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과중채무에 허덕이다 얼마전 부인과 이혼한 김아무개씨가 자신의 집 주변을 걷고 있다.
과중채무에 허덕이다 얼마전 부인과 이혼한 김아무개씨가 자신의 집 주변을 걷고 있다. ⓒ 오마이뉴스 김연기
15일 저녁 7시 어스름이 짙게 깔릴 무렵, 녹슨 철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찬 바람이 불어닥쳤다. 서울 동작구 상도동 재개발지구 김아무개(58)씨의 판자집. 인근의 5가구 가운데 4가구는 이미 이주를 하고 반쯤 철거된 상태다. 김씨는 지난 1월 부인과 이혼 한 뒤부터 이곳에 살고 있다.

김씨는 90년대 초 생수판매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인근에 대기업 계열의 생수회사가 대리점을 내면서 매출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생수사업을 접고 99년 정수기 판매사업에 손을 댔다. 김씨는 이 때 부인 명의의 신용카드를 빌렸다. 김씨는 이 신용카드로 5000만원을 끌어모아 사업자금에 보탰다.

이후 정수기 판매에 매달렸지만 매출은 늘지 않고 운영경비만 지출되면서 적자가 쌓여갔다. 결국 김씨 아내는 5000만원의 빚을 떠안게 됐다. 김씨는 계속해서 채무가 늘어나자 부모가 살고 계신 시골로 살림을 옮겼다.

당시 김씨의 아버지는 농가부채를 지고 병중에 있으면서 아들의 채무 소식을 접했다. 김씨 아버지는 아들의 빚을 갚아주지 못하는데다 병원비만 부담만 계속 늘어나자, 2003년 3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김씨는 애초 파산신청을 하려 했으나 '파산선고자'에 대한 주위의 편견이 두려워 이를 미뤘다. 이런 가운데 채권추심원은 김씨를 찾아와 수시로 빚독촉을 했다. 심지어는 아이들 학교까지 찾아가겠다며 김씨를 위협했다. 김씨는 빚독촉에 시달리다 지난 1월 부인과 이혼을 했다. 김씨는 결국 지난 3월 민주노동당 경제민주화운동본부에 개인파산 상담을 신청했다.
파산신청자 18%, 이혼 등 가정파괴

ⓒ 오마이뉴스 고정미
최근 3~4년 사이 개인파산 신청 건수가 급증하고 있다. 대법원과 신용회복위원회에 따르면, 지난해 법원에 접수된 개인파산 신청은 3만8733건으로 2004년 1만2317건보다 3배나 늘었다. 개인파산 신청은 2002년 1335건에서 2003년 3856건으로 해마다 늘고 있다.

이처럼 개인파산 신청이 증가한 것은 2003년 신용카드 대란과 2004년 이후 경기 침체가 지속되면서 경제적 취약자가 늘어났기 때문이라고 대법원은 설명한다.

이런 가운데 개인파산 신청자들의 가정파괴 현상도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오마이뉴스>는 민주노동당 경제민주화운동본부(이선근 본부장)와 함께 지난 3~4월 민노당에 접수된 개인파산 상담 신청자 340명의 경제·사회적 생활실태를 알아봤다.

조사 결과 설문대상자의 17.9%인 61명의 채무자들이 과중채무, 채권추심으로 인해 이혼을 하는 등 가정파괴 상황이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임동현 민노당 경제민주화운동본부 국장은 "가족 구성원 간 보증채무로 온 가족이 신용불량자로 주저앉고, 금융기관의 불법 채권추심을 견디다 못해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는 사례가 최근 몇 년 사이 빠르게 늘고 있다"고 말했다.

"파산자 낙인 싫다" 개인파산 신청 주저

과중채무자는 극심한 빚더미에 시달리기 때문에 개인파산 등 채무탕감에 적극적으로 기댈 것이라는 게 일반인의 생각이다. 그러나 조사 결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설문대상자의 108명(31.7%)은 '본인 및 가족에게 불이익이 있을까봐' 개인파산을 주저한 것으로 조사됐다. '파산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 때문에 개인파산을 주저한 경우도 63명(18.5%)에 달했다.

이 같은 이유로 개인파산 신청을 미뤄오면서, 응답자 대부분이 불법 채권추심에 시달린 것으로 나타났다. 채권 추심원의 '잦은 전화'(134명, 39.4%)와 '가족·동료 등에게 채무사실을 알림'(65명, 19.1%) 등 설문 대상자의 314명(92.3%)이 불법 채권추심에 시달린 적이 있다고 답했다.

이 같은 불법 채권추심은 고스란히 가정파괴로 이어졌다. 사회적 관계에서 약자의 위치에 놓인 채무자가 채권자의 인격 모독에 당당하게 맞서기란 쉽지 않다. 채권자의 권한이 막강한 상태에서 자칫 밉보이기라도 하면 어떤 불이익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택시 기사였던 박태경(47)씨는 지난 99년 사고로 운전을 그만두고 족발집을 운영했다. 그러나 식당 주변의 대형 공장 2곳이 중국으로 이전을 하면서 매출이 급감했다. 2005년 말 박씨가 떠안은 빚은 9000만원에 달했다. 이후 박씨의 부인은 채권 추심원의 잦은 방문과 빚 독촉에 시달리다 올해 초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선근 민주노동당 경제민주화운동본부장은 "빚 진 돈의 액수 때문이 아니라 돈을 갚지 못하는 동안 받게 되는 심리적 압박 때문에 자살을 하는 경우가 많다"며 "이들은 지속적으로 조여오는 스트레스를 견디다 못해 최후의 해결책으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불법 추심을 견디다 못해 높은 금리로 빚을 되갚는 악순환도 이어지고 있다. 실제 설문 대상자의 상당수는 은행 등 제도권의 금융서비스를 받지 못한 채 사금융으로 내몰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가운데 31%인 94명이 대부업체, 개인사채 등 사금융을 이용한 것으로 조사됐다.

