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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0년이 흘렀다. 그리고 오늘, 석유시대가 공식적으로 종말을 고한 것이다.
운혁은 옥상 텃밭에서 싱싱하게 자라고 있는 채소들을 대바구니에 가득 담았다. 매일 아침 옥상 텃밭을 이용해 채소를 대부분 충당할 수 있었다.
천연당 집권 10년 동안 너무나 큰 변화가 있었다. 사람들은 석유와 석탄, 원자력과 같은 화석에너지가 우리 생활을 지탱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군대는 '오일군대'라는 멍에를 벗고 평화 유지를 위해 최소한으로 운영되었다.
처음 석유 가격 때문에 자동차를 타지 못했던 사람들은 자전거를 타면서도 한때 자동차를 그리워했다. 하지만 수소자동차가 일반화된 지금도 자동차를 구입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자전거와 대중교통이 주는 편리함에 비해 자동차를 보유할 때 내야 하는 각종 세금과 주차딱지, 속도 위반·차선 위반 등 각종 범칙금, 비싼 보험료와 주차요금, 그리고 자동차를 폐기할 때 내야 하는 높은 처리 비용 등등은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프기 때문이다. 더는 개인 자동차가 필요하지 않았다. 자전거면 충분하다는 사실은 이젠 일반 상식이 되었다.
20세기는 석유의 시대였지
운혁은 인근 도시농장에서 일을 하고 있다. 자동차 산업과 대량 폐기물을 만드는 석유화학 산업은 높은 원유 가격으로 대부분 문을 닫았다. 한국의 중화학공업 단지 중 지금 남아 있는 곳은 없다. 석유에 기반한 산업이 대부분 종말을 고했기 때문이다.
20세기는 석유의 시대였다. 의류·창문·창호·자동차 범퍼·식기 등 모든 제품이 플라스틱으로 대체되었다. 하지만 지금 다시 플라스틱 제품들이 과거의 천연 제품으로 교체되었다.
당시 중화학공업에 종사하던 사람들은 대부분 농촌 농업이나 도시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국가의 대부분 토지는 토지공개념이라는 인식이 확대되면서 토지에 대한 개인 소유 개념은 점점 희박해졌고 토지를 국가에서 관리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누구나 농사를 짓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저렴한 임대료를 지불하고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이미 일반 기업에 종사했던 사람들 중 50% 이상이 귀농했다.
정부 산하 귀농센터는 귀농을 희망하는 사람들에게 3천평의 땅을 1년에 10만원에 장기 임대해 줬다. 땅은 보통 논과 밭 그리고 산으로 구분되었는데, 4인 가족이 살 수 있는 황토집 역시 저렴한 가격에 평생 임대되었다.
사는데 돈이 필요해? 왜?
이들은 대부분 의식주를 마을공동체를 통해 해결했다. 지역화폐는 일반화되고 일반 화폐는 많이 쓰지 않았다. 사람들은 돈이 아닌 노동을 교환하며 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예를 들면, 운혁이 마을공동체 노동에 참여하면 공동체 사람들은 운혁의 농사를 함께 했다. 공동의 노동을 통해 마을공동체는 더욱 가까워졌다. 이런 일은 대부분 마을에서 나이많은 분들이 주도했는데 이들은 대부분 석유시대 이전 시골 마을에서 살았던 경험이 있었다. 지역 화폐는 일종의 품앗이를 좀 더 체계화하는 식이었다. 이 때도 노인들은 과거의 품앗이 경험을 통해 현명한 방법들을 제안하곤 했다.
지역 화폐가 일반화되면서 과거의 돈 중심 사회는 점점 변해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돈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으로부터 벗어난 것이다. 지역 화폐를 이용해서 생활에 필요한 대부분의 것들을 구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쌀을 구하기 위해서는 논에서 일을 해도 되지만 자기가 가지고 있는 기술을 농부에게 제공해줘도 된다. 미용 기술이 있는 사람은 머리를 손질해 주고 받은 지역 화폐로 필요할 때 쌀을 살 수 있었다. 농부 역시 다른 사람의 노동력이 필요할 때에 대비해 농한기에 다른 사람의 일을 함께 했다.
