 남북정상회담의 유용성을 설명하고 초당적인 이해와 협력을 구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만시지탄(晩時之歎)이다. 뒤늦은 감이 있지만, 노 대통령은 귀국 후에라도 여야 대표를 만나 본인의 생각을 설명하고 여야 대표들의 의견을 듣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는 정쟁의 늪에서 허덕이고 있는 민족문제에 숨통을 틔어주고 초당적 협력을 위한 분위기 조성에 기여할 수 있다.
다음으로 DJ 방북 때, 여야 대표단의 동행도 적극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는 대북정책에 대한 초당적인 협력을 실현할 수 있는 획기적인 방안일 뿐만 아니라, 자의든 타의든 민족문제를 정쟁의 대상으로부터 구해내지 못한 DJ의 역사적 책무이기도 하다.
또한 여야 대표단의 동행은 북핵 문제를 비롯해 한반도 평화 문제의 핵심적인 당사자인 북한과 미국에게도 의미 있는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 북한에게는 한국의 정권교체 여부에 따른 대북정책의 영향을 최소화하면서 남북관계를 안정적이고 예측가능하게 발전시킬 수 있다는 신뢰를 심어줄 수 있다.
미국에게는 지금까지 한국 정당간의 갈등을 야기해왔던 대북강경책이 오히려 초당적인 협력의 계기가 되고 있다는 인식을 심어줌으로써, 전향적인 태도 변화의 필요성을 일깨워줄 수 있다. 특히 북한의 핵포기를 위해서는 미국이 확실한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북미 직접대화에도 임해야 한다는 것은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의 주장이기도 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박 대표가 DJ 방북 동행을 비롯한 민족문제 해결에 적극 나서는 것은 자신의 말을 실천하는 것인 동시에, 미국에게도 의미있는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
물론 DJ 방북 때 여야 대표가 동행하는 문제는 복잡한 사안이다. 당사자인 김대중 전 대통령과 북한이 수용할 것인지도 불확실하고 여야 대표가 대승적인 차원에서 이를 요구할 지도 불확실하다. 바로 이러한 연유 때문에 DJ의 역할이 필요하다. DJ가 먼저 여야 대표를 초청해 동행을 제안하고 북한에게는 그 의의를 적극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제로섬이 아니라 윈-윈을 선택해야
DJ와 함께 방북하는 문제를 포함해 여야의 초당적인 대북정책의 대전제는 민족문제를 정파간 이해관계에서 최대한 독립시키는 것이다. 이는 초당적 협력과 국민통합이라는 내치뿐만 아니라 외치를 위해서도 대단히 중요하다.
통일외교안보문제를 둘러싸고 주요 정파간 갈등이 극심해지면, 북한과 미국 등 한국의 핵심적인 협상 상대는 '정권교체' 가능성을 의식해 대선이 가까워질수록 현 정부를 실질적인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발생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초당적 협력은 상대방의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에 대한 인식'을 완화해 대외정책에 대한 안정성을 제고시키는 데에도 필수적인 요소이다.
오늘날 정치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선거에 '올인'해 모든 문제를 선거와 결부시키는 '정치공학'이 아니다. 도무지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한반도 문제와 이와 연관되어 있는 양극화 해소를 위해 노력한다면, 표는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되어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한나라당은 노 대통령의 발언과 DJ의 방북을 초당적 협력의 계기로 만들 수 있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평화개혁세력을 자임하고 있는 열린우리당 역시 한나라당은 반북·냉전세력으로 규탄하는데 급급한 모습에서 벗어나, 한나라당과 함께 가겠다는 자세를 보일 필요가 있다. 민주노동당과 민주당이 초당적인 협력을 위해 조정·중재에 나서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내년 대선 이전에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비롯한 한반도 평화의 기반을 닦지 못하면, 누가 정권을 잡더라도 '고난의 행군'을 피할 수 없다. 2002년 12월 대선은 북핵 초기 단계였다. 그러나 이대로 가면 2007년 대선은 파국을 잉태한 절체절명의 순간과 맞닥뜨릴 공산이 크다. '위기의 지수' 차원에서 현 정권과 차기 정권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올 한해는 한국이 주도적으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여야가 제로섬이 아니라 윈-윈의 관점에서 초당적인 협력에 적극 나서야 하는 시점이기도 하다.
절망의 근원이었던 한국 정치가 이번 노 대통령의 발언을 계기로 희망의 정치로 거듭날 수 있는 정치권의 통큰 결단을 볼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