하지만 빚을 갚지 못하는 상황이라 해도 채무자는 법원의 채무조정을 통해 이를 해결할 방법이 있다. 개인파산, 면책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개인파산은 법원으로부터 '빚을 갚을 능력이 없다'는 것을 확인받는 것이다. 면책은 더 나아가 '빚을 갚을 필요가 없다'는 점까지 법원에서 인정해주는 것이다.

면책자의 37% "취업활동 차별"

개인파산과 면책이란?

개인파산은 법원에서 '이 채무자에게는 빚을 갚을 능력이 없다'는 확인을 받는 것이다. 채무자가 법원을 통해 채무변제를 할 수 없다는 점을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면책은 이보다 더 나아가 법원이 '이 채무자는 빚을 갚을 필요가 없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개인파산을 위해서는 일정 서류를 갖춘 뒤 현 주소지 관할 지방법원 파산과를 통해 파산 신청을 해야 한다. 파산절차는 '파산신청→파산선고→파산선고 뒤 1개월 내 면책신청(동시신청도 가능)→면책결정'으로 나뉜다. 파산선고자 중 면책이 이뤄지는 비율인 면책허가율은 2000년 57.5%에서 지난 2004년에는 97.6%까지 늘어났다.
그러나 개인파산과 면책이 이뤄졌다 하더라도 채무자의 '굴레'에서 완전히 '해방'되지 못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 개인파산자라는 꼬리표가 여전히 따라다니며 이들의 취업·금융활동을 방해한다.

민노당이 지난 2005년 한해 면책이 확정된 2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면책을 받은 자의 86%가 면책 이후에도 금융기관으로부터 채권추심을 받은 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63%는 은행 계좌개설이나 현금카드 발급거부 등 금융활동에서 제약을 받고 있다고 답했다. 또 취업활동 등 사회적 차별을 경험했다는 비율도 38%에 달했다.

개인파산은 지급 불능에 빠진 채무자의 빚을 탕감해준 뒤, 그를 사회적 구성원으로 복귀시켜 경제적 재생을 돕는 제도이다. 그러나 설문조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개인파산이 오히려 채무자의 사회활동을 제약하는 족쇄로 작용하고 있다.

송병춘 민노당 가계부채 SOS운동본부 고문 변호사는 "파산신청을 하는 이유는 파산·면책절차를 통해 채무를 면제 받고 경제적으로 새출발을 하기 위한 것인데, 파산선고를 이유로 오히려 직업을 잃게 된다면 파산선고자를 두 번 죽이는 셈"이라며 "파산선고에 따른 자격제한, 자격박탈 등 불합리한 법률조항에 대해서는 입법적 재정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일부에서는 서민전용 대출을 활성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제기되고 있다. 소액 신용대출 기관인 '신나는 조합'의 박팔주 정책팀장은 "서민층 이하의 사람들이 은행권 대출에서 소외되고 고금리의 사금융으로 몰리면서 이들이 극빈층으로 전락하는 악순환이 벌어지고 있다"며 "서민층이 전용할 수 있는 대안금융기관 도입 등 서민대출 활성화가 시급하다"고 말했다.

ⓒ 오마이뉴스 고정미
파산을 하면 경제활동을 할 수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다만 공무원이나 의사, 변호사, 회계사 등 일부 전문직의 경우 파산선고를 받으면 직업을 유지하는 데 법적 제한이 있다. 이 밖의 경우 아무런 제한이 없다.

또 파산을 하면 호적에 빨간 줄이 그어지고, 자식들에게도 해를 미치는 게 아니냐고 알려져 있지만 이 역시 사실과 전혀 다르다. 이는 대부분 채권자가 채무자에게 파산신청을 못하게 하려는 의도에서 파산제도를 곡해했기 때문에 나온 말들이다.

오해 2. 파산신청은 도덕적 해이?

법원에서 파산선고 시 중요하게 보는 것이 이 채무자가 어떻게 빚더미에 올랐냐는 점이다. 개인파산자는 고금리 피해자에 국한된다. 고금리로 인해 지급불능 상태에 빠져 어쩔 수 없이 파산을 신청할 수밖에 없는 이를 법원은 파산선고 대상자로 삼는다.

대부분의 파산 신청자들은 채권 추심에 떠밀려 원금보다 몇 배 많은 이자를 지불하고 있다. 즉, 이들은 도덕적 해이자가 아닌 고금리 피해자일 뿐이다.

오해 3. 파산은 인생의 종지부다?

파산은 사형선고가 아니라 경제적 부활을 의미한다. 파산은 지급불능에 빠진 채무자가 자신의 재산을 정리해 채권자들에게 배당한 뒤 낭비 등 일정한 면책 불허 사유가 없는 경우 채무에 대해 면책을 받는 제도이다. 결국 채무자를 사회적 구성원으로 복귀시켜 경제적 재생을 도와주는 제도이다.

오해 4. 빚이 많은데 면책이 되나?

사치나 낭비를 통해 채무가 늘어난 경우가 아니라면 면책이 가능하다. 파산법은 채무자가 적극적으로 재산을 은닉하거나, 낭비를 통해 재산을 현저하게 감소시키는 경우에만 면책을 불허하고 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