마을공동체 회관에서 노동력이 필요한 사람과 노동력을 제공할 수 있는 사람들이 서로 노동을 교환하고 지역 화폐를 돈 대신 받았다. 그렇게 되자 돈 돈 돈 하던 세상은 돈 없이도 살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자동차가 떠난 도로는 다시 농토로
요즘 대학생 취업 1순위는 '농부'다. 석유시대가 종말을 고한 이후 농업이 지속 가능한 사회를 위한 기초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2018년 당시 농업 인구는 2006년 300만명에서 30만명으로 줄었다. 하지만 요즘 농업 인구는 1천만에 이른다.
석유시대가 끝나면서 대규모 화학공장들이 문을 닫았다. 화학비료와 화학농약 역시 가격이 너무 높아 사용이 불가능했다. 결국 모든 농장은 유기농이 일반화되었다. 더구나 트랙터 같은 농기계들이 고유가 때문에 고철로 변해 버려 농사 규모는 3천평을 넘지 않았다. 농지가 부족한 도시의 경우엔 자동차가 떠난 도로 1차선을 도시 마을 농토로 만드는 사업이 진행 중이다.
쿠바의 아바나는 세계의 모범 도시로 선정되었고 '아바나 따라하기'는 세계적인 유행이 되었다. 그것만이 인간이 지구에서 자연과 더불어 공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아바나는 이미 20세기부터 도시 유기농업을 성공적으로 이끈 대표적인 사례다.
대학생들이 대부분 농업을 선택하는 이유는, 자유와 한 차원 높은 삶의 질이었다. 토지는 정부에서 장기 임대를 해줬고 농사는 힘이 들기는 했지만 자급자족하는 자유로운 삶이 보장되었다. 농부들은 대부분 하루 6시간만 노동을 했다. 나머지 시간은 대부분 아이들과 함께 보냈다. 지역공동체에서 운영하는 마을 탁아소에서 자원 봉사를 하거나 지역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토론하며 시간을 보냈다.
한해 농사 마치면 자전거타고 생태여행
많은 돈을 벌지는 못했지만 돈을 쓸 일이 별로 없어 삶의 질이 떨어지지는 않았다. 더구나 농사가 끝나고 다음 농사가 시작될 때까지 자전거 여행을 떠나거나 가족 단위의 생태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 기업에 종속되어 일 년 내내 일을 하는 것보다는 계절적 실업이 발생하는 농업의 특성을 이용해서 꽤 긴 휴가를 즐길 수 있었다.
여행 경비는 사실 거의 들지 않았다. 대부분 자전거를 이용하거나 걷기 여행을 했기 때문이다. 과거 여행이 멀리 가서 보는 것이었다면 요즘 여행은 가까운 곳을 관찰하며 자연과 호흡하는 것으로 변했다.
대부분의 마을공동체는 이런 여행객들을 위한 숙박 시설까지 갖추었다. 숙박 요금은 마을 공동체의 지역 화폐가 사용되었다. 여행은 지역 화폐 흐름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했다. 이를테면 천연염색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천연염색에 종사하기 때문에 지역 화폐를 다양하게 사용하기 어려운 경우, 천연염색을 배우거나 여행하는 사람들이 내놓고 가는 해당 지역의 지역 화폐를 이용해서 필요한 것들을 구입하면 되었다.
또한 지역 화폐를 다른 지역 화폐로 교환해 주는 센터도 있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었다. 1년 동안 지역 사람들과 열심히 더불어 산 사람은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여행이 가능했던 것이다. 더구나 자전거 여행은 텐트를 치거나 음식을 직접 해먹기 때문에 경비가 거의 들지 않았다. 여행을 위해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시간과 체력, 그리고 자연과 호흡하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그래서 농부들은 다른 직업에 비해 여행 기회가 많았고 돈에 구속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높은 인기가 있었다. 운혁이 일하는 곳 역시 아바나 시스템을 이용한 도시 농장이었다. 도시 농장에서 생산한 신선한 농산물은 대부분 그 지역 사람들이 소비한다. 농장과 시민의 직거래는 식량 구입의 80%를 차지한다.
서울로 모이는 농산물? 그게 언제 얘기야
거리가 먼 곳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을 구입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나마 공정한 거래를 위해 시민단체에서 열대 농산물이나 특정 지역의 농산물을 수입했지만 많이 소비되지는 않았다. 지역에서 생산된 것은 지역에서 소비한다는 지산지소(地産地消)운동이 활성화되었고 그것이 가장 좋은 시스템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천연당 집권 10년 만에 농부들은 스스로 삶을 만들어가는 일의 자유를 획득했던 것이다.
사실 예전에는 모든 것이 서울로 모였다가 다시 지역으로 분배되는 비효율적인 시스템이었다. 이를테면 구례 사람이 구례에서 생산된 농산물을 구입하는데 서울 도매시장에서 거래된 농산물을 구입한 도매상인이 다시 구례로 물건을 내려보내는 괴상한 방식이었던 것이다. 요즘은 지역 농산물은 지역 농산물 직거래센터나 가까운 농장의 무인가판대에서 구입한다.
요즘 가장 많은 농산물 거래 방식 중 하나가 무인가판대다. 무인가판대는 농장에서 직접 설치해서 운영할 수 있었다. 이것은 일본에서 많이 활성화되던 것인데 요즘은 한국 도시농장 인근에 대부분 설치되어 있다. 무인가판대의 운영시스템은 아주 간단했다. 운혁 역시 옥상 텃밭에서 자라는 채소 중 잉여 채소가 있을 때 무인가판대를 이용해 판매하고 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난 농부는 농장에서 방금 생산된 농산물을 4인 가족이 한 번 먹을 수 있을 만큼씩 분류해서 가판대에 올려놓고 가격을 붙인다.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을 하거나 장을 보러 온 사람들이 가판대의 물건을 보고 필요한 물건을 구입한다. 돈은 무인가판대가 설치된 돈 통에 집어넣고 가면 된다. 가판대를 지키는 사람은 없지만 돈을 내지 않고 가는 사람도 없다. 여기서도 물론 지역 화폐가 사용된다.
무인가판대는 농산물을 재배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만들 수 있었다. 자전거 도로변에 설치된 무인가판대는 또다른 문화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어떤 농부가 농산물을 생산했는지 매일 보기 때문에 믿을 수 있다. 정부의 인증 농산물 같은 제도보다 확실한 방법인 것이다. 농부들은 이렇게 판매한 것으로 생계를 지탱할 수 있다.
엄마아빠 어릴 적엔 '사교육'이란 말도 있었지
교육제도 역시 사람들의 가치관이 바뀌자 자연스럽게 바뀌었다. 돈과 성공을 위해 자동차처럼 빠르게 달리던 사람들은 자전거처럼 느린 삶을 추구하게 된 것이다. 사교육이라는 단어는 사실상 사용되지 않는다. 아이들은 기본 교육이 끝나면 부모들과 함께 노동을 하거나 마을공동체가 운영하는 도서관과 교육센터에 모여 또래들과 뛰어 놀았다.
마을에 살고 있는 외국인들은 자연스럽게 외국어 선생님이 되었고 조그만 능력이라도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마을 선생님이 될 수 있었다. 책을 좋아하는 주민은 독서지도를 할 수 있었고, 농사를 잘 짓는 농부는 땅 선생이 되었다. 낚시를 잘하는 사람은 아이들과 함께 낚시를 했다. 마을 노인들은 아이들에게 과거 문화유산을 가르치고 아이들을 보살피는 중대한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들이 부모와 함께 할 시간이 늘었다는 것이다. 부모들은 대부분 시간을 사랑하는 아이들과 함께 보냈다. 아이들이 원하는 것은 비싼 장난감이나 사교육이 아니라 부모의 사랑과 관심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3편으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당신의 거래가 세상을 바꿉니다. 참거래 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